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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27화 (27/76)
  • #27화. 변곡 (1)

    하지만 독경은 아주 당연하게도, 강석의 충고를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와 헤어지자마자 제일 먼저 주인의 집을 찾았던 것이다.

    땅거미가 짙게 깔린 길모퉁이 전봇대에 느른하게 기대선 독경이, 으리으리한 저택의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크고 단단한 문 너머에 그녀가 있을 것이라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주인은 무심하게도 자정이 넘도록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독경이 담배 연기를 죽 빨아들였다가,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딱 한 번, 그러니까 딱 한 번, 그는 성치 않은 몸을 끌고 남몰래 이곳을 찾았었다. 그러고는 지금과 똑같은 자리에 선 채 그녀가 사는 집을 빤히 응시했다.

    힘겹게 이곳까지 왔으나,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자신의 망가진 몸뚱이는 주인에게 짐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목발을 짚은 발로 쓸쓸하게 돌아서던 그의 머리 위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독경은 그날의 감각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

    이튿날, 그는 강석이 마련해 준 양복을 입고는 봉투 안에 쓰인 주소로 찾아갔다. 경기도 외곽에 있는 한적한 별장이었다.

    독경이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 동안, 넉넉한 체형의 노신사가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그러고는 면접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꽤 버르장머리 없게 생긴 놈일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실내 안에 울렸다. 독경이 자신을 도발하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반듯하게 숙였다.

    “김주환이라고 합니다.”

    “흠....”

    노년의 신사가 가늘게 눈을 뜨며, 그를 꿰뚫어 보았다.

    “김 실장이랑은 무슨 사이지?”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독경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운전은 잘하나?”

    “나쁘지 않습니다.”

    “힘은?”

    “남들만큼은 씁니다.”

    쏟아지는 질문에 그는 순순히 답변했다.

    노인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여전히 거두지 않았다. 예의 바른 태도와는 달리, 건방진 눈매가 기묘한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이 제법 신기했던 탓이다.

    노신사가 다시 입술을 슬쩍 뗐다.

    “학교는?”

    “그만뒀습니다.”

    “다시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고?”

    “네, 현재는 없습니다.”

    그러자 볼일을 다 봤다는 양 구부정했던 등허리가 서서히 펴졌다.

    “내일부터 출근해. 그리고 공부도 다시 하고 싶으면 얘기하고.”

    그 말을 남긴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독경은 바로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시게 된 노신사는 일만산업의 차덕균 회장이었다.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요양 중이지만, 한때는 현금 보유량이 재계 안에서 손꼽히던 알짜 기업을 일군 불도저 같은 성격의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배경 따위는 제 알 바 아니었다. 그저 시간과 차를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이 나쁘지 않을 따름이었다.

    독경은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주인의 집을 찾고는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고 허락된 만큼 차에 앉아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가 재활을 받는 동안, 이미 집에서 쫓겨나 자취를 감춘 지 한참이었다.

    ***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주인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독경은 지루한 시간을 성실하게 버텼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아치고, 눈발이 날려도 단단하고 꼿꼿하게 뿌리 내린 아름드리나무처럼.

    김윤희나 서원우에게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그녀의 소식을 알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선뜻 연락하기가 꺼려졌다. 자신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주인이 알아채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고 직전, 그녀가 던졌던 말을 독경은 늘 곱씹었다.

    “만약에, 만약에 잡히더라도...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널 꼬드겨서... 이런 일을 하게 만든 거야.... 알겠지?”

    제가 아는 주인이라면 분명,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린 채 홀로 감당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 영영 자신을 피하겠지.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지....”

    독경이 담배를 입에 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는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당연했다. 제 삶의 목적은 오로지 주인뿐이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또 한 번 변곡선이 그려졌다.

    그날은 차 회장의 정기 검진이 예정된 날이었다. 독경은 아침 일찍 출근해 별장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날이 얼마나 짓궂은지 아침인데도 잔뜩 낀 먹구름 탓에 저녁만큼이나 어둑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독경이 뒷좌석을 흘깃 보며 입을 열었다.

    “비가 많이 와서, 조금 천천히 이동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안전띠 꼭 매십시오.”

    “그래.”

    차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희뿌연 창밖을 멀거니 내다보았다.

    그는 제 성격처럼 주도면밀하게 운전하는 젊은 놈이 꽤 성에 찼다.

    이같이 침착하고 매끄럽게 차를 모는 기사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늘 작은 흔들림 하나 없이 편안한 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값비싼 도자기에 구정물을 담아 먹는 것 같은 찝찝함이 들었다. 분명 허드렛일만 맡기기에는 아까운 인재인데, 본인이 만족해하는 눈치니 말이다.

