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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17화 (17/76)
  • #17화. 추적

    상현이 무슨 낌새를 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 헛일은 아닐 것이라고 강석은 생각했다. 원래 변변치 않은 자들일수록, 남의 약점에 민감한 법이었으니까.

    더구나 상현은 이상하리만치, 열 살이나 어린 이복 여동생을 의식하고는 했다.

    자신과는 달리 모범생에다 공부도 곧잘 하는 그녀를, 제 부친이 어여쁘게 여길 것이라 믿는 모양이었다. 실상은 전혀 반대였지만 말이다.

    강석은 주인이 명문대에 입학한 날, 술을 진탕 퍼부으며 신세 한탄을 하던 상현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맡은 일은 처리해야 했기에, 그는 운전석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고는 주인이 일하는 카페 앞을 주시했다.

    잠시 뒤, 날렵한 체형의 여자가 다가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녀는 흰색 운동화에 캔버스 가방을 든 수수한 차림이었으나,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미인이었다. 현주인이었다.

    하지만 강석은 화려한 이목구비보다 특유의 분위기로 그녀를 알아보았다. 고분고분한 모범생처럼 굴었으나, 온몸에서 풍기는 거친 반항기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본가에 들어온 열두 살 때부터, 주인은 그를 ‘실장님’이라 깍듯하게 불렀다.

    강석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에게 그렇게 불릴 때마다,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랬다. 주인은 그 시절부터 이미,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조숙하고 영민했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조금은 해맑고 철없는 성격이었다면, 이렇게 겉돌지는 않았으리라. 똑똑한 주인을 현 회장은 못마땅하게 여겼고, 상현은 열등감을 느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와 그녀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강석은 집에서와는 달리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는 주인을 보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김윤희일 것이다. 집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얼굴이었다.

    나란히 선 안경을 쓴 하얀 얼굴의 남학생은 윤희의 남자 친구 서원우이리라.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석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이는 순간, 낯선 인물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렇지 않아도 선이 짙은 얼굴을 더욱 부각했다.

    잘생겼지만 어딘가 냉랭한 위협감이 드는 외모였다.

    하지만 강석의 주의를 끈 것은 남자의 조각 같은 얼굴이 아니라 눈이었다.

    잘 벼린 칼날처럼 가로로 긴 예리하고 서늘한 눈이 오로지 맹목적으로 주인만을 좇는 것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흥미롭군....”

    사냥개가 불온한 냄새를 맡았다.

    강석이 차 안에서 네 사람을 더욱 날카롭게 주시하는 동안, 그들은 길가에 서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법한 활기차고 명랑한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냥개에게 그런 것은 관심 밖이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골몰하며 동향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사이 네 남녀는 할 말을 마쳤는지, 인사를 나누고는 각자 흩어졌다.

    윤희와 원우는 지하철역 방향으로 향했고, 주인과 낯선 청년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강석이 카페 통창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어딘가 몹시 건방진 인상의 남학생 또한 그곳에서 일하는 모양이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나온 그가 탁자와 의자들을 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잠시 그 광경을 지그시 관찰하던 강석이 이내 차를 돌렸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

    다음 날 오전, 강석은 카페를 다시 방문했다.

    카페 내부는 잘 정돈된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꽃과 관상목들이 여기저기 배치돼 있어 마치 안락한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는 계산대 앞에서 메뉴를 고르는 척하다 한국대생으로 보이는 점원에게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저녁에 일하는 남학생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어조는 정중했으나, 거칠고 탁한 목소리 탓인지 점원은 약간 몸을 움츠렸다.

    “네? 혹시 키가 큰 남자분 얘기하시는 건가요? 그럼, 아마 맞을 텐데....”

    “그 학생 한국대 다닙니까? 제가 신세를 진 게 있어서, 이름을 좀 알고 싶군요.”

    “아, 네. 아마, 이독경인가 그럴 거예요. 저녁 시간에 일하시는 분들이 다 경영학과 학생인 걸로 알고 있어요.”

    “무슨 일로 저희 알바생을 찾으시나요?”

    그때, 창고 문이 슥 열리며 중년의 여성이 나오더니, 두 사람의 대화를 툭 끊었다. 사장인 수연이었다.

