소설리스트

독의 주인-32화 (32/76)
  • #32화. 상처 (1)

    “이독경.”

    주인이 끊어질 것처럼 연약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독경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내가 제일 행복했던 때가 언젠지 알아? 너랑 같이 그 작은 자취방에 누워서 빗소리를 들을 때였어. 그때는 함께 있으면 불안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거든....”

    “나도 그래요.”

    그가 매달리듯 다급하게 그녀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맞닿은 피부는 이미 서늘하다 못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마 난 널 다시 만나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나 봐.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는데....”

    주인이 그를 밀어내며 품에서 빠져나왔다. 독경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그가 마른 등을 돌리고 앉아 블라우스의 단추를 채우는 그녀에게 갈급하게 항변했다.

    “꼭 돌아갈 필욘 없잖아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아니, 나 이제 너 안 만날 거야. 널 만날 때마다 너무 괴로워. 이제 그만, 나가 줘.”

    옷을 다 입은 주인이 천천히 일어서서는 고압적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독경이 턱 근육이 꿈틀거릴 만큼 세게 어금니를 꽉 씹으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옷을 대충 걸친 채, 그녀를 지나쳐 문을 열었다.

    시커먼 복도만이 음침하게 그를 맞이했다.

    가랑비는 어느새 폭우로 변해 있었다. 독경이 비틀거리며 주차된 차 앞까지 느리게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속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넘치는 노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젠장!!”

    독경이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더니, 제 차를 몇 번이고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러다 퍼뜩, 미세한 경련이 이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 안에 절망과 저주가 지독하게 어렸다.

    ***

    다음 날,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상사를 보며 이신은 약간 당황한 채 머뭇머뭇 물었다.

    “소, 손은 왜...?”

    그러자 독경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아, 일이 좀 있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제 차가 화주동에 있는데, 사이드 미러가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겨야 합니다. 주소 보내드릴 테니 백 기사님께 말씀 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이신이 영 저기압인 상사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독경이 거추장스러운지 넥타이를 거칠게 끄르며, 의자 등받이에 풀썩 몸을 기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조금씩 주인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아니, 오히려 더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이대론 못 보내지....”

    그가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받지 않았다. 지금 당장 회사로 찾아가겠다는 문자를 보낸 뒤에야, 그녀와 연결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한겨울 칼바람도 이보다 매섭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독경은 생각했다.

    “좋아요, 선배 뜻대로 할게요. 대신 마지막으로 밥 한번만 같이 먹어요.”

    긴 침묵 끝에 주인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의 질문에 그녀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뜻밖의 단어를 꺼내 들었다.

    [칼국수.]

    “칼국수?”

    독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우리가 예전에 학교 앞에서 먹었던 그거....]

    그녀의 부연 설명에 그가 활짝 웃었다. 그런 것이라면 백 그릇, 천 그릇도 사 줄 수 있으니까.

    [근데, 이젠 못 먹어. 할머니께서 장사 접고 고향으로 가셨거든.]

    주인이 사망 선고를 내리듯 비장하게 읊조렸다.

    의도가 명백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너와는 밥을 먹지 않겠다는 매정하리만치 잔인한 선언.

    “알겠어요, 이따 여섯 시에 회사 앞으로 차 보낼게요.”

    그러나 독경은 의외로 꽤 산뜻한 반응을 보였다.

    퇴근 후, 주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하게 서 있었다. 식사 자리가 이렇게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냥 안 간다고 할 걸 그랬나?’

    그녀가 손끝으로 제 입술을 만지며 뒤늦게 후회했다.

    하지만 육 년 만에 만나서 단둘이 밥 한번 먹자는 제안을 거절할 만큼, 주인은 모질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독경에게만은 늘 마음이 약해졌다.

    그녀는 어젯밤 빗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를 떠올리며 고뇌했다.

    당장 저 쏟아지는 빗속으로 따라가, 대신 비를 맞아 주고 싶었다. 떨리는 왼쪽 어깨를 밤새 어루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후유증이 사라질 수 있을까? 통증이 없어질 수 있을까?

    ‘아니, 기적이 일어날 리 없지....’

