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수작 (1)
“도경 씨, 어젠 잘 들어갔어요?”
늦은 오후, 외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지승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일이 마음에 걸렸던 주인이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며 다시 사과했다.
“어젠 죄송했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일은 잘 해결됐어요?”
상냥한 그의 질문에 그녀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그럭저럭요. 사과의 뜻으로 커피라도 사고 싶은데, 잠시 시간 내 주실래요?”
“그럼요. 당연히 내야죠.”
지승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너그럽게 웃었다.
주인과 지승은 회사 근처에 있는 야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
“그러게요.”
지승의 말에 주인이 순순히 동의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도경 씨, 내가 다음에도 같이 밥 먹자고 하면 먹어 줄래요?”
지승은 아직 못다 한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주인이 잠시 주저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 시선도 있고....”
늘 신중히 처신하는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그가 빠르게 수긍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언제라도 먹고 싶으면 편히 얘기해요.”
상대의 담백한 태도가 그녀의 마음에 여운을 남겼다. 자신에게 과분하다 여겨질 만큼,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때, 탁자 위에 둔 휴대 전화가 울렸다.
“아, 잠깐만요.”
지승이 주인에게 손짓을 보내며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하더니, 자리에서 슬쩍 일어섰다.
“오늘은 내가 먼저 가야겠네요. 사무실에 갑자기 예약하지 않은 의뢰인이 찾아왔다는군요.”
“약속도 없이요? 저도 같이 가요.”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주인이 막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정면에 낯익은 사람의 형태가 아른거렸다. 그녀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얼굴을 들어 앞을 보았다.
그러자 거만한 미소를 한껏 장착한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근사한 정장을 빼입은 채, 지승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최지승 대표님 맞으시죠? 전, 일만그룹 김주환 실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걸 양해해 주십시오.”
바로 코앞에 독경이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주인은 회의실 탁자 맞은편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독경을 노려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뻔뻔하게 외면하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사무실이 참, 밝고 따뜻하네요.”
독경이 솔직하게 감상을 표현했다. 지승이 부드럽게 맞장구를 쳤다.
“사무실을 열면서 인테리어에 신경을 좀 썼습니다. 딱딱하고 기능적인 것보단 아늑한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흠, 그렇습니까? 다음엔 인테리어 업체도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독경이 제법 깍듯하게 상대를 대했다. 지승이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신사업을 구상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떤 분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하,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독경이 세상 모든 고뇌를 짊어진 것 같은 얼굴로 장탄식을 했다.
주인의 눈에는 정말이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연기로 보였다. 대체 무슨 개수작이냐며 싸늘하게 독설을 퍼붓고 싶은 욕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침까지도 그를 향해 쏟아지던 애틋한 눈물이 쏙 들어갔다. 몽글몽글 피어나던 연민과 애정 또한 순식간에 시들었다.
이독경이라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예상보다 한층 더 미친놈이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기억해 내고야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승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는 달리 선이 굵직한 얼굴에 집중했다. 정중하지만 어딘가 얕보는 것 같은 태도가 썩 유쾌하지 않은 상대였다.
“저희 회사가 운이 좋게도 지난 분기 실적이 좋은 편이라, 여유 자금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해 보고 싶은데, 어떤 분야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더군요. 보통 재무나 정책을 컨설팅해 주는 곳은 많지만, 시장 조사나 분석까지 가능한 업체는 드물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음, 그런 거라면 내부 인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제가 원하는 건 완전히 다른 분야에 대한 새로운 접근입니다. 그래서 컨설팅 업체에 외주를 맡기면 어떨까 하는 거고요.”
“어쨌든 신사업 관련 솔루션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그럼 여기 현도경 씨와 함께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눠 볼까요?”
“네, 그러죠. 잘 부탁드립니다, 현도경 씨.”
독경의 눈이 짓궂은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채 가늘어졌다.
주인이 그가 내민 손을 마지못해 붙잡으며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그 정도 악력으로 두툼한 손이 꿈쩍할 리는 없었다.
독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식사라도 하면서 대화를 나누죠? 제가 잘 아는 곳이 있습니다.”
지승이 엉겁결에 따라 일어섰다. 주인 또한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뒤따랐다.
***
독경이 두 사람을 데려간 곳은 중심가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휘황찬란한 실내를 둘러보며 지승이 입을 떡 벌렸다.
