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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13화 (13/76)
  • #13화. 밀회 (1)

    그 뒤, 독경은 주인의 뒤를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오죽하면 두 사람 사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윤희조차 못 볼 꼴을 봤다며 진저리를 칠 정도였으니까.

    물론, 당사자인 그는 주변의 반응 따위에는 일절 관심 없었다. 거침없는 성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치는 것 또한 아니었다. 독경과 주인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의 관계를 노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평소에는 조금 수상할 정도로 친밀한, 선후배 사이처럼 지냈다.

    이런 상황이 독경에게는 그리 마뜩하지 않았다. 눈빛 하나, 행동 하나 신경 쓰며 조심해야 하는 처지가 때로는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럴 때면 차라리 둘의 관계를 속 시원히 드러낼까 하는 오기가 불쑥 치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장, 그런 불만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선배가 원하지 않으니까....’

    그랬다. 주인과 첫 키스를 한 그날 밤, 독경은 그녀에게서 어떤 두려움을 읽었다.

    그 감정이 자신에 대한 것인지, 느닷없이 닥친 상황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연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토록 완벽한 사람에게도 불안과 공포가 존재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납득했다. 자신처럼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서움도 없다. 하지만 주인처럼 많은 것을 손에 쥔 이는 사방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할 수 있다면, 그 위험을 대신 감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독경은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별로 상관없었다.

    주인이 자신의 입으로 선언했기에. ‘이독경은 제 것.’이라고. 그래서 그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것이 됐다.

    강의실 구석 자리에 앉아 창가를 내려다보며 ‘그날’을 되새기는 독경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창밖에 머물던 시선을 손목시계로 옮겼다. 잠시 후면, 주인을 만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업을 모두 마친 뒤, 그녀가 일하는 카페로 향하는 것이 어느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독경이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을 챙기고는 건물을 나섰다.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큰 보폭이 더욱 커졌다.

    그가 성큼성큼 학교를 빠져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독경에게는 일분일초가 황금보다도,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귀했다. 주인이 엄격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늘 일찍 귀가했던 탓이다.

    밤새 사랑을 속삭여도 부족할 때건만, 두 사람은 항상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는 짧은 대화를 나누며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게다가 오늘은 그마저도 건너뛰었다. 주인이 점심시간에 학생회 회의에 참석하느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오늘따라 유독,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딸랑.

    문을 열고 카페에 들어서자, 향긋한 커피 냄새가 독경의 코끝을 스쳤다.

    막 도착했는지 계산대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주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경쾌하게 인사했다.

    “왔어?”

    “선배, 언제 왔어요?”

    독경이 계산대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나도 방금 왔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네.”

    그가 카드를 내밀며 답했다. 카드를 받은 주인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소곤거렸다.

    “저녁 안 먹었지? 이따 시간 나면 샌드위치 만들어 줄게.”

    독경이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리에서 풍기는 라벤더 향기가 감미로웠다.

    “독경 학생 왔네?”

    그때, 디저트를 포장 중이던 중년의 여인이 우아한 목소리로 알은체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그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혹시 단 거 좋아해요? 이번에 새로 만든 쿠키인데, 평가해 달라고.”

    그녀가 주인과 독경에게 갓 구운 쿠키를 한 개씩 건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카페 사장인 정수연은 주인처럼 화려한 인상은 아니었으나, 아기자기한 이목구비가 담백하고 선한 느낌을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사장님, 맛있어요! 전보다 훨씬 고소한데요?”

    주인이 쿠키를 한입 베어 물고는 방긋 웃었다. 독경도 입안에서 바삭바삭 부서지는 파편들을 곱씹었다.

    “전, 너무 달지 않아서 좋습니다.”

    두 사람의 호평에 수연도 즐거워졌는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견과류 비율을 좀 높여 봤어요. 반응이 좋아서 기쁘네. 독경 학생은 조금만 기다려요. 주인 학생이 금방 커피 내려 줄 거야.”

    “네, 감사합니다.”

    독경이 인사를 건네고는 자신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창가 옆 탁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수연이 주인에게 은근슬쩍 접근했다.

    “두 사람, 정말 사귀는 거 아니에요?”

    호기심 어린 질문에 당사자가 펄쩍 뛰며 부인했다.

    “아니에요, 사장님! 그냥 친한 후배예요!”

    “흠, 정말?”

    수연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주인이 빠르게 항변했다.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저, 물품 배달 온 모양인데요.”

