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23화 (23/76)
  • #23화. 징후 (2)

    “도경 씨, 지난번에 미팅한 곳에서 계약하자고 연락 왔어요.”

    지승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주인이 여상한 어조로 대꾸했다.

    “음, 확신이 없었는데 잘됐네요. 그럼 그때 얘기한 방향대로 진행하는 건가요?”

    “아, 아니요. 그쪽에서 몇 가지 사항을 더 요청해 왔어요. 방금 메일 보냈으니, 확인해 봐요. 그리고....”

    용건이 끝났음에도 지승은 여전히 그녀 옆에 우뚝 선 채 머뭇거렸다. 주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음, 계약을 따냈으니... 그, 도경 씨가 한턱 쏴야 하지 않을까요...?”

    “대표님.”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를 주인이 나직이 불렀다. 지승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거절이겠구나 싶어, 조금 울적해졌다.

    “제가 생각해 보니까....”

    주인이 약간 뜸을 들이다 도발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보통은 직원이 계약을 따내면, 사장이 밥을 사지 않나요?”

    “아, 그렇죠! 보통은.... 그럼, 뭘 먹어야 할까요...?”

    지승이 뒤통수라도 거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연히 비싼 거 사 주셔야죠. 제법 큰 건인데.”

    “비싼 거, 비싼 거, 비싼 거라....”

    그가 얼빠진 표정으로 주인의 말을 작게 반복하다, 이내 서서히 얼굴을 밝혔다. 그제야 그녀의 허락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비싼 거 좋죠! 그럼, 이따 저녁에 봅시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지승이 무척이나 당당한 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갔다. 주인이 피식 터지는 웃음을 꾹 참으며 혼잣말을 했다.

    “밥 한 끼쯤은 괜찮겠지...?”

    ***

    “아....”

    종업원이 안내한 자리에 앉으며 주인은 가볍게 탄식했다. 지승이 데려온 곳이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보며 지승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대학 동기가 여기서 수석 셰프로 일해요. 원래는 오늘 예약이 다 차서 안 되는 건데 제가 떼를 좀 썼죠, 하하.”

    그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떤 거들먹거림이나 우쭐함이 없는, 솔직하고 담백한 태도였다.

    그리고 주인은 지승의 그런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독경이 떠난 지난 여섯 해 동안, 그녀에게는 제법 많은 남자가 접근해 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부와 명예, 학벌 등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며 환심을 사려 애썼다.

    하지만 주인에게 배경과 조건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진짜 자신감은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았을 때,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돈 때문에, 높은 지위 때문에, 좋은 학교 때문에 비대해진 자아는 그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초라하게 쪼그라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집안도, 돈도, 그 무엇도 가지지 않았음에도 세상 전부를 가진 것처럼 행동했던 남자를.

    그리고 그와 같은 이를 주인은 그전에도 이후에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래서일까? 주인은 오히려 독경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지승이 좋았다.

    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지만, 비굴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 상대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상냥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는 했다.

    그랬기에 그가 자신에게 감정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크게 거리를 두지 않았다.

    “어때요? 도경 씨 입에 맞나요?”

    지승이 특유의 눈웃음을 부드럽게 지으며, 다정히 물었다. 주인이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도경 씬 많이 먹어야 해요. 그래야 건강하죠.”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지승이 걱정 어린 눈길로 훑었다.

    “제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요?”

    주인이 픽 웃으며, 작게 썬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네, 솔직히 도경 씨 처음 봤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옆에서 툭 치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거든요.”

    이 년여쯤 전, 케이스 면접에서 만난 그녀를 떠올리며 지승은 한숨을 쉬었다.

    그 무렵 그는 승승장구하던 외국계 컨설팅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 위해 직원을 모집 중이었다.

    그때, 주인이 면접장 안으로 들어왔다. 파리한 낯빛, 가녀린 몸 선,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원자는 형형한 눈빛으로 자신을 오시하며 발표를 시작했다.

    훌륭한 분석이었다, 탁월한 접근이었다. 탐나는 인재였다.

    그리고 동시에, 호기심이 이는 상대였다.

