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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25화 (25/76)
  • #25화. 수습

    그 순간 주인이 재빨리 입술을 떼며, 독경의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이제 말해!”

    그러나 그는 제 몸을 상대에게 더욱 밀착하며 넉살 좋게 웃었다.

    “하하, 선배. 절 대체 뭐로 보는 거예요? 이런 건 스무 살 때나 통하죠. 그때랑 지금의 내가 같을 줄 알았어요?”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과 민망함이 동시에 스쳤다.

    그때, 주인의 잘록한 허리를 독경이 한 팔로 휘감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가슴이 서로의 심장 박동이 느껴질 만큼 딱 달라붙었다.

    “이 정도론 부족해요. 지금의 난, 더 많은 걸 원하거든요.”

    독경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더니 거칠게 빨아들였다. 주인이 그를 밀어내려 손으로 어깨를 몇 번이나 내려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그만!!”

    한참을 껴안고 입안을 휘젓던 그가 뒤엉켰던 혀를 스르륵 풀었다. 그러고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선배가 먼저 시작했잖아요.”

    그녀가 아이를 달래듯 상냥하게 응대했다.

    “그래, 그렇지만 이 정도면 됐잖아. 이제 말해 봐.”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독경이 은근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당연하지.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이렇게 멀쩡히 눈앞에 있는데....”

    주인이 순순히 대답했다.

    “음....”

    그가 립스틱이 잔뜩 번진 그녀의 입술을 손끝으로 은근하게 문지르며 뜸을 들였다.

    “선배, 천일야화 알죠? 그 얘기처럼 하루에 하나씩 들려줄 테니, 매일 여기로 올래요?”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야릇하게 유혹하는 몸짓에 주인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나,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독경!”

    날 선 불호령에 독경이 항복했다는 양 두 손을 슬쩍 들며 말했다.

    “나 참, 알겠어요. 김강석이 날 빼돌렸어요.”

    “뭐? 김 실장님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이름에 그녀의 두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

    강석이 상현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을 때,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차 안에 의식을 잃은 젊은 남녀를 멀거니 보며, 그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모자란 데다 악랄하기까지 한 새끼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덜떨어진 새끼!”

    강석이 어금니를 으득 씹으며 노기를 터뜨렸다.

    상현의 사주를 받고 주인을 뒷조사한 그는 당연하게도, 독경과 그녀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알아챘다.

    하지만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눈이 맞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그리고 그런 불장난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게 마련이었다.

    강석은 이 일을 딱히 부풀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젊은 날의 치기라 여기며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더라도 독경만 주인에게서 떼어 내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는 현 회장에게 별다른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상현에게도 별일 아니라는 언질을 줬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제 의견에도 상현은 따로 사람을 붙여 그들을 감시했다. 그리고 결국, 이 사달을 내고야 말았다.

    우스운 것은 정작 사고를 친 놈은 꽁무니가 빠지게 내뺀 뒤라는 사실이었다. 강석은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상현에게 질려 가는 중이었다.

    현 회장의 비자금 관리부터 내연녀들의 입단속까지, 온갖 너저분한 일을 도맡아 온 그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목숨을 거둬 준 은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사냥개의 의무였으므로.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뜻하지 않은 업무가 하나 더 늘었다. 망나니 아들놈의 뒤치다꺼리였다.

    유명 연예인과의 추문은 물론, 음주 폭행, 갑질 등 유구한 사건들을 덮느라 그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게다가 미국 유학 중 마약에 절어 있던 그를 질질 끌며 데려온 사람도 바로, 강석이었다.

    이제 나이를 먹었으면 철이 들 법도 한데, 상현은 오히려 말도 안 되는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

    강석은 하릴없이, 지난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상현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찾아온 그날이었다.

    자신의 손에 질질 끌려간 그녀는 결국 유산을 했다. 차가운 병실에 누워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는 처음으로 이 일에 회의를 느꼈다.

    어떤 비극에는 자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것이다.

    한번 시작된 후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자꾸만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그 무렵, 사고가 터졌다.

    현장을 대강 수습하고 병원에 온 강석은 갓 스물을 넘긴 젊은이들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청춘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감명을 받기도 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주인에게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애틋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그 사람 가족이에요, 그 사람이 내 가족이에요!”

