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밀회 (3)
“날씨 참 좋네.”
주인이 뿌연 창 너머로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갈까요?”
독경이 따라 앉으며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여기가 더 좋아.”
그가 가냘픈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작고 동그란 머리가 슬며시 기댔다.
“우리 이대로 떠날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단둘이....”
“좋은데요?”
독경이 주인의 어깨를 으스러질 듯 부둥켜안으며 속삭였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다 달콤했지만, 지금 한 그 말이 가장 감미로웠다.
“바닷가에다 작은 카페를 여는 거야. 난 커피를 내리고, 넌 서빙을 하고.... 어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주인이 소리 없이 웃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우리 사장님처럼 나이 들고 싶어....”
“잘 어울려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내가 이뤄 줄 거니까.”
독경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볼을 칭얼대듯 문대며 중얼거렸다.
유치한 상상에 실현 가능성 없는 약속이지만, 뭐 어떠랴.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잠시간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평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마음껏 만끽했다.
조금 뒤, 느긋한 평화를 깨고 주인이 말문을 열었다.
“이독경, 뭐 하나만 물어도 돼?”
“백 가지를 물어도 돼요.”
독경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민망스러운 말을 잘도 지껄였다. 주인이 잠시 미소를 짓다, 이내 웃음기를 거두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약간 머뭇거리다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그냥.... 생각해 보면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래서 궁금한가 봐.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음, 무척 바람직한 자세로군요.”
독경이 짐짓 근엄한 표정을 꾸며 내며 대꾸했다. 이런 관심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반응이 의외였기에 주인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 끝에, 독경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늘 그렇듯 어딘가 심드렁한 태도였다.
“어머닌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아버진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요.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됐거든요.”
“음, 그렇구나....”
대강이나마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본인에게 듣고 보니, 어쩐지 숙연해지는 주인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할 말을 고르는 동안, 그가 낮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심각할 필욘 없어요. 흔하고 뻔한 구질구질한 사연 중 하나니까.”
그 말처럼 독경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슬픔이나 절망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남의 일을 전하듯 무감하고 태평한 자세였다.
“아버지란 작자는 개망나니였어요. 도박에 빠져서 쥐꼬리만 한 재산을 탕진했으니까요.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친척이며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는, 결국 사채까지 끌어다 썼죠.”
“그럼, 넌? 넌 어떻게 생활했어?”
주인이 창백해진 얼굴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독경의 새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무저갱만큼이나 까마득하게 깊어 보였다. 허무와 고독이 그 안에 짙게 깔려 있었다.
“아버지가 몇 달에 한 번씩 나타나 준 돈으로요. 나중엔 그마저도 끊겼지만. 먼 친척분이 도와주시기도 하고,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도 받고. 뭐 그러다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저런 알바를 했죠.”
그녀가 연민 어린 눈길로 독경을 보며, 그의 각진 턱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주인은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를 가여워하거나 안타깝게 여긴 적이 없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불행과 고통을 짊어지고 산다고 믿었으므로.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에게만은 달랐다. 결핍과 상처로 얼룩진 과거가 꼭, 제 일인 것처럼 저리고 아팠다.
그것은 독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삶이 남들에 비해 더 괴롭다거나 처절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약간 성가시고 지겨운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애달픈 눈길과 다정한 손길을 느낀 순간, 그는 불행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불행이란 현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전, 자신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었다.
거칠고 삭막한 삶이었다. 의미도 목적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아온 순간들. 공부도,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어떤 목표가 있다거나, 성공 따위를 하고 싶어서 한 공부는 아니었다. 그저 그 시절, 가장 손쉽게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그것밖에 없었을 뿐이었다.
대학도 그랬다. 꼭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모두 다 가는 곳이니 한 번쯤 경험해 볼까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물론, 입학금으로 틈틈이 모아 둔 돈을 아버지라는 인간이 훔쳐 가면서 계획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한 해 동안 재수를 하며 다시 돈을 모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시작된 대학 생활은 평온했지만 동시에 따분했다.
주인과 친밀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독경....”
과거의 편린들을 되새기던 그를 주인이 불렀다.
“언젠가 네게 필요할 때....”
그녀가 잠시 쭈뼛거리다 혼잣말하듯 작게 읊조렸다.
“그때, 내가 너한테 가족이 돼 줄게.”
뜬금없는 말에 멍하니 주인의 얼굴을 응시하던 독경이 천천히 입술을 위로 말아 올렸다.
“지금 그 말, 청혼으로 받아들여도 되죠?”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닌데!!”
주인이 고개를 세차게 도리도리 저었다. 독경이 장난기 어리게 빙글빙글 웃더니,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댔다.
“선배,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글쎄....”
“사랑해요.”
주인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알아.”