    저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깃든 애수는 무엇일까? 죽음의 그림자를 품은 채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모순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질문들은 어느새 조금씩 부풀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궁금했다. 궁금하니, 보고 싶었다. 보고 싶으니, 그리워졌고, 함께 있고 싶었다. 이왕이면 좀 더 오래....

    그렇게 커진 감정은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것처럼 빵빵해졌다. 지승은 이제 제 마음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말하지 않으면 조만간 제풀에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도경 씨,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그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탁자 위에 올려 둔 주인의 휴대 전화가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잠깐만요.”

    주인이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양해를 구한 뒤, 액정을 확인했다. 이신의 전화였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현도경 씨, 밤늦게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김주환 대표님께서 지금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네? 지금요?”

    주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지승이 무척이나 관심 어린 눈길로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네, 지금요. 오늘과 내일 사이에 일정이 비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어서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주인은 꽤 당황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아니면 또다시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죠. 장소를 알려 주시면....”

    그때, 상대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그쪽으로 차를 보내 드리죠. 십여 분 뒤에 정문에서 뵙겠습니다.]

    주인은 자신이 있는 곳을 어찌 아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이신이 전화를 뚝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에요?”

    지승이 걱정 반 궁금증 반 섞인 질문을 던졌다. 주인이 외투와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죄송해요, 대표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식사 잘했어요.”

    “그래요, 알겠어요....”

    묻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 밖으로 넘치려 했으나, 그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참을성이 그녀 곁에 있을 수 있는 덕목이라는 사실을, 지승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주인은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뒤,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반도 채 비우지 못하고 식어 버린 음식만이 그의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오늘은 눈이 호강하는 날인가?”

    주인은 인테리어 잡지에나 나올 법한 펜트하우스 한가운데 멀뚱히 앉아 주변을 살폈다.

    실내를 가득 메운 자재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휘황찬란할 만큼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의외로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가구 색상이 검은색 계열로 통일돼 있어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화려하지만 어딘가 썰렁할 정도로 무성의한 공간에 기묘한 부조화를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이 공간의 주인은 겉치레를 귀찮게 여기는 심드렁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조심스레 앞섰다.

    그때, 주인 옆으로 이신이 빠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늦은 시각에 모시게 돼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근데 김주환 대표님은요?”

    주인의 질문에 맞은편 소파에 선 이신이 약간 엉거주춤 앉으며 답했다.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기셔서 조금 이따 오실 예정입니다.”

    그 말에 주인의 눈살이 팍 찡그려졌다.

    이 늦은 시각에 사람을 불러 놓고, 정작 본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폭발하려는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몇 시간이든 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뭐.”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주인이었다.

    그 살벌한 기세에 눌린 것인지, 이신이 잠시 어깨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금세 침착하게 자세를 가다듬고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죠?”

    주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신이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계약서입니다. 저희 대표님께서 현도경 씨를 스카우트하고 싶어 하십니다.”

    뜻밖의 제안에 그녀의 고개가 더욱 삐딱해졌다. 안경 너머로 안광이 희게 번뜩였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저를요? 게다가 전, 제가 가진 정보를 하나도 알려 드리지 않았는데요?”

    상대의 날카로운 추궁에, 이신이 그녀답지 않게 곤궁한 어조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글쎄요, 대표님께서 현도경 씨의 가치를 높이 산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그럼, 이번엔 관점을 바꿔 보죠. 제가 뭘 믿고 이 회사를 택해야 하죠? 대표 얼굴도 본 적 없고, 모기업이 어딘지도 모르고, 투자 목적도 알려 주지 않는 이 회사를? 이 바닥에 넘치는 게 사기꾼인데 말이죠....”

    “하하,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아, 잠깐만요!”

    이신이 말을 하다 멈추고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가 휴대 전화의 스피커를 켜고는 탁자에 올려 두었다.

    “대표님께서 직접 통화하시고 싶다는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기계 너머에서 그윽한 음성이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현도경 씨.]

    중저음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깨끗하지 않은 음질 탓인지 불분명하게 윙윙거리며 울렸다.

    “김주환 대표님 맞습니까?”

    주인이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착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굵직한 음성 속에 약간의 웃음기가 녹아든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더욱 불쾌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