    차 회장이 다시 눈길을 돌려 의뭉스럽게 시커먼 뒤통수를 못마땅하게 째려보았다. 그때, 도로 앞쪽에서 타이어의 마찰음이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렸다.

    끼이이이이이이익!!

    그리고 곧이어 쿵, 쿵, 쿵 하며 육중한 물체들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렸다. 독경이 운전대를 크게 꺾으며 외쳤다.

    “회장님, 손잡이 잡으십시오!”

    차 회장이 대답 대신, 힘을 끙 주며 손을 뻗어 머리 위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다. 그러자 차가 급격하게 기울어지며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창밖으로 다른 차에 밀린 앞 차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탄 차는 독경의 순발력으로 아슬아슬하게 앞 차를 비켜서며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빗길에서 벌어진 연속 추돌 사고였다.

    앞 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독경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그래....”

    차 회장이 그렇지 않아도 약한 심장을 간신히 쓸어내리며 대꾸하다, 인상을 팍 썼다. 그의 눈에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는 상대의 왼팔이 들어왔던 것이다.

    “미련한 놈! 제 몸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애쓰는구나. 운전은 당장 때려치우고, 내일부터 사무실로 출근해!”

    고용주의 불같은 호통에 독경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 제 왼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싫습니다.”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차 회장을 찾은 독경은 무쇠만큼이나 두꺼운 낯짝으로 시위를 벌였다. 요는 자신이 계속 수행 기사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속내는 단순했다. 그래야 매일 주인의 집 앞에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노인의 눈에는 그저 철없이 어리광을 피우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 불퉁한 녀석아! 승진을 시켜 줘도 싫다는 거냐?”

    “네, 싫습니다. 전 지금 하는 일이 좋으니, 계속 시켜 주십시오.”

    정좌를 한 채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지껄이는 그를 보며, 차 회장이 답답하다는 양 소리쳤다.

    “글쎄, 회사 일 배우라니까! 기회를 준다고.”

    “사양하겠습니다.”

    한참을 달래도 보고, 화도 내 봤지만 요지부동인 독경을 보며 노신사가 세차게 혀를 찼다.

    “범 눈깔을 가지고도 하는 짓은 괭이 새끼나 다름없으니, 이를 어찌하누.”

    하지만 독경의 귀에는 혀를 차는 소리마저, 그저 성가신 소음으로만 들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라. 들어주마.”

    차 회장의 파격적인 제안에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독경이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무리한 조건을 내걸 심산이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만인, 그런 것 말이다.

    “제 밑으로 사람 하나 붙여 주십시오.”

    발칙하기 짝이 없는 요구에 옆에 서 있던 차 회장의 비서가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되바라진 놈!”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독경의 제안을 순순히 수락했다.

    ***

    그 뒤로 독경은 차 회장이 붙여 준 사람을 자신 대신 주인의 집 앞에 세워 두고, 회사 일을 배워 나갔다.

    솔직히 처음에는 원하지 않던 일이었기에 적당히 하다 말 계획이었으나, 의외로 꽤 적성에 맞았다.

    그 무렵, 일만산업은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차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구심점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비극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 어린 손자가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 일로 차 회장은 눈에 띄게 쇠약해지며, 경영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조정 역할을 하는 존재가 사라진 데다 후계 구도 또한 불투명하니, 회사 경영은 중구난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업부는 전문 경영인이 맡기도 했고, 다른 사업부는 회장의 친인척이 실권을 쥐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사업 부문별 실적도 천차만별이었다.

    차 회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잡음이 끊이지 않던 말단 부서에 독경을 파견했다.

    그는 한두 달 정도 업무를 파악한 뒤,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래, 이렇게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지?”

    문서를 받은 차 회장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네.”

    “그럼, 네놈이 맡아서 해 볼래?”

    “뭐, 그러죠.”

    어딘가 건방지고 무성의한 대답에도 차 회장은 독경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실권을 장악한 독경은 아주 노련한 의사처럼 능숙하게 암 덩어리들을 잘라 낸 뒤, 섬세하게 봉합하며 부서 하나를 정상화했다.

    냉철한 분석력과 과감한 실행력을 두루 갖춘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차 회장은 자신의 혜안이 적중했음을 확인하며, 그를 또 다른 부서에 배치했다.

    그렇게 독경은 순식간에 몇 개의 부서를 차근차근 밟아 오르며, 성공적으로 구조 조정을 시행해 나갔다.

    그리고 공로를 인정받아 분기마다 승진하는 파격적인 기록을 세웠다. 부족한 실무를 보완하기 위해 유능한 비서도 얻었다. 그 사람이 이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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