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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31화 (31/76)
  • #31화. 수작 (2)

    독경은 일찌감치 운전기사를 돌려보내고는, 직접 차를 몰았다. 한 손으로 느긋하게 운전대를 돌리는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주인이 물었다.

    “운전하는 거, 무섭지 않아?”

    그가 그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곁눈질하며 답했다.

    “아니요, 딱히....”

    “난, 한동안은 택시 타는 것도 피했는데....”

    주인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손가락으로 꼼지락거리며 매만졌다. 그런 그녀의 손을 독경이 꽉 붙잡았다.

    “선배....”

    중저음의 음성이 어둑한 차 안에 느릿하게 퍼져 나갔다.

    “그 사고는 전부 내 잘못이에요.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어도,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어도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요. 다, 내 탓이에요.”

    그 말에 주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얘기할 필요 없어. 그건 내 잘못이 맞으니까. 어리석은 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널 끌어들였어. 그리고 어이없게도, 나만 멀쩡히 살아남았지. 넌 거의 죽을 뻔했는데 말이야....”

    비탄에 잠긴 목소리가 꽉 다문 잇새로 터져 나왔다. 독경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선배는 날 끌어들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왜냐하면 내가 선택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선배가 날 택했듯, 나도 선배를 택한 거예요. 안정된 감옥보다 불확실한 낙원을 바란 건 나니까....”

    주인이 산처럼 거대하고 바위처럼 단단한 옆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꿈에서나 한번 볼 수 있을까 애원하며, 오매불망 그리던 이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쉽사리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맞잡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체온을 온전하게 느끼며 눈꺼풀을 크게 감았다 떴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눈 좀 붙여요. 도착하면 깨워 줄게요.”

    독경이 그런 주인을 힐끔 보더니, 자장가를 부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그 음성을 어렴풋이 들었다.

    주인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잠이 든 그가 있었다. 그녀처럼 독경도 온종일 잠을 자지 못하고 꼬박 일을 한 참이었다.

    그녀가 잠든 그의 얼굴을 아련하게 응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심술 난 악동처럼 기세등등하게 날뛰던 남자는 어느새 온순한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주인이 아주 오랜만에 그 조각 같은 얼굴을 찬찬히 감상했다. 약간 야위었는지 콧날이며 턱 선이 예전보다 더 날렵하게 두드러져 있었다.

    “내가 좀 잘생겼죠? 특히, 왼쪽이.”

    독경이 한쪽 눈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잔망스럽게 굴었다.

    “그래, 맞아.”

    주인이 픽 웃으며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때가 좋아요? 지금이 좋아요?”

    독경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둘 다 좋아. 그리고 넌 눈이 하나만 달렸대도, 멋있을 거야.”

    유치한 물음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그녀였다. 그 답변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주인이 차에서 내리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독경이 은근슬쩍 그녀를 따라나섰다.

    “넌, 왜 내려?”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느른하게 차에 기대고 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독경이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나 한 잔 줘요.”

    “뭐? 너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하하. 뭐, 겸사겸사라고나 할까요?”

    독경이 능청스럽게 웃자, 주인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가 먼 산을 보며 일부러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 이대로 가면 졸음운전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재빨리 뒤를 쫓았다.

    ***

    “좀, 작은 거 아닌가?”

    그녀가 사는 원룸으로 들어서며 독경이 어딘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네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그렇지.”

    주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생각해 보면 무척 기묘한 일이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던 자신은 쫓겨나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비좁은 방에 몸을 구겨 넣던 독경은 어느새 빌딩의 가장 높은 층에 올라 도시를 발아래 두었다.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인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독경이 집주인을 닮아 소박하고 정갈한 실내를 기웃거리는 사이, 주인이 새삼 밀려드는 감회를 털어 내고는 옷걸이를 들고 다가섰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옷깃을 손끝으로 다정하게 쓸며 말했다.

    “외투 벗어서 줘.”

    “음....”

    코앞까지 가까워진 주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독경의 목울대가 슬며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순순히 옷을 벗어 건네자, 그녀가 물었다.

    “커피? 녹차? 주스도 있긴 한데....”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럼, 잠 깨야 하니까 그냥 커피 탈게.”

    주인이 개수대 앞에 서서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였다. 독경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여기선 얼마나 살았어요?”

