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징후 (1)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주인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대학도 다시 들어갔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생활이 늘 그렇듯 쉽지는 않았으나, 마음이 고된 것보다 몸이 고된 것이 훨씬 나았다.
비좁은 고시원에서 시작된 보금자리는 어느새 조금 넓은 원룸으로 바뀌었다.
원룸은 모두 비슷한 형태인지 아니면 제 방이 유독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새 공간은 독경의 자취방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더욱.
그때마다 주인은 방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와 나누던 체온과 숨결을 되새기고는 했다.
“이독경....”
그녀가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새삼, 그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등 뒤로 스며드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공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야 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유일한 존재를 빼앗은 이들에게 복수해야 했다. 그것이 그를 위한 애도라 생각했고, 그리 믿었다.
***
그러던 어느 날, 주인 앞으로 소포 하나가 배달됐다. 제법 두툼한 양의 서류였다.
발신인이 불명확한 그 소포를 받는 순간, 가볍게 현기증이 일었다.
“아!”
봉투에는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본명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동창들 아니면, 태성과 관련된 자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진즉 파악하고 있었을 이는 한 명뿐이었다. 바로 강석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주인은 소포보다 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주말 오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멈춘 뉴스에서 낯익은 번호판의 차를 발견한 것이다.
[오늘 오전, 경기도 인근 한 저수지에서 물에 빠진 차량이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운전자는 사십 대 후반 남성 김씨로, 혈중알코올농도가 면허 취소 수준에 달해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사에 무게를 두고 조사 중입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주인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TV 전원을 껐다. 고요한 방 안에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쿵쿵 울렸다.
태성 쪽 사람 중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사냥개가 죽었다. 그녀는 그것이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주인이 잔뜩 숨죽인 채 작게 웅크렸던 몸을 죽 펴기 시작했다. 곧장 주변을 정리한 후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이독경이 죽은 지 사 년 만의 일이었다.
***
다시, 두 해가 지났다.
그사이 주인은 한 컨설팅 업체에 취업해 자리를 잡았다.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창업 자문 및 지원을 해 주는 곳이었다.
물론, 일하는 틈틈이 태성과 관련된 이슈를 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상현은 회사를 착실하게 말아먹는 중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이런저런 구설에 휘말렸던 탓이었다.
그 때문에 주가는 나날이 하향세를 찍었다. 개미들의 곡소리가 모니터를 뚫고 들리는 듯했다.
“경영권 승계는 이제 시작인데,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지....”
주인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노파심에 하는 말은 아니었다. 기가 찰 만큼 한심해서 나오는 소리였다.
사실, 태성의 경영권 승계는 다른 기업에 비해 꽤 늦은 편이었다. 현 회장이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더는 미룰 수 없기에, 이제 슬슬 작업에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죽 내리며 태성그룹 리포트를 가볍게 훑다, 눈에 띄는 점을 발견하고는 안경 너머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년 전쯤부터 태성의 주식을 야금야금 사들이던 회사가 이번 저점에도 주식을 다량 매수한 것이다.
“작전인가?”
주인이 작게 중얼거리며, 회사를 검색했다.
미래투자라는 다소 무성의한 이름의 투자사는 이 년 전 설립됐다는 것과 김주환이라는 사람이 대표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전무했다.
아무리 찾아도 기사 한 줄 나오지 않는 화면을 바라보며,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작전 세력이라기엔 너무 티가 나는데....’
짧은 시간 치고 빠지는 작전주와 달리, 이번 경우는 오랜 기간 꾸준히 세를 불렸다. 지나치게 성실해 보일 만큼.
게다가 이 정도 매수세면 태성에서도 눈치를 못 챌 리 없었다. 아마 그쪽에서도 인맥과 정보를 총동원해 정체와 목적을 파악하려 혈안이 돼 있을 것이었다.
‘단순 투자라기엔 태성의 실적이 썩 좋지 않은데. 혹시, 경영권에 개입하고 싶은 건가?’
주인은 두 번째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태성은 최근 거액을 투자한 신약이 개발에 실패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게다가 차기 후계자로 유력한 상현의 지분율이 높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였다. 흔들어 볼 만했다.
그녀는 대충 만든 티가 역력한 홈페이지에 적힌 대표자의 이메일 주소로 접촉을 시도했다. 자신이 던진 미끼에 상대가 걸리기를 바라면서....
