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24화 (24/76)

#24화. 불청(不請)

“이렇게 통화를 할 게 아니라 직접 뵙고 싶은데요. 어디신가요?”

주인이 물었다. 주환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아, 개인적인 일이라 그건 말씀드릴 수 없군요. 제가 오늘 뵙자고 했던 건 현도경 씨에게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우리에겐 도경 씨가 가진 정보가 필요하거든요.]

그 말에 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제 정보가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아시죠? 제가 사기라도 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러자 뜻밖에도,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지금 절 걱정하시는 겁니까? 친절한 분이네요, 도경 씬. 더더욱 신뢰가 갑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궤변만 늘어놓네!’

주인이 속으로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널따란 공간 어디에선가 희미한 인기척이 설핏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주환이 정중하지만 어딘가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

[계약서라도 한번 검토해 보시죠?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그쪽이야말로, 후회 안 하시겠어요? 제 몸값, 꽤 비싼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대의 태도에서 위협감을 느낄 법도 한데, 주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수했다.

[하하, 사업을 하려면 그 정도 투자는 각오해야죠.]

그 또한 그녀의 공격을 여유롭게 웃어넘겼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주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척하며 거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다시 미세한 소음이 들리고, 곧바로 주환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러죠.]

그녀가 잠시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윽고, 고집스레 다물었던 입술을 서서히 떼기 시작했다.

“이 계약은 없었던 걸로 하죠. 제가 가진 정보를 대표님께 넘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또다시 들리는 미세한 기척,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그의 대답.

[...왜죠?]

“왜냐하면....”

주인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거실 한쪽에 있는 커다란 문 앞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문을 열며 소리쳤다.

“문 뒤에 숨어서 협상하려는 비겁한 사람을 믿을 순 없으니까요!”

그녀가 벌컥 문을 열어젖힌 방은 서재용으로 쓰이는 공간인지 커다란 책상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뒤로 엄청나게 많은 책이 사방에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남자가 책상 모서리에 느긋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위스키를 따르려던 손을 멈추고는, 고개를 슬쩍 들며 갑작스럽게 난입한 불청객을 보았다.

주인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를 않았다.

“이, 이... 독경...?”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 듯 작아졌다. 그가 술잔에 술을 마저 따르고는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주인 선배.”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주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왜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네요?”

극한의 혼돈 속을 허우적거리는 그녀와 달리, 독경은 얄미울 만큼 여유가 넘치는 태도였다.

“내, 내가 봤는데.... 똑똑히, 봤는데....”

주인의 반질거리는 까만 눈동자가 격렬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머릿속에서 잊으려 애썼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름 돋을 만큼 서늘했던 병원의 공기와 묵직하게 짓누르던 침묵과, 하얀 천을 걷자 드러났던 독경의 창백한 얼굴이.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 또한, 이독경임이 명백했다.

초콜릿 빛의 잘 그은 피부와 가로로 긴 날렵한 눈매, 먹물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속 그와 딱 맞아떨어졌으므로.

예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조금 마른 것 같은 턱 선과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 정도?

그리고 잘 짜인 근육처럼 몸에 딱 맞는 흰 셔츠와 발목까지 똑 떨어지는 정장 바지가 그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치장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주인이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독경이 뱀처럼 교활하게 눈을 접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선배, 머리 잘랐네요? 잘 어울려요.”

“입 다물어.”

주인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의 경고에도, 독경은 아랑곳없이 잘만 떠들었다.

“음, 근데 안경은.... 잘 어울리긴 하지만, 난 선배 맨눈을 보는 게 더 좋은데. 뭔가가 우리 둘 사이를 막는 건 짜증 나서....”

주인이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짓씹듯 물었다.

“여태껏 숨어 있다, 왜 이제야 나타났는데? 대체, 무슨 속셈이야?”

그 말에 독경이 들고 있던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 대더니,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잔을 잡은 왼손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주인이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찌르르 흘렀다. 그의 단단한 목젖이 위아래로 꺼덕였다.

“말은 정확히 해야죠. 이름까지 바꾸고 숨은 게 누군데.... 현도경이라니, 솔직히 좀 감동했어요.”

