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18화 (18/76)
  • #18화. 탈출 (1)

    독경의 전화를 받았을 때, 주인은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위태로운 불안과 공포가 폭풍처럼 자신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간신히 쥐어짜던 인내심도 바닥나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

    다음 날, 주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같은 시각에 외출했다. 안에서는 현 회장과 강석이 한창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대화가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자 그녀는 정문을 나서기 무섭게, 택시를 잡아탔다. 그러고는 따라오는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곧장 독경의 집으로 향했다.

    “선배, 이 시각에 웬일....”

    막, 문을 열고 나오던 독경이 그녀를 맞닥뜨리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주인이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서며 자신을 제물로 바치듯, 그에게 몸을 던졌다.

    “이독경!”

    갑작스러운 포옹에 독경은 다리를 휘청이며, 주인을 끌어안은 채 뒤로 넘어졌다. 그녀의 길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하하! 뭐예요, 선배.”

    독경이 유쾌한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긴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어 올렸다. 주인이 몸을 일으키며 애절하게 말했다.

    “오늘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나랑 있자.”

    그제야 그는 그녀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웃음기를 거뒀다. 지그시 치켜뜬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나 참, 나야 좋죠. 선배는요?”

    “나도 좋....”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독경은 그녀의 뒷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꽉 붙들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진하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불쑥 침입한 두툼하고 단단한 혀끝이 말캉한 입안을 샅샅이 훑더니, 이내 그녀의 혀를 뿌리째 옭아매기 시작했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양, 비장하고 저돌적인 움직임이었다.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 있던 주인을 어느새 바닥에 눕힌 그가, 그녀의 스웨터를 끌어 내리며 가는 목덜미와 도드라진 쇄골을 차례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으음....”

    주인이 손등으로 제 입을 가리며 신음했다. 그러자 독경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가 부끄러워요? 소리 내도 돼요.”

    그가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손으로 상의를 들췄다.

    옷을 벗기면서도 독경은 주인의 헐떡이는 가슴과 윗배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거친 호흡에 맞춰 출렁이는 유방이 반지르르한 푸딩처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입맛을 다신 그가 가슴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으로 탱글탱글한 촉감이 몰려들었다.

    잠시 그 감각을 만끽하던 독경이 이내 혀로 유두를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을 치다, 아이처럼 입술을 모아 쪽쪽거리며 빨기 시작했다.

    “흐응....”

    주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닳을 것처럼 집요하게 가슴을 공략하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오늘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작정이었다. 저 자신을 바쳐서라도 갈급하게 얻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바로, 이독경이었다.

    “뒤돌아봐요.”

    오늘따라 너그럽게 행동하는 상대를 빠르게 파악한 독경이 제 웃통을 벗으며 뻔뻔하게 요구했다.

    주인이 들린 셔츠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난 잘 짜인 근육을 멍하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우윳빛의 매끈한 등과 잘록한 허리가 어둑한 공기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가 예술품을 감상하듯, 홀린 눈으로 물끄러미 보다 자연스럽게 몸을 굽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깊게 팬 등줄기에 입을 맞추며 혀로 핥아 내려갔다.

    “으흣!”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배 속이 간질거렸다. 주인이 바닥에 얼굴을 파묻고는, 허리를 팽팽하게 곧추세웠다.

    “아, 이독경....”

    그녀가 달뜬 숨결로 제 이름을 부르자, 독경은 더욱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그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가녀린 허리를 양손으로 꽉 그러쥐며 제 하체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탐스러운 둔부와 그의 빳빳한 성기가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것이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원래 하나였으나, 몹쓸 저주로 갈라져 서로를 찾아 헤매다 이제야 만난 것은 아닐까? 마치 ‘향연’ 속 이야기처럼 말이다.

    “선배, 오늘은 안 봐줄 거예요.”

    독경이 입안을 으득 씹으며 중얼거렸다.

    마침내 찾은 반쪽을 곱게 보듬기만 할 만큼 그는 상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받으려 더욱 욕심 사납게 날뛰는 쪽에 가까웠다.

    밖으로 줄줄 흘러넘치는 욕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은 대답 대신, 그저 간신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동의를 받아 낸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봉긋하게 올라 있는 엉덩이 사이로 묵직해진 성기를 거칠게 문지르며 안쪽을 쿡쿡 쑤셨다.

    “아아, 선배....”

    그가 그녀의 치마를 다급하게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속옷을 벗기지 않고 한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촉촉이 젖은 음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경이 거침없이 제 얼굴을 처박더니, 혀를 내밀어 흐르는 애액을 핥았다. 신들이 마신다는 넥타르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성에 찰 리 만무할 그가, 이내 쭉쭉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차게 액을 빨아들였다.

