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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16화 (16/76)
  • #16화. 꼬리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인파로 놀이공원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여도 새해를 맞는 기대감 탓인지, 함께 있다는 설렘 때문인지 독경은 그리 불편하거나 성가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들뜨고 신난 분위기에 서서히 동화되는 것도 같았다.

    윤희와 원우가 신나게 떠들며 앞장서 걷는 동안, 그는 느긋하게 뒤를 따르며 주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큼지막한 손을 맞잡았다.

    새해맞이 행사가 한창인 놀이공원에서는 경쾌한 음악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중이었다. 형형색색의 불빛들도 캄캄한 허공을 현란하게 수놓으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그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독경은 눈앞에서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늘 어딘가 경직됐던 그녀는 긴장을 푼 채 꿈을 꾸듯 아련한 눈길로 그를 마주 보았다.

    물기 어린 크고 까만 눈이 일렁거리며 다가왔다.

    공기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롭게.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영롱하게.

    “예쁘다, 그렇지?”

    주인이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독경도 따라 웃었다.

    “네, 진짜 예쁘네요.”

    물론, 그가 지칭하는 대상은 놀이공원이 아니었다. 속뜻을 알아챈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이독경, 넌 가끔 팔불출 같아....”

    “전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요?”

    독경이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잔망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능청스러운 그 모습에 주인이 다시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 광경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윤희가 흐뭇한 얼굴로 응시했다.

    원우는 예상보다 훨씬 더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으나, 이내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독경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주인과 제법 잘 어울린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활짝 미소 짓는 주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윤희야, 우리 추로스 사러 갈까? 저 두 사람 것도 같이.”

    원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윤희에게 말을 걸었다.

    “응! 그러자!”

    윤희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남자 친구에게 팔짱을 끼었다.

    네 사람은 공원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 위에 서서 추로스와 핫초코를 먹었다. 머리에는 이미 동물 귀 모양의 머리띠를 하나씩 쓴 뒤였다.

    원우와 윤희가 장난삼아 동물 머리띠를 사 왔을 때, 독경은 짜증스러운 눈빛을 쏘며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주인이 직접 골라 씌워 주려 하자, 투덜대면서도 순순히 머리를 내밀었다. 윤희가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놀렸다.

    “원우야, 우리 화장실 갔다 올게. 여기서 기다려.”

    윤희가 주인과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응, 빨리 갔다 와. 조금 있으면 타종 시작할 거야.”

    안경 너머로 원우의 선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해사한 얼굴을 독경이 빤히 관찰했다. 남겨진 두 남자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깬 사람은 의외로, 독경이었다.

    “원우 선배, 고맙습니다.”

    “음? 뭐, 뭐가?”

    원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후배의 오뚝 솟은 콧날을 힐끗했다.

    “선배 덕분에 오늘 좋은 추억이 하나 생겼으니까요.”

    독경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억센 인상이 이때만큼은 꽤 유순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사를 받은 원우가 어쩐지 몹시 민망해진 나머지, 딴청을 피우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아, 저기 애들 온다!”

    원우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자 윤희가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이제 곧 카운트다운 한대. 우리 빨리 사진 찍자!”

    네 사람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은 뒤, 다른 이들처럼 큰소리로 숫자를 셌다.

    “3, 2, 1, 해피 뉴 이어!!”

    거대한 환호성과 동시에, 폭죽과 불꽃이 까만 하늘 위로 펑펑 터졌다. 독경이 주인의 귀에 대고 나긋하게 소곤거렸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주인 선배.”

    “너도, 이독경.”

    그녀가 겨울 밤바람에 차가워진 그의 뺨에 제 볼을 살포시 포갰다.

    “오늘은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그래도 되죠?”

    “음, 그럴까?”

    독경의 제안에 주인은 신중하던 평소와는 달리, 조금 방심하고 말았다.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기에, 그들은 아직 푸르른 청춘이었으므로.

    ***

    네 사람은 공원 입구에서 헤어졌다.

    윤희와 원우를 태운 택시가 출발하자, 주인은 곧바로 시각을 확인했다. 시각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 시각에 들킬 리는 없겠지?’

    그녀는 약간 불안했으나, 독경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쯤 그에게 제대로 배웅을 받아 보고 싶었기에.