잠시 그녀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슬며시 입술을 뗐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네요. 매번 데리러 오는 그 김 실장이라는 남자, 정확히 뭐 하는 사람이에요?”
감춘 비수를 꺼내듯 어딘가 예리한 독경의 질문에 주인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솔직하게 과거를 털어놓았으니, 그녀도 어느 정도 사실을 공유해야 했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공평할 테니.
그녀가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본가에 들어간 게 아마 5학년 때쯤이었을 거야....”
주인은 자신이 태성그룹 회장의 혼외자였다는 것, 나이 차가 큰 이복 오빠가 있다는 것, 김 실장이 부친의 오랜 충견이라는 것 등을 짤막하고 담담하게 전했다.
하지만 영민한 독경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감춰진 정보를 확실하게 간파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이 가리키는 귀결점까지도.
그것은 그녀가 그 집안에서 ‘불행’하다는 사실이었다.
***
어느덧, 뜨거웠던 여름 방학이 지나고 다시 개강을 맞았다.
독경과 주인은 학교에서는 같은 과 선후배로, 카페에서는 함께 일하는 동료로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는 그녀가 과외 아르바이트로 늘 바빴기에, 그는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려 낯선 동네를 기웃거리고는 했다.
그사이, 주인은 과외 일을 몇 개 더 늘렸다. 독경은 종종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 하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주인이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계절이 바뀌고 옷차림이 달라졌다. 이제 독경은 카페의 모든 메뉴를 혼자서도 능숙하게 제조할 수 있을 만큼 일이 손에 익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그러나 기침과 사랑은 숨길 수 없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비밀은 늘 그렇듯, 언젠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었다.
***
한 해의 마지막 날, 윤희와 원우가 느닷없이 카페로 들이닥쳤다.
“어허, 이렇게 불쌍한 중생을 보았나? 새해를 코앞에 두고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가련하고 어리석은 자들!”
윤희가 두 팔을 과장되게 쫙 펼치며 계산대 앞에 섰다. 뒤에서 원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여자 친구에게서 한발 거리를 두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주인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윤희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떠들어 댔다.
“내, 측은한 너희를 구제하기 위해 왔노라. 그러니 경배하라! 나를 찬양하라!”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어느새 주인 뒤에 바짝 선 독경이 옅게 실소했다.
윤희가 악동처럼 씩 웃은 뒤 종이 쪼가리를 꺼내더니, 그들 앞에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짠! 이것이 무엇이냐? 놀이동산 야간 이용권 되시겠다!”
입으로 자체 효과음까지 낸 그녀가 이번에는 약장수 흉내를 냈다.
“바로 바로, 서씨 가문의 장자 원우 군이 어렵게 구한 귀한 이용권이다, 이 말이야.”
윤희가 멀뚱히 서 있던 원우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그는 쑥스러운 기색에도 여자 친구의 장단에 맞추려, 주인과 독경에게 손을 흔들었다.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흠, 너무 늦어서 난 안 될 것 같은데....”
“선배가 안 가면 저도....”
두 사람이 한껏 띄운 분위기에 초를 쳤다.
“가만있어 봐, 이것들아.”
윤희가 제 친구를 가볍게 흘겨보고는, 휴대 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통화를 시도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윤희예요. 오랜만에 연락드려요. 잘 지내셨죠?”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주인이 영문을 모른 채 두 눈만 깜박이다, 이내 그녀의 통화 상대가 제 모친임을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윤희, 전화 끊어!!”
주인이 다급한 말투로 속삭였으나, 윤희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대화를 이었다.
“네네, 그럼요! 저희 부모님도 잘 계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계절 학기 수업을 듣는 중인데, 과제를 제출할 게 있거든요. 근데 이게 혼자서는 너어어무~ 어려워서 오늘 하루만 주인이 빌리면 안 될까요? 그럼요, 저희 집에서 할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호호.”
수화기 너머로 고상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네, 알겠습니다. 주인이 바꿔 드릴게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초조해하던 주인이 전화기를 억지로 받아 들고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 네.... 늦더라도 꼭 들어갈게요. 염려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통화가 끝난 뒤,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윤희가 친구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성공?”
“...이긴 한데, 다음에 또 이럼 혼난다.”
주인이 긴 팔을 쭉 뻗어 친구의 볼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꼬집었다.
“아얏! 그, 그래도 내 덕분에 놀고 좋잖아! 네 엄마가 나니까 허락하는 거지, 저 뒤에 시커먼 놈이면 허락하겠냐?”
윤희가 삿대질을 하며 버럭 성질을 부렸다.
그 말에 주인과 독경이 동시에 눈을 맞췄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자 자, 빨리 정리하고 가자! 우리가 마감 도와줄게!”
원우가 두툼한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쳐 놓으며 말했다. 윤희가 그 말을 거들었다.
“그래, 빨리 가자. 늦으면 추로스 못 먹는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