    “아앗! 왜 그걸....”

    주인이 황급히 뒤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외쳤다. 등 뒤에서 들리는 젖은 소음이 이토록 부끄럽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가 번들거리는 입술을 떼며, 나직이 읊조렸다.

    “다 내 건데, 뭐 어때요. 선배 건 이제 다 내 거예요. 우린 처음부터 하나였거든요.”

    어딘가 아리송한 선언이었으나, 그녀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더 이상 불안하고 조급하지 않았다.

    “그래, 다 네 거야. 네가 내 것인 것처럼.”

    독경의 켜켜이 쌓인 먼지 같은 탁한 눈과 주인의 심연처럼 맑고 깊은 검은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대뿐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았다.

    그가 굽혔던 상체를 곧게 펴며 짓궂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맞아요. 내 털끝 하나까지 다 가져요. 불사르든 씹어 먹든, 그건 선배 마음대로 하고.”

    그 뒤 독경이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한 손으로 슥 넘기더니, 바지를 풀며 빳빳하게 부푼 성기를 꺼내 쥐었다.

    “후, 덤으로 이것도 줄게요.”

    주인이 선명히 돋은 핏줄이 꿈틀거리는 성기와 야릇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답했다.

    “좋아.”

    그녀의 대꾸에 그가 두 눈을 번뜩이며, 입술을 혀로 탐욕스럽게 축였다. 그러고는 입구를 찾아 맞추더니, 그 안으로 제 것을 푹 찔러 넣었다.

    “아흑!!”

    뜨겁고 단단한 이물감이 아래에서 느껴지자, 주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독경은 이 순간만을 고대한 사람처럼 쉴 틈 없이 몸을 밀어붙였다.

    “아... 아응....”

    교태 섞인 그녀의 신음에 그가 엉덩이를 양손으로 꽉 비틀며, 더욱 격정적으로 허리를 치댔다.

    “하... 선배.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으읏, 나도....”

    정수리를 꿰뚫고 들어오는 쾌락에 두 사람 모두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저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짐승처럼 흘레붙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신음이 한데 뒤엉켜 좁은 자취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선배. 후, 안에다 해도 돼요...? 하고, 싶어요....”

    독경의 갈급한 목소리가 주인의 귓가에 닿았다.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이뤄 주고 싶었다. 그럴 각오로 여기까지 왔기에....

    “하아, 오늘은... 괜찮은 날이야.... 그렇지만 오늘만, 오늘만이야....”

    그녀가 한숨 사이로 소곤거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여린 상반신을 일으켜 껴안더니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를 야만적으로 물어뜯으며 허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아흣, 읏!!”

    이윽고 절정의 순간에 도달했다.

    독경은 자신의 굵직한 팔로 바르르 떠는 그녀의 어깨를 부서질 듯 끌어안으며,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내벽에 쏟아부었다.

    주인은 이제 진짜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진, 유일한 존재가 됐다.

    잠시 후, 독경은 기진맥진해 있는 주인을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겼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더 그녀를 몰아붙인 다음에야, 조금 만족스럽게 몸을 뗐다.

    주인이 늘어졌던 팔을 들어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독경이 생수병을 내밀었다.

    “마셔요.”

    그렇지 않아도 입안이 바싹 말랐던지라, 그녀는 가볍게 목을 축이고는 병을 돌려주었다.

    독경이 남은 물을 단숨에 비우고는, 종잇장처럼 가녀린 몸을 뒤에서 부둥켜안았다. 그녀가 그에게 풀썩 기댔다.

    두 사람은 몸을 포갠 채, 벽에 기대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침부터 잔뜩 흐리던 하늘은 늦은 오후가 되자,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비였다.

    고요하고 어둑한 실내에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나른함이 밀려왔다.

    “이독경.”

    주인이 나직하게 그를 불렀다. 독경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간질이듯 답했다.

    “네, 선배.”

    “우리, 진짜로 도망갈까?”

    그가 숨도 쉬지 않고 곧장 반응했다.

    “그럼, 날 두고 혼자 가려고 했어요?”

    “난 진지해.”

    잔망스러운 투정에 주인이 짐짓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독경이 피식 웃었다.

    “난 단 한 번도 선배한테 진지하지 않은 적 없어요. 잘 알지 않나?”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늘 그렇듯 의뭉스러울 만큼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마주쳤다.

    주인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 모아 둔 돈이 좀 있어. 물론 넉넉하진 않지만....”