    “선배, 타요.”

    독경이 그사이 도착한 택시 문을 열었다.

    차 안에서도 두 사람은 깍지 낀 손을 놓지 않았다. 주인이 널찍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독경이 그런 그녀의 정수리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조금만이라도 더 온전히 서로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택시는 무심하게 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근처에 차를 세운 뒤, 함께 내렸다.

    집까지는 조금 더 가야 했지만, 골목 입구에서 헤어지는 편이 나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가로등 아래 선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집에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독경이 나직이 답했다.

    “그래, 그럼. 오늘 즐거웠어.”

    “저도요.”

    입으로는 안녕을 고하고 있건만, 아직 헤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맞잡은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독경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주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온몸에서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그녀가 그의 등허리를 상냥하게 토닥였다.

    “내일 봐.”

    “네....”

    독경이 마지못해 포옹을 풀며 맥없이 대꾸했다. 그러고는 어둠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상현은 잘 켜지지 않는 라이터 때문에 짜증스러웠다.

    술도 깰 겸 정원 한구석에 서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려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으니 성질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에이, X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어떻게든 성과를 내 부친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몹시 부아가 치미는 그였다. 쌓이는 걱정과 불안 탓인지 술만 느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찌어찌 간신히 담배에 불을 붙인 상현이 몽롱한 표정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한밤중 골목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집 앞 골목을 죽 훑다, 길 끝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인영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호리호리한 몸 선의 여자가 불빛 아래서 짧은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X, 좋을 때다.”

    상현이 상스러운 웃음을 픽 흘리며, 한 쌍의 남녀를 주목했다.

    이별이 얼마나 아쉬운지 한참을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이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여자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점점 그의 쪽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상현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가까워지는 여자를 나무 그늘 속에서 주시했다. 이 동네에 사는 여자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다 여기며.

    그런데 이상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선명해지는 여자의 외관이 지나치게 익숙했던 것이다. 상현이 고개를 내밀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때, 여자의 얼굴이 새까만 장막 틈으로 설핏 드러났다.

    “하!”

    여자의 정체를 목도한 그가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야밤에 골목길 한가운데서 남자와 부둥켜안고 있던 여자가 다름 아닌, 제 이복동생이라니.

    얌전한 척,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이렇게 뒤에서 앙큼한 짓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제 어미를 닮아 멍청하긴....”

    상현이 폐 안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

    주인은 새해 첫날부터 몹시 불쾌했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상현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 눈빛과 미소가 음흉해서 그녀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제 이복 오빠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현관문을 나서는데, 정원 의자에 방만하게 앉아 담배를 태우던 그와 결국 맞닥뜨리고 말았다.

    “어이, 현주인.”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껄렁한 부름에, 모른 척 지나려던 주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상현이 반쯤 누워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며 물었다.

    “어디 가냐?”

    “아, 아르바이트요....”

    긴장한 모습을 들키기 싫었지만, 몸이 저절로 굳는 것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담배꽁초를 바닥에 툭 던지고는 보란 듯이 발로 밟아 뭉개며 다시 물었다.

    “그래? 성실한 학생이네. 꼰대가 좋아하겠다. 별일은 없고?”

    평소에는 관심은커녕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던 그가 안부를 챙기다니. 주인은 황당했으나, 뒤늦게 새해 첫날임을 깨닫고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저 늦어서 이만....”

    그 말에 상현이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 가 보라는 시늉을 했다. 주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얼마나 다급히 달렸는지 막 정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석과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어이쿠, 조심!”

    그가 잽싸게 몸을 옆으로 틀며 외쳤다. 주인이 얼굴을 푹 숙인 채 인사도 없이 좁은 틈으로 쑥 빠져나갔다.

    평소답지 않게 무척이나 조급해 보이는 행동에, 강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돌계단을 올랐다. 그때,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그를 여상하게 맞았다.

    “아저씨, 오셨어요?”

    강석이 고개를 드니, 현 회장의 장남이자 집안의 골칫덩이인 상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음험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현주인 저 계집애가 요즘 뭐 하고 싸돌아다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강석이 비열한 미소를 만면에 띤 채 즐거워하는 상현을 선글라스 너머로 눈여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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