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28화 (28/76)
  • #28화. 변곡 (2)

    “너, 사내에 차 회장이 숨겨 둔 자식이라고 소문났더라?”

    강석이 기분 나쁜 웃음을 실실 흘리며, 독경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잔에 술을 따르던 독경이 인사도 없이 눈만 슬쩍 들며 대꾸했다.

    “남의 회사에 왜 쓸데없이 관심을 두십니까? 안 바쁘세요?”

    “그럴 리가....”

    강석이 자신의 미간을 손으로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피곤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독경이 말없이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더니, 그 앞에 툭 내려놓았다.

    강석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똑같이 잔을 가득 채워 건넸다. 독경도 단박에 술을 비우고는 손등으로 제 입을 슥 닦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그들은 가끔 허름한 고깃집에서 만나 잔을 기울였다.

    딱히 약속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경이 있는 곳을 강석이 귀신같이 찾아내 들이닥친 것이었다.

    처음에는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귀찮게만 여기던 독경이었으나,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말수 적은 강석이 그다지 거슬리는 술 상대는 아니었던 탓이다.

    강석도 묵묵하게 술만 비우는 독경이 제법 편했다. 자신과 주량이 비슷한 인간을 만난 적이 처음이기도 했고.

    그가 건너편에서 무심한 동작으로 고기를 굽고 있는 독경을 멀거니 보았다.

    막 퇴원했을 때만 하더라도 젖내가 폴폴 풍기는 앳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눈매도 턱 선도 더 날렵해져 있었다. 어쩌면 달라진 차림새가 성숙한 느낌을 더하는지도 몰랐다.

    낡고 지저분한 술집에 오만하게 앉아 있는데도, 그는 흐트러지지 않고 단정한 정장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저 목덜미에 풀어 놓은 단추와 넥타이, 그리고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가 유일하게 긴장을 풀었다는 인상을 남길 뿐이었다.

    “밥은 잘 챙겨 먹냐?”

    전보다 약간 더 마른 것 같은 뺨을 보며 강석이 물었다.

    “네, 뭐....”

    독경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너 따위가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하냐는 투였다. 정말이지 한결같이 뻣뻣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강석이 그런 상대를 보며 픽 웃고는 제 입맛에 맞게 잘 구워진 고기를 상추에 싸서 입안에 욱여넣었다.

    술자리가 파한 후, 독경은 대리 운전사를 불러 주인의 집 앞으로 갔다. 몇 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짜, 죽은 건가...?”

    그가 육중하고도 견고한 철문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독경은 회사 일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주인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람 찾는 일에 능력 있다고 소문난 이들도 몇 고용했다.

    그러나 그녀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주인과 함께했던 스무 살 무렵의 모든 순간이 덧없는 꿈인 것 같았다.

    어느새 차창으로 빗방울이 하나씩 툭, 툭 떨어졌다.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저리는 왼팔을 붙잡고 그는 운전석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독경....”

    텅 빈 어둠 저편에서 주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스라이 들렸다.

    “네, 선배....”

    독경이 애달프게 답했으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

    주인을 찾는 일에 지지부진한 것과는 반대로, 독경은 사회적으로는 승승장구 중이었다. 그가 손보는 일마다 가시적인 성과가 뚜렷이 나타났던 것이다.

    최연소 구조 조정 실장에 오른 그는 일만산업에서 불필요한 사업 부문을 싹 정리해 버렸다. 핵심 분야 외에,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고 성장 가능성이 큰 사업만 깔끔하게 남겼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사내 반발이 예상보다 적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원들의 고용 승계를 최대한 보장해 준다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웃대가리만 자르면 되거든.’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경은 사내에서 능력과 평판이 떨어지는 이들을 골라 가차 없이 해고했다. 학연, 지연, 혈연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그에게 이보다 더 쉬운 선택은 없었다.

    그래서 사원들은 도리어 그의 행보를 속 시원해하기도 했다.

    창업주의 친인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리를 차지하던 인간들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곤란해진 쪽은 오히려 차 회장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사람들이 찾아와 읍소를 해 댔던 까닭이다.

    하지만 내심 골칫거리였던 문제들을 독경이 대신 해결해 주자, 신뢰는 커졌다. 차 회장에게 있어 그는 탁월한 칼잡이였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독경은 이신에게서 뜻밖의 사고를 전해 들었다. 강석이 음주 운전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상대의 주량과 술버릇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문스러웠다. 그리고 막막해졌다.

    강석이야말로 주인과 자신을 이어 주는 거의 유일한 끈이나 다름없었기에. 어쩐지 그녀에게서 한 발 더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독경은 바쁜 시간을 쪼개 강석의 차가 발견된 저수지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담배를 태우는 사이, 이신이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태성 측 사람을 통해 김 실장님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직원을 찾았습니다. 직원 말로는 김 실장이 현상현 부회장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더군요. 경찰도 이를 파악하곤 사실관계를 조사했는데, 워낙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답니다. 아무래도 사고사 쪽으로 조만간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흠, 현상현이라....”