    온 마음을 다한 애끓는 절규가 그의 귓가에 아주 오래도록 긴 여운을 남겼다.

    다행히도 주인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문제는 독경이었다. 강석은 제 주인이 그의 존재를 몹시도 거슬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예견이 실현되기라도 하듯, 현 회장이 그를 호출했다.

    “죄송합니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다 제 불찰입니다.”

    강석이 현 회장에게 고개를 푹 수그렸다. 현 회장이 쯧 하며 혀를 차고는 마른 입술을 뗐다.

    “됐다, 너라고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겠냐. 다 모자란 저놈들 탓이지.”

    잿빛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던 그가 음모를 꾸미듯 낮게 말했다.

    “일이 벌어진 건 어쩔 수 없다만, 마무리는 확실히 해 줘야겠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강석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현 회장이 음침한 미소를 띠며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그는 문득 상념에 잠겼다. 제 주인은 언제나 지나치게 가혹한 사람이었다.

    상현을 찾아온 여자에게도 그랬다. 그는 그녀가 괘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 인맥을 동원해 복귀를 막았다.

    그리고 그 뒤, 어떤 방송에서도 여자를 볼 수는 없었다.

    독경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대로 둬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놈인데, 그마저도 현 회장은 허락하지 않았다. 강석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전능한 신이라 할지라도 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일이 있는 법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강석은 주인과 독경이 함께 일했던, 카페 한구석에 앉아 고민했다. 시간이 없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랜만이시네요.”

    그때, 고아한 목소리가 번민하는 그를 일깨웠다. 강석이 얼굴을 들어 여자를 보았다. 수연이었다.

    “아, 좀 바빴습니다.”

    그가 짤막하게 대꾸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석은 뒷조사가 필요 없어진 뒤에도, 종종 카페를 찾았다. 이곳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기에. 물론, 훌륭한 커피 맛도 한몫했다.

    “사고 얘기 들었어요.”

    평소와는 달리 먼저 말을 걸어오는 수연은 조금 화가 나 보였다. 차분한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상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은 좀 어떤가요? 윤희 학생 말로는 다들 위독하다던데....”

    수연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을 찾아왔던 윤희의 얼굴을 또렷하게 떠올렸다.

    강석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 회장이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금했기에, 가족들 외에는 그들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네, 뭐.... 상황이 좋진 않군요....”

    그가 피로가 잔뜩 묻어나는 어조로 대꾸했다. 수연은 궁금한 것이 더 많아 보였으나,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계산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작은 잔을 들고 돌아와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강석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수연이 그런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에스프레소예요. 주인 학생이 좋아하던.”

    그것은 명백한 시위며, 도발이었다.

    그녀는 어렴풋이나마 그가 사고와 깊이 관련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석이 처음 이 카페에 왔을 때 몰고 온 기묘한 불화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연은 그가 이 사고의 결정적인 책임자가 아니더라도, 약간의 가책을 받기를 바랐다.

    아직 젊은 두 사람이 상처받고 좌절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들은 그저, 다정하고 성실한 학생들일 뿐이었다.

    그녀가 돌아간 뒤, 강석은 작은 찻잔 속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악마의 피처럼 검고 진득한 액체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주인의 취향이 참으로 고약하다 중얼거리며, 쓰디쓴 액체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양심과 연민을 박박 긁어모아, 제 방식대로 이 일을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

    몹시 위험한 일이었지만, 강석은 독경을 사망으로 가장한 뒤 빼돌렸다.

    만약 주인이 그 순간 이성을 잃지 않고 그에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아주 미세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독경은 한적한 지방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었다. 명줄이 길면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잠든 것처럼 평안한 그를 오시하며, 강석은 혼잣말을 했다.

    “어디, 네놈 운이 얼마나 좋은지 시험이나 한번 해 보자.”

    그리고 독경은 얼마 뒤, 기적처럼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병원으로부터 소식을 받은 강석이 픽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으음, 주인... 선배....”

    독경이 처음 눈을 떴을 때 꺼낸 첫마디는 주인이었다. 아직은 몽롱한 정신이었음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부터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깨었을 때, 독경은 처음보다는 조금 맑아진 머리를 굴리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주인 선배는...?”

    의식을 되찾은 그를 구경하러 온 강석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죽었다.”

    그 말에 독경의 날카롭게 긴 눈이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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