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20화 (20/76)

#20화. 지옥 (1)

그 사고는 불운과 악의가 겹쳐 발생한 일이었다.

주인과 독경이 탄 차를 덮친 화물차 운전자는 면허 취소 수준을 훌쩍 넘길 만큼 만취 상태로 중앙선을 침범했다. 그리고 세간에도 그렇게 알려졌다.

하지만 두 사람을 쫓던 검은 차에 막히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관계된 자들만이 알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불운과 악의를 자양분 삼아 재앙은 싹을 틔웠다.

***

주인이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새하얀 병원 천장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동안, 모친이 말을 걸었다.

“이제 정신이 드니?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였어? 회장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

이 상황에도 딸 걱정은커녕, 남편의 심기나 신경 쓰는 박은아에게 주인은 신물이 났다.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죽을 걸 그랬나? 그럼, 그냥 내버려 두지 왜 여기까지 데려왔어? 왜!!”

주인이 눈알을 희게 뒤집은 채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인아!”

악귀처럼 성난 얼굴로 발광하는 딸을 보며 박은아는 당황한 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어른들에게 반항한 적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다.

제가 낳은 딸이 가슴속에 펄펄 끓는 용암과 서늘한 가시를 함께 품고 있다는 것을. 가끔 딸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섬뜩함이 이제야 실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그사이 주인은 팔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까지 기어이 뽑았다. 억지로 힘을 준 탓인지 하얀 팔뚝에서 새빨간 선혈이 흘렀다.

그때, 소란을 눈치챈 강석이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박은아가 욱신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사이로 독기 어린 안광을 번뜩이는 주인을 보았다.

“주인 양, 이독경 보러 가시죠.”

“이... 독경...?”

그녀의 갈라진 입술 틈으로 희미한 침음이 흘렀다. 온몸에서 줄줄 흐르던 난폭한 살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강석은 주인을 중환자실로 데려갔다. 복잡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의료 기계들 사이에서, 독경은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주인이 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난이 닥치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코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백하고 상처 가득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강석이 말했다.

“차가 운전석 쪽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독경 학생이 모든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더군요. 이번 주가 가장 큰 고비고, 아주 운이 좋아 산다 해도 후유증이나 장애가 크게 남을 거라고....”

“으윽!!”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주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듯 사지를 바들바들 떨며 울부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독경!! 이독경!!”

짐승의 울음에 가까운 처절한 절규가 싸늘하고 적막한 허공을 갈랐다.

강석은 미친 사람처럼 제 가슴을 쥐어뜯는 그녀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며 데리고 나왔다. 여린 몸에서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힘이 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이독경 학생이 충격을 막아 준 덕분에, 주인 학생이 살 수 있었습니다. 의사들 말로는 멀쩡한 게 기적이라더군요. 슬프겠지만 그가 준 마지막 선물이라 여기고, 남은 삶을 사세요. 그게 떠난 사람을 위한 길입니다.”

“하!”

잔뜩 뒤엉킨 검은 머리 사이로 실소가 터졌다. 주인이 얼음장보다 찬 냉소를 그리며 그를 오시했다.

“웃기지 마. 당신이 뭘 알아? 이독경에 대해서 뭘 안다고 떠드는 거야? 걘 나 두고 절대 못 가, 아니 안 가!”

등골이 오싹할 만큼 맹목적인 믿음에 강석은 자신이 그들을 얕보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

주인은 매일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독경 곁을 지켰다.

주변 사람들이 달래도 보고 화도 냈으나, 그녀는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오로지 그만을 생각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가련한 개가 제 품에 안겨 있었다. 주인은 후회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결국 제 사냥개를 사지에 몰아넣은 것을.

너무나도 충직한 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인을 지켰으나, 정작 주인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길들이지 말걸....”

독경의 새까만 앞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리며 주인은 회한에 잠겼다.

그때, 신입생 모임에서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짐승처럼 크고 짙은 눈을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 곁을 맴돌며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그를 외면했어야 했다.

입술을 내어 주며 시험하지 말았어야 했고, 강렬했던 떨림과 쾌락도 맛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 한들, 그 모든 것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녀는 알았다. 수만 번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결코 그를 외면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거부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거대한 운명이었기에.

그리고 이 불가항력적인 끌림은 독경도 같으리라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향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일 또 올게.”