    “그런 거라면 나도 보탤 수 있어요. 생활비로 쓰려고 모은 돈이랑 이 방 보증금을 더하면 괜찮을 거예요.”

    독경은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상대가 예상보다 더 적극적이자, 주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죄책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랑 같이 가면 고생할지도 몰라. 여기보다 더 좁고 더러운 방에서 지낼 수도 있고, 종일 일만 하느라 고단할 수도 있어.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입에 안 맞고, 모든 게 낯설고 두려울 거야. 어쩌면, 이곳이 다시 그리워질 만큼....”

    “선배랑 함께하면 괜찮을 거 같은데....”

    독경이 낮은 음성으로 혼잣말을 했다. 주인이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뗐다.

    “잘 생각해. 후회하지 말고. 나랑 있는 게 지옥 같아질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

    “정말이지 선밴, 날 하나도 모르네요.”

    그가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내뱉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설령 천국에 있더라도 선배가 없다면, 거긴 그냥 나한테 지루한 감옥이에요. 마찬가지로 내가 지옥에 떨어져도 선배가 옆에 있다면, 거기가 바로 낙원이죠.”

    무뚝뚝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하다니, 참 알다가 모를 인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독경, 넌 좀 이상한 것 같아....”

    주인이 솔직한 감상을 드러냈다.

    “하하, 그런가요?”

    독경이 그녀의 뺨에 대고 중저음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넓은 몸통이 웃음소리를 따라 울렸다. 그 진동이 고스란히 그녀의 등에 닿았다.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

    며칠 뒤, 주인은 독경을 끌고 백화점에 갔다. 그러고는 이 매장 저 매장을 둘러보며 한참을 신중하게 옷을 고르더니, 그의 앞에 대 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독경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옷 한 벌 사려고. 여권 사진 찍어야지.”

    그녀의 심상한 대답에 약간 꽁하던 기분이 풀린 그가, 씩 웃으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주인이 이번에는 민트색 셔츠를 가져와 곧게 편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음....”

    독경이 순순히 그녀에게 자신을 맡겼다. 주인은 셔츠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어깨너비와 팔 길이를 옷과 대조해 보더니, 이내 활짝 미소 지었다.

    “예쁘네, 이거 한번 입어 보자.”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으로 그 말을 내뱉는 자기 얼굴이 더 예쁜 주제에, 따위의 생각을 하며 독경은 셔츠를 가지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어머! 원체 체격이 좋으셔서 그런지,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를 향해 매장 직원이 호들갑을 가장한 진심을 표했다.

    주인도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독경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매번 어두운색 옷만 입어서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잘 어울린다. 앞으론 밝은색 옷도 많이 입어야겠어.”

    “그런가요? 다음에 또 골라 줘요.”

    칭찬이 싫지 않은 그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고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고는 식사 때에 맞춰 예약해 둔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학교와 카페 외의 장소에서 단둘이 처음으로 갖는 데이트다운 데이트였다.

    “윤희 선배한테는 얘기 안 할 거예요?”

    독경의 송곳 같은 질문에 후식으로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입가에 가져가던 길고 하얀 손이 우뚝 멈췄다. 주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후회, 안 하겠어요?”

    독경이 그녀의 음울한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주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응.”

    윤희에게는 미안했지만, 주인은 섣불리 계획을 밝힐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이 순간을 오래도록 고대해 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저 이독경조차도 말이다.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주인은 그에게까지도 최종 목적지를 절대 밝히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절차와 서류는 가급이면 혼자 준비했다.

    독경 또한, 어디로 가는지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안다 한들, 자신의 마음이 바뀔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녀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군말 없이 처리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빠르고 조용히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이 왔다.

    ***

    독경은 창 앞에 서서 어슴푸레 밝아 오는 하늘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나마 얼마 없던 짐마저 다 뺀 자취방은 썰렁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는 그마저도 좋았다. 어쩐지 홀가분하고 후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싸늘한 새벽녘의 공기를 느긋하게 들이마시며 상념에 잠겼다.

    주인은 시종일관 담담하게 제 과거를 털어놓았지만, 독경은 그녀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악몽 같은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 정도도 눈치 못 채면, 자격이 없지....’

    그래서 그는 약간 불안했다.

    그녀가 언제, 어떻게, 어딘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늘 가슴 한쪽에 도사리고 있었기에.

    하지만 주인은 예견과는 달리, 몹시도 성에 차는 제안을 건넸다.

    “우리 이대로 떠날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단둘이....”

    그 순간 느껴지던 벅찬 환희를 독경은 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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