    독경이 짙은 안개처럼 가라앉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언제 들어도 불쾌한 이름이었다.

    “이 비서님, 김강석의 뒷조사를 더 부탁드립니다. 바쁘시겠지만 직접 해 주십시오.”

    그는 이 찜찜한 최후를 파헤치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숨긴 주인에 대한 단서도 찾아야 했다.

    독경이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저수지 방향으로 놓았다. 강석의 죽음이 딱히 슬프거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그는 태성의 개였고, 주인과 자신을 갈라놓은 장본인이었다. 바닥에서 태어나 음지에서 살았던 삶에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 죽음이 부당한 것 같다는 혐의를 놓을 수 없었다.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독경은 그 길로 차 회장의 별장을 찾았다.

    “투자를 좀 하고 싶습니다.”

    다짜고짜 본론부터 던지는 음험한 사내를, 노신사가 힐끔 보았다.

    “얼마나 필요한데?”

    “좀 많이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분명 남는 장사가 될 테니.”

    그가 눈을 번뜩이며 간교하게 웃었다.

    ***

    그 후, 독경은 주인이 예상한 대로 투자사를 급조해 꾸준히 태성의 주식을 매수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밑바닥에서부터 모래성을 허물 듯.

    그리고 한편으로는, 상현에 대한 감시도 놓지 않았다. 어쩐지 그자가 모든 일의 시발점인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즈음 상현은 하루가 멀다고 청담 인근 유흥가에서 목격됐다. 술버릇도 고약해서 동석한 지인은 물론, 수행 기사에게까지 손찌검을 했다.

    독경은 그중 몇 건을 언론에 살짝 흘렸다. 물론, 다음 날 떨어진 주가를 웃으며 주워 담는 것은 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망나니 재벌 놈은 술집에서 일하던 앳된 얼굴의 종업원 하나를 무자비하게 팼다. 자기 옷에 술을 쏟았다는 이유였다.

    독경은 담배를 피워 문 채,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눈두덩이 사이로 종업원의 눈에 살기가 어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채.

    “왜, 안 때렸냐?”

    너저분한 번화가 뒷골목에 피떡이 된 채 주저앉아 있는 종업원 앞으로 독경이 다가갔다.

    상대가 푹 꺾었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아직 소년처럼 천진하고 해사한 얼굴이 상처와 멍으로 엉망이었다.

    “죽었을 테니까....”

    “뭐?”

    “내가 덤볐으면, 그 새낀 죽었을 거라고.”

    짓씹듯 내뱉는 그 말에 독경은 청년의 작은 체구를 내려다보았다. 크지는 않지만 분명 다부진 형태의 몸이었다.

    그가 긴 다리를 불량하게 접어 앉으며, 상대와 눈을 맞췄다.

    “분하냐?”

    어딘가 불온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복수하고 싶냐?”

    도발하듯 던지는 음성에도 종업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독경이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불쑥 일어섰다.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마음 바뀌면 연락해라.”

    그가 값비싼 정장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남자의 발치에 툭 던졌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골목길을 휘적휘적 빠져나갔다.

    며칠 뒤, 모자를 푹 눌러쓴 청년이 회사로 찾아왔다. 아직 퍼런 멍이 빠지지도 않은 얼굴을 바라보며 독경이 옅게 미소 지었다.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가게에서 잘렸어요.”

    “그래서?”

    독경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남자가 손으로 모자를 꾹 눌러 얼굴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맞은 사람은 난데, 내가 피해자인데.... 어째서 피해를 본 사람이 그만둬야 하는 거죠? 집에 부칠 돈은커녕, 당장 낼 월세도 없는데.... 왜 저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울먹거리듯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독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어떤 세상에선 약한 게 죄니까. 네가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넌 죄인이 될 수도 있는 거야.”

    그 냉정한 말에 청년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그란 눈가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불공평한 세상이네요.”

    “그럼, 공평할 거라 생각했냐?”

    독경이 조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내 도움이 필요하단 뜻이겠지?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 주마. 대신 너도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널 이렇게 만든 놈을 엿 먹이는 일이니, 싫진 않을 거다.”

    남자가 자신을 오시하는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냉혹하고 비정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으나, 가식을 떠는 사기꾼보다는 솔직해 보였다.

    “좋습니다. 전, 유선하라고 합니다. 뭐부터 시작할까요?”

    선선한 통성명에 독경이 픽 웃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유선하를 태성그룹 보안 요원으로 위장 취업시켰다.

    학창 시절 유도 선수를 한 이력이 가산점을 받아 그는 무난히 합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