    그녀가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꿋꿋이 고수하는 검은 양복의 사내를 진중하게 경계했다. 강석이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어쩐지 수월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잠시 망설이던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빠르게 훑은 수연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명함과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태성그룹 실장님께서 독경 학생은 왜 찾으시는 거죠?”

    그 말에 강석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세한 얘긴 일단 앉아서 하시죠.”

    강석과 수연은 볕이 잘 드는 카페 한 귀퉁이에 마주 보고 앉았다. 정갈한 자세로 기다리는 그녀를 향해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주인 학생은 저희 회장님께서 느지막이 얻으신 귀한 따님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래저래 걱정이 많으시죠. 주변 친구들은 누군지, 어떤 학생들인지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걱정을 풀어 드리고자 제가 나선 겁니다.”

    당사자인 주인이 들었다면 기함할 만한 발언을 천연덕스럽게 쏟아 내는 강석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인이 직접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지만 집안이 매우 엄격하다는 것쯤은, 수연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른의 감이었다.

    게다가 허울 좋은 단어로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성인인 딸을 뒷조사하겠다는 뜻 아닌가. 어떤 정신 나간 집이 그런 일을 벌인다는 말인가.

    그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아르바이트생에 대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알더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수연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대로 야박하게 내쫓기는 애매했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까지 헛걸음하셨으니, 커피나 한잔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몇 분 뒤, 그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그 커피는 강석이 지금껏 마신 것 중, 가장 풍미가 훌륭했다.

    방해꾼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별 소득 없이 물러난 강석은 휑한 후문을 지나 경영학과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방학이라 그런지 과방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음, 어쩐다.... 행정실로 가 볼까?’

    문 앞에 우뚝 선 채로 잠시 갈등하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여긴 어떻게 오셨는지...?”

    그가 몸을 슬쩍 돌리니, 복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강석이 낮게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경영학과 학생들?”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세요?”

    남학생 중 한 명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음, 혹시 같은 과 학생 중에 이독경이라고 아나?”

    예상 밖의 질문에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때, 그들 뒤에서 건들거리며 다가오던 또 다른 남학생이 방자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 새낀 왜 찾으세요? 또, 사람 팼나?”

    제법 험상궂은 인상을 한 남학생의 한쪽 뺨에는 긁힌 것 같은 상처가 옅게 나 있었다.

    강석이 담배를 입에 슬며시 물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뭐, 비슷해.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울까?”

    “그러시죠.”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냉소적으로 올리며 순순히 응했다. 그는 독경이 두들겨 팼던 3학년 선배였다.

    ***

    일을 마치고 주인을 역까지 바래다준 뒤, 집에 돌아온 독경은 문을 여는 순간 낯선 기운을 감지했다. 방 안에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 풍겨 나왔던 것이다.

    주인을 위해 담배를 끊은 지 이미 반년이 넘은 그였기에, 집 안에 잔향이 남아 있을 리는 없었다. 거기다 이 냄새는 자신이 피우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였다.

    “누가 왔다 간 모양이군.”

    독경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 침입자가 들어왔음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그는 신발장 앞에 서서 불을 켠 뒤, 내부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비좁은 원룸은 외출하기 직전 모습, 그대로였다. 도둑이 든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방바닥 한가운데 아주 흐릿한 구둣발 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성인 남성용 신발인 것 같았다.

    독경의 기다란 눈이 음험하게 가늘어졌다. 머릿속에 침입자의 행동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쥐새끼처럼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주제에, 남자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작은 방 한가운데 우뚝 섰으리라.

    그러고는 느긋하게 담배를 태우며 번뜩이는 눈으로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겠지.

    “뭘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을까?”

    독경이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장면 몇 개가 퍼뜩 지나갔다.

    매번 이 방을 나서기 전, 제 흔적을 지우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주인의 모습을. 그녀는 분명, 자신을 쫓는 자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심성 탓에 추적자는 별 소득 없이 돌아섰을 것이 분명했다.

    주인이 얼마나 능숙한 도망자인지 독경은 새삼 실감하며, 천천히 휴대 전화를 들었다. 몇 번의 연결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사냥개가 눈치를 챈 모양이에요.”

    그 불길한 전언에 수화기 너머에서 숨 막힐 듯 진한 탄식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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