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19화 (19/76)

#19화. 탈출 (2)

주인은 보지 못했으나, 그때 독경이 지었던 미소는 성탄절에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쁨과 행복에 겨워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어떤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온전히 서로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완벽한 인생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삶이 지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독경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주인 몰래 산 모양이 단순한 반지 한 쌍이 담겼다.

마음 같아서는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다이아몬드 반지 따위를 한가득 안기고 싶었으나, 잠시 뒤로 미뤘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둘 중 작은 크기의 반지를 꺼내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머지않아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이 반지를 내밀며 청혼할 계획이었다.

그것참 아름다운 광경이겠구나 싶어, 독경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 무렵, 주인은 평소와 비슷한 시각에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씻은 뒤 외출 준비를 했다. 지루해 보일 만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의심할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자꾸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가는 겁니까?”

그녀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강석이었다.

“네.”

주인이 어깨에 걸친 캔버스 가방을 손으로 꼭 쥐었다. 혹시나 들킨 것은 아닐까 두려웠으나,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그렇군요, 조심히 가요.”

“네, 감사합니다.”

주인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강석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주인은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독경은 이미 도착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렌터카 앞에 서 있던 그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살짝 손을 들었다.

“선배!”

“짐은 다 챙겼어?”

“짐이랄 게 뭐 있나요? 가방 두 개가 전부인 걸요.”

두 사람은 당장 필요한 물건 외에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주인이 최대한 가볍게 움직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올 때 이상한 낌새는 없었죠?”

독경이 보조석 차 문을 열며 물었다.

“응, 넌?”

“저도 특별한 건 못 봤어요.”

“운전 잘한다고 했지?”

그녀가 능숙하게 운전대를 잡고 출발하려는 독경에게 물었다. 그가 씩 웃으며 주인의 머리를 다정히 쓸었다.

“네, 재수할 때 알바로 대리운전도 좀 했어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고는 비장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자.”

그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

평일이라 그런지 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제법 한산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분명, 유쾌한 여행길이었으리라.

하지만 도망치듯 떠나려는 그들에게 여유는 없었다. 특히, 주인은 더욱 그러했다.

불안과 초조를 이기지 못한 그녀가 쉴 새 없이 제 입술을 손으로 뜯었다. 어쩐지 자꾸 뒷덜미가 쭈뼛쭈뼛 섰다.

상대의 불안정한 상태를 인지한 독경이 슬며시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차분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너무 걱정 마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 말에 주인이 억지로 입가에 힘을 주었다.

“맞아, 네가 옆에 있으니까 다 잘될 거야. 그래야지.”

마침, 두 사람이 탄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어디선가 나타난 양쪽 차선의 검은 차 두 대도 따라 정지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두 차 모두 지나치게 가깝게 붙어 선 것이다. 마치 포위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것이 몹시 거슬린 독경이 짜증 섞인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나직이 신음했다.

“선배, 손잡이 꽉 잡아요.”

담담한 어조로 경고를 내뱉는 음성에서 주인은 섬뜩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이 천천히 그의 옆얼굴로 향했다. 순간이 영원처럼 아주 느릿하게 흘러갔다.

정면을 노려보는 야성적인 얼굴이 어느새, 사납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날렵하게 각진 턱 근육이 분노와 긴장으로 꿈틀거렸다.

그 순간, 신호가 바뀌자 독경이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재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독경!!”

갑작스러운 출발에 당황한 주인이 손잡이를 잡은 팔에 힘을 꽉 주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따라붙은 새끼들이 있어요!”

그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며 외쳤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보자, 검은색 차량 두 대가 자신들을 뒤쫓는 광경이 뚜렷이 보였다.

‘김 실장님? 아니면, 아버지가 고용한 다른 사람들인가?’

강석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다면, 분명히 현 회장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인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제 부친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이었다.

