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29화 (29/76)
  • #29화. 재회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단 하나, 주인만 옆에 없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면 아스라이 들려오던 목소리도 이제는 점차 흐려졌다. 이렇게 잊어 가는가 싶어 두려웠다. 살아야 할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

    그렇게 독경이 점차 무기력해 가던 어느 날, 구색만 대강 갖춘 투자사의 연락처로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보낸 사람은 자신이 태성그룹과 관련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며 만남을 청했다.

    독경은 코웃음을 쳤다. 이 바닥에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다며 접근하는 자가 어디 한둘인가 싶었던 탓이다.

    그는 별생각 없이 메일을 삭제하려다, 하단에 첨부된 명함을 무심코 보았다. ‘JS컨설팅 현도경’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망막에 닿았다.

    “현도경, 현도경.... 현도경이라....”

    독경은 몇 번이나 그 이름을 입안에 넣어 굴리며 곱씹었다. 그 순간, 굵은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그가 메일에 적힌 회사 주소를 다급하게 살폈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제 눈으로 직접!

    중소 규모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빽빽이 입주한 건물 안으로, 독경은 들어섰다. 점심시간인지라 로비에는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는 널따란 공간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예리한 눈으로 오가는 이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기대한 얼굴은 그곳에 없었다. 짜증스러웠다.

    독경이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굵은 손가락으로 제 무릎을 초조하게 톡톡 치는 사이, 등 뒤로 익숙한 향기가 스쳤다.

    찰나였지만 그는 분명, 그 향기를 맡았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라벤더 향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매일 밤 나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근데, 대표님. 차는 왜 고장 났어요?”

    “아, 그게 제가 어제....”

    대화는 다른 소음에 의해 금세 묻혔지만, 독경은 똑똑히 들었다. 낮고 차분하지만 청아하게 공기를 뒤흔드는 고운 음성을.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꿈결처럼 아련한 향기와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저만치 멀어졌지만 알 수 있었다.

    저 흑단 같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사뿐사뿐 걷는 이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람이라는 사실을.

    탁하고 진득한 새까만 눈 위로 물기가 어렸으나, 독경은 웃었다. 고른 치열이 다 드러날 만큼 환하게.

    ***

    하지만 반가운 마음과는 별개로 심술이 삐죽삐죽 솟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독경은 이신이 가져다준 신상 정보를 대강 훑으며, 짙은 눈썹을 불손하게 꿈틀거렸다. 주인이 자신을 잊고 새 삶을 사는 것처럼 보여, 영 거북했다.

    게다가 원래라면 제가 있어야 할 그녀 곁을, 다른 남자가 꿰차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최지승이라....”

    그날, 주인과 함께 있던 남자는 JS컨설팅의 대표였다.

    직원과 사장이 같이 있는 상황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모습은 자칫 오해를 부를 만했다.

    독경은 지승이 그윽한 눈으로 주인을 응시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질릴 정도로 수많이 목도한 눈빛과 표정이었으므로.

    그녀에게 호감과 관심을 품은 남자들이 제 마음을 감추지 못해 드러나는 신호 같은 것이었기에.

    “하!”

    그가 다정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책상 위에 내던지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거슬렸지만 귀찮은 하루살이는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우선은,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혹시 놀라, 달아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이 비서님, 현도경 씨와 이른 시일 내로 약속 잡아 주십시오. 아니요, 저 대신 비서님이 먼저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독경이 전화로 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뒤 그는 현주인 아니, 현도경과 이신이 만나는 자리 근처에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앉아 대화를 엿들었다.

    웬만한 부장급들도 설설 기는 깐깐한 이신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주인을 보며 독경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전히 그녀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위엄 있고, 숨 막히게 압도될 만큼 아름다웠다.

    다만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수 어린 분위기가 한층 깊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더욱 깨질 듯 위태로워 보이게 했다.

    그는 그 아슬아슬함이 자신의 부재로 인해 생긴 상흔이라는 것을 곧바로 눈치챘다.

    기뻤다. 주인이 자신을 잊지 않은 채, 죄책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 그녀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여겨졌기에.

    독경은 가슴 깊이 흡족함을 느끼며 그녀 앞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등장해야 좋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일은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주인에게 붙여 놓은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승과 단둘이 저녁을 먹기 위해 이동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어쩐지 불길했다.