    주인이 체념으로 가득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없다면, 그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와 거리를 둬야 했다.

    주인은 이미 충분히 경험해 보았다. 자신의 욕심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독경을 끌어들여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를.

    그리하여, 이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어리석게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태성그룹과 상현에게 어떤 마음으로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복수는 그녀만의 것이어야 했다.

    독경이 이 일에 관여할수록 위험해질 것은 불 보듯 뻔했기에. 그는 주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저 자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주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버리고, 복수 따위는 잊은 채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독경은 이미 너무 많은 고난을 겪지 않았는가.

    ‘그러니 부디,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길 바라야지. 이젠 더 이상 엮이지 않을 거야.’

    멀리서 다가오는 낯익은 차를 보며,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주인이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독경은 앞머리를 내린 채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음, 직접 차릴 줄은 몰랐는데....”

    없던 입맛이 돌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부엌에 들어서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동안 해 주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못 했어요. 고급 레스토랑처럼 근사한 건 아니니 너무 기대하진 말고요.”

    그가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손은....”

    주인이 그의 오른손에 두른 붕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독경이 제 손을 등 뒤로 슥 감추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별거 아니에요. 일단 앉을까요?”

    “아니야, 도와줄게.”

    성치 않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녀가 팔을 걷어붙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잠시 뒤,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칼국수 한 그릇과 정갈한 반찬 몇 가지가 차려졌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자신의 왼편에 바짝 붙어 앉은 그를 큰 눈망울로 바라보며 주인이 물었다.

    “일단, 먹어 봐요.”

    독경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빙글빙글 웃으며 식사를 권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 맛을 보았다.

    “아!”

    그녀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시원하고 담백한, 기억 속 그 맛 그대로였다.

    “이, 이걸 어떻게...? 레시피는 어떻게 구했어...?”

    주인이 당혹과 경탄 사이에서 말까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독경이 두 눈을 가늘게 휘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몇십 년 손맛을 어떻게 흉내 내요. 사장 할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거예요.”

    “할머니께서? 직접?”

    그녀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네, 인근 상인분들께 수소문해서 고향까지 찾아갔어요.”

    “그, 그거 민폐 아닌가...?”

    주인이 어이없다는 양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반응이 즐거웠는지 독경이 더욱 개구지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해 줄까요? 할머니께서 절 기억하시더라고요.”

    “뭐? 정말?”

    “그리고 선배도요.”

    “나, 나도?”

    “우리가 거길 좀 많이 갔어야죠. 아무튼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그 집 손자가 된 줄 알았다니까요.”

    독경의 얼굴에서 뿌듯한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주인은 조금 얼떨떨했지만, 마찬가지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아련한 충만함이 느껴졌다. 새삼 그와 함께한 추억이 얼마나 컸는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다음엔?”

    “음, 여기서부턴 편법을 좀 썼죠.”

    그 말에 주인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음식 한 그릇에 얼마를 썼을까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 생각을 꿰뚫어 본 독경이 짐짓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아무리 졸부라지만, 세상에 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 정돈 알아요. 그래서 약간 각색을 했죠. 선배랑 나랑 결혼했다고.”

    “뭐어??”

    어딘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그녀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잘도 재잘거렸다.

    “선배가 임신을 했는데 이 칼국수를 너무 먹고 싶어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공짜로 해 주셨어요. 김치도 싸 주시고, 전도 부쳐 주시고.... 아, 맞다. 식혜도요. 하하, 굉장하죠?”

    독경이 간교한 눈빛을 빛내며, 입을 크게 벌려 환히 웃었다.

    “아.... 너, 너....”

    졸지에 유부녀에 임신까지 하게 된 주인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주먹만 꽉 쥐었다.

    “물론, 백 기사님 통해서 선물 세트 좋은 걸로 보내 드렸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 그가 천천히 본론으로 향했다.

    “주인 선배....”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한 음성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나한테 딱 한번만 기회를 줘요. 선배의 시간을 나한테 맡겨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미처 피하기도 전에 독경이 그녀의 왼쪽 팔목을 덥석 잡았다. 주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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