짓궂은 장난기로 가득한 대응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만이라도 그를 잊고 싶지 않아 지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사자에게 불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치스러웠다.

“그, 그건....”

주인이 재빨리 변명을 시도했으나, 머릿속이 텅 비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독경이 어딘가 허탈하고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는 내가 죽었다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난 단 한 번도 선배가 죽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래서 계속 찾고, 또 찾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이야....”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독경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들고 있던 유리잔을 산산조각 낼 것 같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흥신소 새끼들이 돈만 잔뜩 처먹고 놀았나 봐요. 다 잘라 버려야겠어요. 아니다, 먹은 돈은 토해 내게 하고 잘라야겠네요.”

억양 없는 말투로 섬뜩하게 지껄이는 진심에, 주인은 몸을 흠칫 움츠렸다. 그제야 상대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근데....”

그 순간, 독경이 커다란 몸을 위협적으로 부풀리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일렁이는 두 눈에 가득 들어찬 뒤에야,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 남자는 선배랑 안 어울려요.”

뜬금없는 말에 주인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의미를 깨닫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승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성실해.”

그녀가 마음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애써 침착을 가장했다.

독경이 제 얼굴을 주인의 얼굴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마디가 굵은 긴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안경을 툭 벗겼다.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따위는 가차 없이 치워 버리겠다는 듯이.

“그 남자가 나만큼 다정해요?”

악마의 속삭임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눈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녀는 그만큼이나 제게 다정한 이를 알지 못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 남자가 나만큼이나 선배에게 성실해요?”

그랬다. 주인은 독경처럼 제 시간을 오롯이 바친 이를 본 적 없었다. 어느새 눈가에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넘쳤다.

“흑!”

참지 못한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꼈다. 그가 주문처럼 나직이 읊조렸다.

“세상에 선배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그리고 날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선배뿐이고요.”

주인은 머릿속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

한참 뒤에야 서재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이신은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친 기색이 완연한 주인을 독경이 소중히 들어 안은 채 나왔던 것이다.

“음,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신이 황급하게 일어서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뵙죠.”

독경이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주인을 소파에 뉘었다.

이신은 사연 많은 한 쌍의 젊은 남녀를 흘깃 보고는, 옅게 한숨을 쉬며 그곳을 떠났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녀 옆에 담요와 차를 들고 돌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세심한 손길로 바르르 떨리는 몸에 담요를 덮어 주고는 찻잔을 건넸다.

“마셔요.”

주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자신보다 더 고집스러웠다. 독경이 혀를 쯧 찼다.

“이대로 영영 내 얼굴 안 볼 거예요?”

그러자, 그녀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눈을 맞췄다. 하지만 이내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눈물을 주룩 쏟았다.

“이제, 그만 울어요.”

그가 퉁퉁 부은 눈가를 손끝으로 다정히 쓸었다.

주인이 어떻게든 감정을 추슬러 보려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잠시 뒤, 간신히 한마디를 꺼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계약서에 사인하면 말해 줄게요.”

독경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신이 두고 간 계약서를 코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계약은 안 해.”

“왜요?”

“널 못 믿겠으니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으나, 그녀는 서둘러 다른 것을 갖다 붙였다.

“흠, 그럼 나도 말 안 할래요.”

그가 덩치에 맞지 않게 짐짓 토라진 시늉을 하며 볼멘소리를 냈다.

“치사한 놈.”

주인이 정제되지 않은 단어를 불쑥 내뱉었다.

“못 본 사이에 꽤 거칠어졌네요? 뭐, 난 어느 쪽이든 다 좋지만.”

독경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가 그런 그를 흘겨보며 생각했다.

상대가 치사하게 나온다면, 자신도 치사해지는 수밖에. 그리고 눈앞의 그가 정말 이독경이 맞다면, 이 방법이 통하리라.

주인이 옆에 걸터앉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지그시 눈을 내리깐 채 제 입술을 그의 입술에 살며시 포갰다.

독경이 잠시 놀란 눈으로 가까워지는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만족스러운지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음, 이건 반칙인데....”

그가 입술을 더욱 맞붙이며 느릿하게 속삭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