    그는 두 사람을 부랴부랴 쫓았다. 그러고는 막 손님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웃돈까지 얹으며 차지했다. 주인이 앉은 곳에서 제법 가까운 위치였다.

    독경은 등을 돌리고 앉아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남녀의 대화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지승이 굳건한 각오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운을 뗐다.

    “도경 씨,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독경의 반듯한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기어이, 예상했던 최악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그가 급박한 손길로 이신에게 문자를 보냈다.

    대기 중이었던 그녀가 상사의 지시대로, 곧장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뒤, 빠른 속도로 식당을 빠져나가는 여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독경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지승을 흘깃 내려다보며 한껏 냉소를 짓고는, 유유히 밖으로 나섰다.

    ***

    “하지만 이렇게 빨리 정체를 드러낼 계획은 아니었어요.”

    독경이 다정하게 웃으며, 주인의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왜?”

    “선배가 도망갈까 봐....”

    그가 서늘한 음성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그녀의 가슴이 뜨끔해졌다.

    “눈치 빠른 누구 덕분에 다 들켰지만요.”

    그녀가 숨어 있던 자신을 발견한 상황이 무안했는지, 독경은 저답지 않게 객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 풋풋한 표정이 지난날을 떠올리게 해, 주인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저렸다.

    “계약서는 대체 왜 쓰자는 거야? 그것도 그 때문이야?”

    “뭐, 비슷해요. 말하자면 현주인, 아니 현도경의 시간을 내가 사는 거죠. 그 회사에 계속 있는 것도 싫고....”

    독경이 뒷말을 작게 얼버무렸다. 주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그 회사에 있는 게 싫어?”

    “몰라서 물어요? 최지승인지 뭔지 하는 놈이랑 종일 붙어 있을 텐데, 당연히 싫죠.”

    그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놈 아니고, 대표님이거든? 그리고 그분이랑 난, 아무 사이도 아니고.”

    그녀가 눈을 흘기며, 상대를 타박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가?”

    독경이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보았다. 주인이 그의 넓은 가슴팍을 한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됐고, 아무튼 난 출근해야 해.”

    밤새 지난 이야기를 듣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던 그녀가, 어느새 밝아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루쯤은 쉬어도 되잖아요? 연차 써요. 아니다. 이참에 거긴 때려치우고, 내 회사로 와요. 실컷 쉬게 해 줄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랑은 계약 안 해.”

    주인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독경이 여유롭게 웃으며 따라 섰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죠. 뭐라도 먹고 갈래요?”

    그가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냉장고 문을 벌컥 열었다.

    “괜찮아. 늦어서 그냥 갈게.”

    그녀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답했다. 독경이 막 꺼낸 오렌지 주스와 달걀 몇 개, 샐러드 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대신 이따 나랑 저녁 먹어요. 육 년 만에 만났는데, 그쯤은 해 줄 수 있잖아요? 그리고 만난 김에 선배 얘기도 듣고 싶고....”

    그 말에 가방과 외투를 주섬주섬 챙기던 주인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계를 찬 왼쪽 손목을 슬며시 뒤로 숨겼다.

    “생각해 볼게....”

    그렇게 애매한 답만 남기고, 주인은 펜트하우스를 훌쩍 떠났다. 독경이 쓸쓸한 적막 속에 홀로 남겨졌다.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그녀의 두 눈을 따갑게 찔렀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운 탓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어지러웠다.

    그때,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 깍듯하게 말을 걸었다.

    “김주환 실장님께서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낯선 이름에 잠시 멍하던 주인은, 이내 그 이름이 독경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고급 세단에 올라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녀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을 다시 만나 기쁘고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밤새 흘린 수많은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죄책감과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삶이었다. 그래서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번 잃었던 것을 또다시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하자, 숨이 턱 막혀 왔다.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했다.

    ‘이독경은 내 옆에 있으면, 또 다칠 거야....’

    이미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한 그였다. 그런 사람을 다시 또, 벼랑 끝으로 내몰아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눈앞에서 되풀이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느덧,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주인은 밤새 번진 화장을 깨끗이 씻어 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몰아치는 거센 폭풍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몹시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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