    그때, 독경이 두 여자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 말에 수연과 주인이 동시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택배 기사가 카페 앞에 차를 대고는 부지런히 상자를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참, 오늘 주문한 물건 오는 날인데 깜박했네.”

    수연이 팔을 걷어붙이며 발을 내딛는데, 독경이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사장님, 제가 옮기겠습니다. 창고에 갖다 놓으면 되죠?”

    “아니야, 손님한테 어떻게 일을 시켜. 그냥 내가....”

    수연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럼, 쿠키 잘 얻어먹은 보답이라 생각하세요.”

    그가 씩 웃으며 다부진 팔뚝을 슬쩍 드러냈다. 주인이 옆에서 몇 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물건은 저희가 옮길게요. 사장님은 여기 계세요.”

    수연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주인과 독경이 방긋 웃으며 밖으로 나가더니 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인이 제 몸집보다 큰 상자를 번쩍 들어 올리자, 독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빼앗고는 손바닥 크기의 상자를 툭 건넸다.

    그녀가 그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대는 모습이 카페 안에서도 훤히 보였다.

    “젊음이 좋긴 좋네.”

    수연이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풋풋하고 싱그러운 한 쌍의 남녀를 지켜보았다.

    잠시 뒤 물건을 옮기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주인과 독경 앞에 시원한 음료를 내밀며, 수연이 본론을 꺼냈다.

    “원래 이 시간에 일하던 친구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까지 내가 대신 거들고 있었거든요. 근데 앞으로 시간을 내기가 좀 힘들 것 같네. 괜찮으면 독경 학생이 해 볼래요?”

    아무 생각 없이 얼음을 오독오독 씹던 독경이 대답 대신, 옆자리에 앉은 주인을 슥 보았다. 마치 그녀의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주인이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이 친구가 카페 일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자 수연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주문이나 음료 제조는 주인 학생이 차차 알려 주면 될 테고. 그밖에 청소나 설거지는 손에 익으면 어렵진 않을 텐데, 좀 그런가요?”

    “아니요, 하겠습니다.”

    독경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수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학이 오면 주인과 만날 구실을 어떻게 짜내야 할지 골몰하던 그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게 됐으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조금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그렇게 독경은 낮볕이 목덜미를 따끔하게 내리쬘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

    주인과 함께 일하며 독경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더 알아냈다.

    그녀의 커피 취향은 진한 에스프레소라는 것,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기 위해 카페를 찾는 성가신 존재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는 것.

    그가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독경을 보며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질문을 던진 일이 시작이었다.

    “저, 평일에 일하는 긴 머리 여자분은 오늘 안 나왔나요?”

    독경의 건장한 체구에 압도된 것인지, 그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살기에 숨이 막힌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자는 잔뜩 위축돼 있었다.

    “그게 손님과 무슨 상관이죠?”

    딱딱하다 못해 퉁명스럽기까지 한 반응이었다. 그때, 막 창고 정리를 마치고 나온 주인이 옆을 지나치며 나직이 쏘아붙였다.

    “이독경, 친절!”

    그 말에 쳇 하는 소리를 작게 내뱉으며, 독경이 눈앞의 상대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주문하시죠?”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으나, 카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계산대 앞에 서서 보니 그들의 존재감은 더욱 두드러졌다.

    커피를 내리는 주인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는 남자 손님이라든가, 남자 놈이라든가, 남자 새끼들 같은 것 따위 말이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독경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심술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삐죽삐죽 돋았다.

    그는 보란 듯이 주인의 등 뒤로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자신의 우람한 몸통으로 그녀를 가려 버렸다.

    실내 어딘가에서 헉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꽤, 고소했다.

    독경은 성가신 것들을 더욱 약 올릴 의도로, 한 손을 탁자에 올리며 몸을 그녀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그러고는 작고 동그란 귓가에 대고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 메뉴는 이렇게 위에 휘핑크림을 얹는 거군요.”

    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훅 닿자, 주인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어? 응.... 그리고 이 위에 초콜릿 시럽을 뿌리면 돼.”

    “아, 그럼 이건 제가 해 볼게요.”

    그가 제 상체를 그녀의 등에 밀착시키며 어깨를 둘러 손을 내밀었다. 독경의 몸이 졸지에 주인을 등 뒤에서 껴안는 모양새가 됐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당사자는 빙긋 웃으며 시럽 통을 받아 들고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툭 불거졌다. 주인의 시선이 그 위에 빤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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