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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26화 (26/76)

#26화. 동류

주인이 죽었다니, 도대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충돌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어 가는 순간까지도, 손을 뻗어 주인의 호흡을 확인했는데....

그런데 죽었다니, 가당키나 한가. 악의로 가득 찬 헛소리가 분명했다.

눈앞의 상대를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독경은 서슬 퍼렇게 눈을 떴다. 그러나 강석은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입을 열 뿐이었다.

“미련한 놈! 제 코가 석 자인데, 죽은 사람을 왜 찾아.”

그랬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그의 몸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아니, 심각했다.

왼쪽 빗장뼈에서부터 어깨뼈와 팔은 물론, 골반과 대퇴골로 이어지는 다리 모두 사고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으며 거의 망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독경은 난폭한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몸만 멀쩡했다면 그는 재수 없는 말을 내뱉는 저 건방진 남자의 혓바닥을 뿌리째 뽑아내려 덤볐을 것이다.

눈빛만으로도 패악한 생각을 읽었는지, 강석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 말이 진짠지, 가짠지 궁금해? 그럼 일어나서 확인해 보든가.”

그의 비아냥거림에 독경이 입안의 살점을 지그시 씹었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분하고, 억울하고, 한스러웠다. 주인에게 다가가려 해도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의 몸뚱이가 저주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

모두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구슬땀을 흘리는 재활 치료실에서, 독경의 회복세는 가장 눈부셨다.

워낙 강건한 체질인 데다, 젊은 나이가 단단히 한몫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정상적인 보행이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만큼 그의 부상이 치명적이었다는 소리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고 재활에 들어가면서, 독경은 몇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자신이 머무는 병원이 서울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는 것, 본명 대신 두 살 위인 김주환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사과를 깎는 남자가 바로 주인이 말한 ‘태성의 사냥개’ 김 실장이라는 것, 따위였다.

“주인 선배 어디 있어?”

지치지도 않고 거듭되는 질문에 강석이 사과를 으적으적 씹으며 대응했다.

“천국, 아니면 지옥에 있겠지.”

악의로 점철된 답변에 독경의 얼굴이 포악하게 일그러졌다. 강석이 못마땅한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야 인마, 넌 생명의 은인한테 왜 반말이냐?”

“흥, 누가 살려 달라고 했나?”

독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강석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싸가지 없는 놈. 그냥 죽게 내버려 둘걸, 괜히 힘만 뺐네.”

그러고는 남은 사과를 입안에 다 털어 넣고는 우물거리며 떠들었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재활이나 잘 받아라.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돼 있다. 이왕 살았으니 사람 구실은 해야 하지 않겠냐?”

그 말에 독경은 대답 대신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상대의 말은 한 귀로 흘린 채.

***

계절은 무심하게도 잘만 바뀌었다.

재활 훈련을 받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독경은 나무 그늘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열기를 식혔다.

강석이 담배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오더니, 옆에 털썩 앉았다.

“여기 공기 좋지?”

사방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을 슥 훑으며,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독경이 상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답했다.

“네, 뭐....”

그러고는 한마디를 툭 덧붙였다.

“여기 금연입니다.”

“알아.”

강석이 입맛을 쩝 다시며, 양복 주머니에 새것이나 다름없는 담배를 구겨 넣었다. 잠시 뒤, 그가 슬쩍 곁눈질하며 눈치를 살폈다.

“너 또 기구 하나 부쉈다며?”

“아....”

독경이 망연한 표정으로 탄식을 냈다.

아무리 낡고 오래된 병원이라지만 이 시커멓고 커다란 놈은 무식한 건지, 요령이 없는 건지, 의욕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셋 다인지 하루가 멀다고 재활 기구를 하나씩 망가뜨렸다.

“너, 운동했었냐?”

강석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독경이 똑같은 어조로 맞받아쳤다.

“아니요, 공부했는데요.”

하긴, 주인과 같은 학교였으니 머리가 영 나쁜 놈은 아니리라. 게다가 수석 입학이었다고 들었었다.

강석은 틈날 때마다 병원에 들러 그의 상태를 확인하며, 조금 감탄했다.

길고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재활을 어린놈이 묵묵히 견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때때로, 아주 조급해 보일 만큼 말이다.

강석의 눈에는 상대의 그런 상태가 아주 잘 들어왔다. 프로 권투 선수 시절, 큰 부상을 입어 그 또한 지독한 재활을 경험해 보았기에.

그는 막다른 길에 놓인 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알았다. 그리고 어딘가 돌아 버린 놈일수록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룬다는 사실도.

젊은 시절의 강석이 생존에 미쳤었다면, 독경은 현주인이라는 존재에 목을 맸다.