‘모른 척한 건가? 그도 아니면,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그때, 새해 첫날부터 자신을 보며 이죽이죽 웃던 이복 오빠 상현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온갖 추측과 비약이 헤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불필요한 상념들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들을 쫓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눈앞의 위기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간곡한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의 차는 양옆에서 쫓는 검은색 차들에 막혀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살짝만 차선을 변경하려 해도 득달같이 따라와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게다가 더욱 불쾌한 것은 두 차량 모두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두 사람이 탄 차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위협적으로 도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독경이 분한 듯 짙게 탄식하며 가속 페달을 꾹 눌렀다. 그러나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나란히 따라온 차들이 토끼몰이를 하는 사냥개처럼 독경과 주인이 탄 작은 차를 번갈아 가며 몰아붙였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불끈 솟았다.

“이대론 안 되겠어요. 선배, 꽉 잡아요.”

“뭘 하려고?”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양손으로 손잡이를 힘껏 잡았다.

독경이 가속 페달을 짓이기듯 밟으며,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자 검은 차들도 덩달아 속도를 높였다.

그는 상대가 앞으로 치고 나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이 자신을 추월하는 순간,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를 시도했다.

끼이이이이이익!!

한적한 도로를 갈가리 찢듯 타이어의 마찰음이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미처 속도를 늦추지 못한 검은색 차량들이 멀찍이 앞으로 나갔다. 그 틈을 타 독경이 운전대를 빠르게 꺾으며, 반대 차선으로 차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 됐다!”

주인이 막힌 숨을 탁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아니요,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그가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상대 차들 또한 금세 방향을 바꿔 맹렬하게 추격해 왔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기이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체념, 후회 같은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자신의 숨통을 옥죄어 왔다.

“만약에, 만약에 잡히더라도...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널 꼬드겨서... 이런 일을 하게 만든 거야.... 알겠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독백하듯 읊조리는 주인을, 독경이 처음으로 성난 얼굴로 쏘아보았다.

어느새 미지의 추격자들은 두 사람의 뒤를 완벽하게 따라잡았다.

태산처럼 거대하고 묵직한 바위가 뒤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제 절망감으로 무기력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늪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런 위험 속에, 오로지 제 욕심만으로 아무 상관 없는 독경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 더해졌다.

그동안에도 상대 차들은 두 사람이 탄 차의 뒤쪽 범퍼를 연신 들이받으며 공격했다.

한번 놓쳤다 따라잡은 후라 그런지, 반응은 더욱 집요하고 신경질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차체가 더욱 덜컹거리며 세차게 흔들렸다.

그렇게 잠시간 옴짝달싹못한 채 달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반대 방향 차선에서 대형 화물차 한 대가 두 사람을 향해 돌진했다.

“선배!”

“이독경!”

독경이 달려오는 차를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운전대를 크게 꺾었다. 하지만 뒤쫓던 검은 차 한 대에 부딪혀 막히면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무방비한 채로 멈춰 선 두 사람의 차를 화물차가 고스란히 덮쳤다.

끼이이익!! 쾅!!

높고 날카로운 타이어의 마찰음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이 폭발하듯 터졌다.

독경과 주인이 탄 차가 종잇장처럼 파삭 구겨졌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창 너머로 피로 범벅된 두 사람의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주 작은 숨소리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흉흉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뒤따르던 검은색 차량 중 하나에서 한 사람이 얼이 빠진 얼굴로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운전석 쪽에서 또 다른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다.

“X발.... 난 그냥, 겁만 좀 주려던 것뿐이었는데....”

남자가 질린 기색으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주인과 독경이 탄 차로 엉거주춤 다가갔다.

“사, 상현아.... 우, 우리 이제 어떡하지...?”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러자, 주인의 이복 오빠 상현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X! 일단, 여기부터 떠야지.”

퍼뜩 정신을 차린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곤란하고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줄 사람을, 상현은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서 주변에 목격자가 있는지 빠르게 살피며, 휴대 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저 상현인데요.... 해결해 주셔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격앙된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목소리가 기묘하게 고요한 공기 속에서 강석의 귓가에 닿았다.

무척이나 좋지 않은 징조였다. 강석은 피로에 찌들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위치를 물었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