“도경 씨? 현도경 씨?”
그때, 상냥한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주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오후에 미팅 있는 거 잊지 않았죠?”
서른 초반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주인이 따라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대표님.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면 되죠?”
대표로 불린 남자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런데 제 차가 갑자기 고장 나는 바람에 정비를 맡겼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택시로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죠?”
그의 물음에 그녀가 흔쾌히 반응했다.
“그럼요.”
몇 시간 뒤, 건물 로비는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인은 제 고용주인 최지승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그 틈을 빠져나왔다.
어쩐지 등 뒤로 간질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아주 찰나의 감각이었기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미팅은 늦은 오후에야 끝났다. 몇 시간을 쉴 새 없이 떠들다 보니, 주인은 무척이나 목이 말랐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지승이 음료를 뽑아 주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유자 맛 음료였다.
주인은 그것을 볼 때마다 하릴없이 독경을 떠올렸지만, 더는 울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모든 것을 섭섭할 만큼 담담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었다.
“오늘 미팅 어땠어요? 느낌 좋죠?”
지승이 눈매를 우아하게 휘며 물었다.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주인이 무심하게 답했다.
“글쎄요.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계약까지 갈지는 잘....”
“하하, 도경 씬 늘 신중하네요. 그쪽에서 도경 씨가 제안한 솔루션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보였는데 말이죠.”
“그런가요?”
주인이 낮게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그런 그녀를 지승이 지그시 바라보며 운을 뗐다.
“우리, 내기할까요?”
“대표님이랑, 저랑요? 무슨 내기요?”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계약을 안 하면 내가 위로로 밥을 사고, 계약을 하면 도경 씨가 한턱내는 걸로.”
“뭘 해도 밥은 먹어야 하네요?”
주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승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허,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예요. 그리고 도경 씬 좀 먹어야 하고요.”
고요하고 투명한 갈색 눈이 그녀의 야윈 뺨을 스쳤다가, 이내 눈을 맞췄다. 은근한 애정을 희구하는 저 눈과 비슷한 눈을 주인은 알았다.
그 눈은 늪만큼 진득하고, 무저갱만큼 까마득해서 보는 이를 압도하고는 했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 해 볼게요....”
그녀가 지승의 눈길을 슬쩍 피하며 얼버무렸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
미래투자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자신을 김주환 대표의 비서로 소개한 여자는 다음 날 점심에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주인은 직접 윗선을 보고 싶다는 의중을 비쳤으나, 상대는 대표님은 출장 중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주인은 이참에 미래투자가 어떤 회사인지 정보나 캐 볼 요량으로 만남을 수락했다.
이튿날, 한 호텔 카페에서 서른 후반쯤으로 보이는 깐깐한 인상의 여성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미래투자 이신입니다.”
상대가 명함을 내밀며 깍듯이 말문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JS컨설팅 현도경입니다.”
그녀도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신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태성그룹과 관련해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계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선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빙빙 돌리지 않는 상대가 주인은 오히려 편했다. 자신도 굳이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보태며 꾸미지 않아도 되니까.
“묻는 건 자유십니다만, 전 대표님께서 허락한 답만 할 수 있습니다.”
이신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렇게 절 찾으신 건 태성에 관심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도 되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왜 태성 주식을 사들이는지 연유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이신은 대답 대신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그러고는 잠시 뒤,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 대답에 주인은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것 같았다.
“보아하니 현금 보유량이 상당하신 것 같은데, 자금은 어디서 조달하시나요? 혹여나 불법적인....”
“아! 그 정도는 얘기해도 될 것 같군요. 모기업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는....”
“당연히, 곤란합니다.”
이신이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질문을 원천 봉쇄했다. 주인이 답답한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번엔 제 차례군요. 믿을 만한 정보라는 게 뭐죠?”
“그건, 대표님을 직접 뵈면 말씀드리죠.”
주인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법으로 되받아쳤다. 자신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 사람에게 어찌 패를 보인다는 말인가.
“정보의 출처는 어딥니까?”
“믿을 만한 내부자입니다. 이 이상은 저도 알려 드릴 수 없고요.”
주인이 그린 듯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자리를 파했다.
호텔 밖을 나서는 동안, 주인은 또다시 뒤통수에 무엇인가가 집요하게 달라붙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냥 무시해 버렸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