    “글쎄, 한 이 년쯤?”

    그녀가 찻잔에 끓는 물을 부으며 머릿속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불편하진 않았어요?”

    그가 슬쩍 일어나 주변을 다시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 흔한 제 사진 하나 없는 썰렁한 공간이었다.

    “아니, 전혀. 난 오히려 좋았어. 네 자취방도 떠올랐....”

    마지막이 실언임을 깨달은 주인이 커피를 젓던 손을 우뚝 멈췄다. 등 뒤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선배....”

    어느새 다가온 독경이 그녀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으며, 몸통을 조일 듯 꽉 끌어안았다.

    “마지막 말은 잊어 줘....”

    주인이 어딘가 버석한 쓸쓸함이 잔뜩 묻어나는 어조로 속삭였다.

    “이미 들었는데 어떻게 잊어요.”

    그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뺨을 마구 비볐다.

    그러고는 잠시 뒤, 고개를 들어 섬세한 목선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주인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하릴없이 신음이 흘렀다.

    “으음, 이독경....”

    어느새 턱까지 다다른 독경이 도톰한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며 장난을 치다,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곧장, 아주 진한 키스를 했다. 주인은 옹골진 혀끝이 안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오자, 움찔거리며 품을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그가 꽉 껴안고 있는 탓에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하반신을 더욱 밀착시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은 더욱 뒤엉켰다.

    입을 맞추는 동안에도, 독경은 거침없는 손길로 주인의 가슴과 등허리를 마음껏 희롱했다.

    그러다 이내 손끝이 허리까지 내려오자, 그는 그녀의 골반을 쥐고는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뱀처럼 미끈하게 제 손을 집어넣었다.

    “이독경, 그만!”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정말로 내가 그만하길 원해요? 아니잖아요, 선배도 하고 싶잖아요.”

    독경이 원숙하게 관능적인 눈으로 상대의 은밀한 속내를 꿰뚫었다. 그 끈질긴 시선에서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음을 그녀는 막연하게 예감했다.

    “그래 맞아, 네 말이 다 맞아....”

    주인이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그를 잡고 있던 손을 탁 풀었다. 독경이 흥분감으로 가득한 숨을 헐떡이며 입맛을 다시더니, 먹잇감을 재빨리 낚아챘다.

    독경과 주인은 어느새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독경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거칠게 풀어 헤치고는 들썩이는 가슴골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아아....”

    주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붉은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가 그 틈으로 크고 굵직한 제 엄지손가락을 넣었다. 그녀가 투박한 손끝을 자신의 혀로 부드럽게 감쌌다.

    “선배....”

    독경이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손을 정신없이 핥고 깨무는 주인을 보았다. 그 뇌쇄적인 모습을 보자,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아래로 쏠려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하!”

    독경이 헛웃음을 지으며 셔츠를 단숨에 벗었다. 그러자 햇볕에 잘 그은 구릿빛 피부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주인이 그린 것처럼 선명한 복근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독경....”

    나직이 이름이 불린 그가 다시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서늘하지만 보드라운 주인의 피부와 뜨겁고 단단한 독경의 피부가 격렬하게 마찰을 일으키며, 서로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촉을 일깨워 주었다.

    어느새 그가 치마를 걷어 올리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묵직해진 하반신을 천천히 쳐올렸다.

    “하아....”

    주인이 낮게 신음했다. 그러고는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안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앉은 자세로 서로를 안은 채 입술을 포갰다.

    잠시 뒤, 주인이 그와 하반신을 딱 맞댄 채 유연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독경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아, 선배....”

    독경이 그녀의 잘록한 옆구리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주인이 그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맹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주인이 천천히 입술을 떼며, 맞붙었던 몸을 일으켰다.

    독경은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녹여 버릴 것처럼 농염하게 움직이던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감았던 눈을 슬쩍 뜨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코앞의 주인은 숨을 죽인 채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독경은 그 눈길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곳은 아직 수술 자국이 길게 남은 자신의 왼 어깨였다.

    주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찰나를, 독경은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창밖으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배, 나 봐요.”

    독경이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주인이 그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이미 두 눈은 활력을 잃은 채 텅 비어 있었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요. 지금은 그냥 나한테만 집중해, 응? 제발....”

    그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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