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지옥 (2)
“쯧쯧!”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딸을 보며 현 회장은 혀를 찼다. 언젠가 요긴하게 써먹을 기회가 있을 자식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망가져 버릴 줄은 몰랐다.
하지만 고장 난 것은 고치면 그만이었다. 시답잖은 혈기에 나간 정신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돌아오기 마련이므로. 아직 버리기는 아까운 패였다.
“당분간 어디 멀리 보내 버려. 시간이 좀 지나면, 자기도 정신을 차리겠지.”
현 회장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제 아내에게 말했다. 박은아가 고상한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미국에 있는 언니에게 보낼까 해요. 거기가 여기보다 날씨도 좋으니.... 경치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다 보면 나아지겠죠.”
“그래? 잘됐군.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기 전에 하루빨리 비행기 태워 버려!”
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명령조로 외쳤다. 그녀가 침울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막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현 회장이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휙 돌려 못마땅한 눈초리로 제 딸을 다시 훑었다.
자식들이라고 멀쩡한 놈 하나 없는 현실이 그의 불같은 성질을 더욱 돋우었다.
***
주인은 떠밀리듯 비행기에 올라 이모 댁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 인근 부촌에 거주하는 이모는 피골이 상접한 채 들어오는 조카를 눈물로 맞았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총기 어린 예쁜 얼굴을 떠올릴 때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올 만큼 이모는 주인을 애틋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모, 저 화장실 좀....”
조카아이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기력 없는 음성이었다.
“아, 그래. 저기 벽만 돌면 바로 나와. 이모랑 같이 갈까?”
그녀의 물음에 주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뒷모습을 이모는 안쓰럽게 응시하다, 이내 음식을 가지러 갔다. 모처럼 발휘한 솜씨가 조카에게 효과가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참이 지났는데, 주인은 화장실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진 이모가 화장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주인아, 멀었니?”
하지만 안에서는 대답 대신 희미한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열쇠 꾸러미를 찾아 문을 여는 순간, 경악스러운 광경에 앙칼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주인아!! 얘!!”
이모가 목격한 것은 왼쪽 손목을 그은 채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카였다. 세면대며 바닥에는 피와 물이 뒤섞인 액체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놀란 그녀가 주인을 끌어안으며 고함을 질렀다.
“주인아, 주인아!! 정신 차려!!”
주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타향의 병원에 있었다.
제 엄마와 달리 이모는 깨어난 그녀를 부둥켜안고는 한참을 울었다. 주인은 그것이 조금 고마웠다.
그러나 이미 삶의 의지를 뿌리째 꺾어 버린 그녀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런 조카를 이모는 감당할 수 없었다. 지켜보기가 괴롭고 겁났던 것이다.
결국, 주인은 회복되는 대로 본가에 돌려보내졌다.
박은아는 유령 같은 몰골로 돌아온 딸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기에,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시인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주인은 또다시 화장실 문을 잠갔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모질도록 끈질긴 생명이었다.
그녀가 다시 자해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현 회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송장 치를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며, 아비는 딸을 정신 병원에 집어넣었다.
그곳에서 주인은 모범적인 환자로 지냈다. 순진한 척, 얌전한 척, 성실한 척 연기하는 일은 그녀가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결국, 주인은 상태가 호전됐다는 판정을 받고 금세 퇴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보란 듯이 손목을 그었다.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현 회장이 그 사실을 알고는 질린 얼굴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신발 신을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내쫓아 버린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제 아내에게도 딸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찾지 말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근본도 없는 종자랑 야반도주하다 걸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정신 병원까지 드나드는 계집애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주인은 얇은 잠옷 차림에 맨발로 육중한 철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한밤의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열두 살, 엄마 손에 끌려와 내내 벗어나고 싶었던 ‘그 집’을 올려다보았다.
허무했다. 그토록 도망치고자 안간힘을 썼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이다지도 손쉽게 벗어날 수 있을 줄이야.
처음부터 이 방법을 알았더라면, 주인은 기꺼이 제 몸뚱이쯤은 눈 한번 깜짝 않고 희생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리 쉽게 독경을 잃지 않아도 됐으리라.
“하하, 하하하!”
주인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이독경이라는 낙원은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기에....