위태롭게 평온한 독경의 마른 뺨에 주인이 입을 맞췄다. 그러나 시련은 늘 그렇듯 한꺼번에 찾아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날도 주인은 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향했다. 본인은 원치 않았으나, 모친이 걱정스럽다며 강권한 일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순순히 협조했다. 그래야 면회 시간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독경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서둘렀다. 그때, 멀리서 의사와 간호사가 다급히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주문처럼 혼잣말을 뇌까리며 그녀는 문 앞에 섰다. 그때, 누군가가 얼굴까지 흰 천을 뒤집어쓴 채 빠르게 실려 나왔다. 그 뒤를 강석이 침통한 얼굴로 따랐다.

“이... 독경...?”

주인이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하지만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온 것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꺽꺽대는 거친 숨소리였다.

그녀가 이동 침대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이 말릴 틈도 없이 재빨리 하얀 천을 걷었다. 그곳에는 파리한 낯빛의 독경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주인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석이 그녀를 부축했다.

“이독경, 어디 가는 거예요? 대체, 어디로 데려가요?”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며, 주인이 강석의 팔을 애원하듯 붙잡았다.

“영안실로 이동하는 겁니다.”

강석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짧게 답했다. 주인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곳은 너무 춥고, 외로운 곳이다. 그런 공간에 독경을 홀로 둘 수 없었다. 그가 평생을 너무나 깊은 고독 속에 살아온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안 돼요, 그런 데 이독경을 혼자 둘 수 없어요! 제가 같이 있을래요, 제가 따라갈래요!”

“주인 양, 안 됩니다. 정신 차려요! 가족과 연락되면 정식으로 장례 절차가 진행될 겁니다. 그때까지 기다려요.”

강석이 부서질 듯 가녀린 어깨를 다잡으며 매섭게 말했다. 하지만 주인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안 돼요, 내가 같이 있을래요! 내가 그 사람 가족이에요, 그 사람이 내 가족이에요! 그러니까 같이 있게 해 줘요!! 한 번만 더 얼굴 보게 해 줘요!!”

주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의 정의가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는 것이라면, 자신과 독경은 가족이 틀림없다고. 그것은 신조차도 감히, 부인 못 할 사실이라고.

남보다 못한 핏줄 따위가, 서류 쪼가리 따위가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주인은 몇 번 더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발버둥을 치다 이내 까무러쳤다. 강석이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안아 들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독경의 진득하게 시커먼 눈을 닮은 지옥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주인은 꿈을 꾸었다. 어둡고 싸늘한 영안실에 독경이 홀로 누워 있는 꿈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녹아내릴 듯 펄펄 끓던 체온은 어느새 식고, 오싹하리만치 형형하게 빛나던 두 눈은 생기를 잃은 채 텅 비었다.

반듯하게 누워 영면에 드는 그를 그녀가 두 팔 벌려 끌어안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함께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소망은 이룰 수 없었고, 주인은 홀로 깨어났다. 마지못해 뜬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푹 꺼진 뺨을 적셨다. 며칠 만에 되찾은 의식이었다.

그사이, 독경은 이미 장례를 치렀다. 부친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먼 친척이 대신 포기서를 작성했다고 했다.

살아 있을 때도 외로웠던 그는 죽어서까지 고독했다. 그녀는 그것이 마음에 사무치게 남았다. 마지막 순간에 옆에 있어 주지 못한 스스로가 밉고, 원망스러웠다.

주인은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온종일 침대에 앉아 먼 산만 내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처럼 풍경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독경이 남긴 말이 절로 떠올랐다.

“천국에 있더라도 선배가 없다면, 거긴 그냥 나한테 지루한 감옥이에요.”

과장된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가 없는 여기가 나한텐 지옥이니까.”

그녀가 자조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가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너무나 막막하고 두려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계속 미뤘으나, 독경이 떠난 지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현실을 외면하려 주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였다. 그를 이용하고 있다고, 필요에 의해 길들일 뿐이라고.

하지만 먼지가 켜켜이 쌓인 것 같은 짙은 검은 눈을 처음 본 순간,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 제 영혼을 모조리 빼앗겼기에.

그녀는 사실, 원한다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편이 더 안전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독경을 끌어들일 만큼,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결과는 참담했지만.

주인의 맑은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뒤늦게 시인한 감정이 그녀를 더욱 나락으로 떠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그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렵다고 아꼈는지....

또다시 눈물이 주룩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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