“여기, 최근에 가장 핫한 곳 아닙니까?”
“네, 잘 아시네요?”
독경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친구가 요식업 쪽에 있어서 저도 덩달아 귀동냥 좀 했습니다. 근데 이런 곳에 저희가 함께 와도 되는지...?”
“안 될 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일종의 투잔데. 요식업도 사업 분야로 고려 중이니, 시장 조사 나왔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독경이 물 잔을 입가로 우아하게 가져다 대며, 주인을 힐긋 훔쳐보았다. 그녀는 목석처럼 굳은 채 남자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음, 그렇군요....”
지승이 작게 중얼거렸다.
잠시 뒤, 주문한 요리가 나오자 세 사람은 천천히 음식을 맛보았다.
식사 내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주로 독경과 지승, 두 사람이었다. 주인은 가끔 가볍게 맞장구치는 정도로만 참여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지승이 급한 통화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음식의 반도 못 비운 주인의 접시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독경이 물었다.
“왜? 맛이 없어요? 선배랑 오고 싶어서 힘들게 예약했는데, 다른 데로 갈 걸 그랬나요?”
“대체 무슨 꿍꿍이야?”
주인이 들고 있던 포크를 쨍그랑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독경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같이 저녁 먹자고 했잖아요.”
“이런 식은 아니었잖아!”
그녀의 얼굴이 거칠게 구겨졌다.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런 식이 아니면, 나랑 안 만날 거잖아요.”
“장난은 그만해. 네가 지금 이러는 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주인이 흥분한 듯 목소리를 앙칼지게 높였다. 그러자 독경이 조금은 성난 얼굴을 그녀 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장난 아니에요. 일만에서 진짜로 신사업을 구상 중이라 필요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선배는 내가 상처받는 건 상관없고, 저 자식이 손해 보는 것만 관심 있는 거예요?”
“그건....”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교활하게 파고들었다.
“우리, 서로 생사도 모른 채 살다가 육 년 만에 만났어요. 난 우리가 다시 만나서 너무 기쁜데, 선배는 안 그런가 봐요? 혹시 내가 선배의 새 삶에 방해가 됐나요? 이대로 육 년 전처럼 선배 인생에서 꺼질까요?”
주인은 그가 자신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독한 말만 골라 떠든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눈앞의 사냥개가 까만 눈을 처연하게 들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을,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녀가 괴로운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독경이 옅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럼, 빨리 식사해요. 잘 먹어야죠. 왜 이렇게 말랐어요?”
독경이 야무진 손끝으로 탁자 위에 올린 그녀의 마른 손등을 은근하게 쓸었다. 주인이 흠칫, 몸을 떨며 곧바로 손을 빼려 움직였다.
그러자 그가 길고 하얀 손을 제 손으로 꽉 눌렀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를 억지로 벌려 깍지를 꼭 끼었다. 손바닥의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서늘한 손등에 닿았다.
“여전히 손이 차네요.”
독경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아련한 눈으로 꼿꼿한 옆얼굴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선배는 늘 온몸이 너무 찼어요. 그래서 매일 밤 생각했죠. 내가 가서 안아 줘야 하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하고.”
그 말에 주인이 왈칵 터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는 제 손을 그의 손에서 뺐다. 마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지승이 자리에 앉으며 머쓱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통화가 길어져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음식이 다 식어서 어쩌죠? 다시 주문할까요?”
독경이 친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승이 황망하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거의 다 먹었는걸요.”
그사이 주인이 고개를 슬쩍 돌리며 남몰래 눈가를 쓸었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식당 입구에 서서 인사를 나눴다. 문득, 독경이 주인을 돌아보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
“도경 씨는 댁이 어디십니까?”
“전 화주동입니다.”
“그럼, 저랑 같은 방향이시네요. 제가 바래다드려도 될까요?”
상대의 제안에 그녀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사는 펜트하우스가 자신의 집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빤히 보며 답을 기다리는 독경을 보며, 주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실례라뇨? 영광이죠.”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지승은 조금 놀랐다. 아니, 실은 많이 놀라웠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아는 주인은 상대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할 터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건만, 그녀는 너무 손쉽게 ‘승낙’이라는 것을 해 버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탄 차가 출발하는 광경을 멍하니 보며, 그는 어쩐지 저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날뛰는 남자의 등장이 꺼림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