***
아직 어스름한 이른 아침, 중년의 여인은 싸한 코끝을 훌쩍이며 발길을 서둘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눈앞에 흰옷을 입은 채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존재를 맞닥뜨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에구머니!!”
좁은 골목길 모퉁이에 서 있는 귀신을 발견하자, 그녀는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직 죽기는 이른 나이라 생각했는데, 헛것을 보니 때가 왔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출근은 해야 했기에, 여인은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갔다.
젊은 여자의 외양을 한 귀신은 얇은 잠옷 차림에 맨발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상했다. 귀신이라면 추위를 느끼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귀신에게 발이 저렇게 선명하게 보이던가?
순간, 중년의 여인은 더욱 당황했다. 귀신이라 여겼던 존재가 진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가씨,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그녀는 제 외투를 벗어 젊은 여자에게 두르며 질문을 퍼부었다.
가까이서 보니 상대는 스물을 갓 넘긴 앳된 얼굴이었다. 타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딸이 절로 떠올랐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왜 이러고 있어? 경찰 불러 줄까?”
워낙 흉흉한 세상이다 보니, 머릿속으로 별의별 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여자는 경찰이라는 말에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중년의 여인이 다시 물었다.
“전화기라도 빌려줄까? 가족들 번호 알지? 연락해 볼래?”
그 말에 멍하게 서 있던 젊은 여자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여인이 휴대 전화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주인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윤희를 떠올렸다. 그녀라면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기꺼이 받아 주리라.
하지만 곧장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에게 신세를 질 수 없을뿐더러, 가족들이 찾아낼까 봐 두려웠던 탓이다.
머리를 힘없이 툭 떨구는 그녀를 보며 여인은 딱한 마음에 혀를 찼다.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음 안 돼. 너무 위험하잖아....”
중년의 여인은 제 자식보다도 훨씬 어린 주인을 나긋하게 설득했다. 그러다 문득,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보고는 부랴부랴 일어섰다.
“안 되겠다. 일단, 뭐라도 좀 먹자. 아가씨,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여인은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따뜻한 음료와 빵을 사 왔다. 사람은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나고, 머리가 돌아가는 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돌처럼 차고 딱딱해진 주인의 손에 따듯한 음료를 꼭 쥐여 주었다. 조금 더 달래다 날이 밝으면 지구대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으윽!!”
그런데 그때, 움푹 팬 큰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중년의 여인은 갑작스러운 반응에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젊은 여자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가 건넨 음료는 독경이 늘 주인을 위해 챙겨 주던 따뜻한 유자차였던 것이다.
주인은 그 순간, 기이하게도 살고 싶어졌다. 낯선 여인이 베푼 친절과 호의가 그가 남긴 마지막 온기처럼 느껴졌기에.
살아야겠다. 개같이 살아남아서, 끝장을 보고야 말리라!
그녀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음료를 꼭 쥔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독경이 떠난 후 처음으로 삶에 대한 의지, 아니 오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주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중년의 여인이 귀를 바짝 댔다.
“염치없지만....”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기어들 듯 덧붙였다.
“돈 좀 빌려주세요. 제가, 조만간 꼭, 갚겠습니다....”
여인은 잠시 측은한 눈길을 그녀에게 보내다, 이내 꼬깃꼬깃 접은 만 원짜리 세 장에 두 장을 더 얹어 건넸다.
그녀는 이것도 인연이니 좋은 일 한 셈 치고 그냥 주려 했으나, 젊은 여자는 끝끝내 계좌 번호까지 알아내 갔다.
그러고는 멀어지는 자신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네.... 괜찮겠지?”
중년의 여인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발길을 서둘렀다.
그 길로 주인은 근처 찜질방에 가 몸을 씻고 잠시나마 눈을 붙였다. 몸도 머리도 아주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시장에 들러 제일 싼 옷과 신발을 산 뒤, 구인 공고가 붙은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사장은 화장기 없는 깡마른 체구의 그녀를 못 미더워했으나,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보자 흔쾌히 채용했다.
그렇게 그녀는 낮에는 카페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다.
한 달 뒤, 첫 월급을 받자마자 주인은 제일 먼저 중년의 여인에게 빌린 돈의 두 배를 갚았다. 목숨을 빚진 값치고는 너무나 보잘것없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을 들고 그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먼 곳으로 잠적했다. 허리까지 닿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이름도 바꾼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