마치, 그녀가 없다면 자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이. 그녀가 삶의 유일한 목표라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질리지도 않는지 또 질문을 던졌다.

“주인 선배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죽었다니까. 내 손으로 묻었으니, 어디에 묻혔는지 정도는 알려 주지.”

“하!”

독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상대의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석이 담배를 주섬주섬 다시 꺼내 물었다. 그러고는 불을 붙인 뒤, 폐 안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네놈이 현주인의 껍데기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나 본데, 그 애도 결국 태성 사람이다. 그 집 핏줄은 어딘가가 망가져 있어. 현주인도 예외는 아니지. 이쯤에서 정리하고 네 인생 살아라. 어차피 너희는 안 될 인연이었어.”

그의 충고에 독경은 침묵했다. 그 정적이 너무 길어 숨이 막혀 올 때쯤, 그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좋아한 겁니다. 저도 어딘가가 망가져 있거든요. 뒤틀린 사람만이 동족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법이죠.”

독경이 잘 다듬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만족감과 자부심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미소였다.

그랬다. 주인이 그저 첫인상처럼 연약하고 바르기만 했다면, 그는 금방 지루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볼수록 그는 자신과 그녀가 닮았음을 알아챘다. 흥미로웠다.

짙은 고독과 기이한 광기와, 삶에 대한 열망이 뒤섞여 복잡하지만 현란한 마음의 무늬를 그렸다. 그리고 그, 황홀함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독경이 목발을 짚고 일어서며 심상하게 읊조렸다.

“너무 자주 오지 마십쇼. 귀찮으니까.”

“뭐, 인마?”

강석이 불만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독경이 입가에 진한 조소를 머금었다.

“태성 비서실장 정도 되는 사람이 뭐 이리 한가합니까? 이상한 데서 농땡이 친다고 제보할까 봐요.”

“은혜도 모르는 새끼.”

강석이 언짢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독경이 약을 올리듯 빙글거리며 웃더니,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

이 년이 조금 안 된 재활을 마치고, 독경은 드디어 퇴원할 수 있었다. 물론, 예전의 상태를 온전히 다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행 불능 판정을 받았던 처음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였다. 정작 본인은 전혀 만족하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너무 오래 걸렸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미약하게 경련이 이는 왼손을 주무르며, 독경은 생각했다.

걷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을 만큼 돌아왔지만, 왼팔과 어깨에서는 가끔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생활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그는 그 감각을 무던하게 넘겼다.

퇴원을 위해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기고 있던 독경에게 강석이 다가왔다.

“다 됐으면 가자.”

“네.”

퇴원 수속을 마친 뒤, 두 남자는 병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근방에서 유명한 한우 전문점이었다. 퇴원 후 첫 끼니니, 나름 좋은 것을 배불리 먹이고 싶어 강석이 택한 곳이었다.

그즈음, 그는 독경을 한마디로 정의 내렸다. ‘잡놈’ 중에 ‘난놈’. 그것이 ‘이독경’이라는 근본 없는 종자에 대한 자신의 결론이었다.

본래 그는 이렇게까지 깊이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혹여나 깨어나면 병원비나 적당히 대 주고 말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비 오듯 땀을 쏟으며 이를 악물고 통증을 감내하는 독경을 보며, 강석은 어쩔 수 없이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이상했다. 그는 길고 어둑한 터널을 지나는 것 같던, 그 시기를 줄곧 모른 척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괴로웠던 탓이다.

그러나 악착같이 버티는 독경을 지켜보며, 강석은 그제야 과거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때 자신을 괴롭힌 것은 몸의 부상이 아니라, 암담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엄습하는 불안과 공포를, 어쩐지 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독경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강석은 그가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

평생 주인집 자식들 뒤치다꺼리하며 살았으니, 자기와 비슷한 놈 하나쯤은 세상에 남겨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다 먹었냐?”

강석이 깔끔하게 비워진 불판을 보며 물었다.

“네.”

독경이 가볍게 목을 축이고는 물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강석이 식탁 위에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내가 예전에 신세를 진 적 있던 어르신께서 수행 기사로 쓸 만한 놈을 찾으신다더라. 그래서 널 추천했다. 서류는 여기 다 준비해 뒀으니, 가서 면접만 보면 된다. 근데 너, 운전할 수 있겠냐?”

“죽다 살았는데, 뭔들 못 하겠습니까?”

독경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대꾸했다.

아무리 보아도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까지도 강석은 마음에 들었다.

그가 그동안 깊숙이 묵혀 두었던 중요한 충고를 마지막으로 꺼냈다.

“앞으로 태성 근처에는 얼씬도 마라. 오래 살고 싶으면 지금처럼 그냥 죽은 듯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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