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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12화 (12/76)
  • #12화. 감옥 (2)

    그렇게 주인이 본가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건이 벌어졌다. 상현의 연인 중 하나였던 유명 가수가 임신을 했다며 찾아와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상대를 마주한 상현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잔인했다.

    “미친X,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상현 씨, 우리 제발 얘기 좀 해....”

    자신을 매몰차게 대하는 그를 붙잡으며, 여자는 화장이 번지도록 눈물을 펑펑 쏟았다.

    화면에서 보이는 인상과 달리, 그녀는 가련해 보일 만큼 순진했다. 상현이 코웃음을 쳤다.

    “야! 네가 진짜 임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 애가 내 앤지, 다른 새끼 앤지 증명할 수 있어? 괜히 그 핑계로 자리 차지할 생각은 하지도 마.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시도한 수법이니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박은아와 옆에 서 있던 주인을 쏘아보았다. 저열하고 노골적인 모욕에도 박은아는 창백하게 질릴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성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현 회장이 노기 띤 얼굴로 다시 외쳤다.

    “내 집에서 이런 천박한 일이 일어나다니, 썩 나가지 못해?”

    자신의 여성 편력을 아들이 고스란히 물려받은 줄도 모르고, 그는 그저 화만 냈다. 제가 섬기는 주인의 심기를 경호하려 충직한 사냥개가 나섰다.

    “일단, 나가서 저와 먼저 얘기하시죠.”

    강석이 여자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상현만을 쳐다보며, 악을 썼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자기가 한 일에는 책임을 져! 네가 아이 아빠라는 거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 안 그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상현이 움찔거렸으나, 이내 돌변했다.

    “웃기지 마, 증거 있어? 뚫린 입이라고 막 떠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까?”

    “너야말로 내가 가만두지....”

    더 이상의 수모를 못 견딘 여자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강석이 상대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휘어잡았다.

    “아악!!”

    앙칼진 비명이 너른 저택 안에 울려 퍼졌다. 여자는 반쯤 바닥에 널브러진 채, 그의 손에 질질 끌려 나갔다.

    때마침, 거실 TV에서 발랄한 음악과 함께 그녀가 등장했다. 광고 속 여자는 화려하게 치장한 얼굴로 청량한 미소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절묘한 악의로 점철된 대비였다.

    현 회장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고는 서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은아가 그 뒤를 얌전히 따랐다.

    갑자기 무슨 용기가 났는지, 주인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여자의 외투와 가방을 챙기고는 현관 쪽으로 걸었다.

    그저, 발버둥 치던 그녀의 마른 몸이 추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현이 열 살이나 어린 제 여동생을 노려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왜? 저 여자가 불쌍하니? 네 어미 같아서? 오지랖 떨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렴.”

    흉흉하게 빛나는 두 눈에 주인은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달려온 박은아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방으로 끌고 갔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둑한 방 안에서 엄마가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넌, 여기서 죽은 듯 살면 돼. 그게 우리가 이 집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니까!”

    그토록 고상하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는 것을 보며, 주인은 터지려는 울음을 참았다.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다.

    언제나 이 장면이 꿈에 나타날 때면 상현의 멸시 어린 눈길을 받으며 강석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이가 어김없이 자신이 되고는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녀는 경기를 일으키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

    “날 앞에 두고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토라진 목소리가 불유쾌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인을 건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고개를 드니, 독경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 미안....”

    주인이 멋쩍게 웃었다.

    “전, 말이죠....”

    독경이 펼쳐 놓은 전공 책을 보란 듯이 탁 덮었다. 그러고는 몹시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한 글자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선배 때문에.”

    연둣빛 잎으로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살랑 나부꼈다. 도서관은 답답하다며, 주인은 그를 끌고 건물 뒤편 산책로로 온 참이었다.

    나무로 만든 탁자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하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독경이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왜 웃습니까?”

    “좀 뻔뻔한 것 같아서....”

    “뭐가요?”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니까?”

    주인이 어여쁜 눈을 반달로 접으며, 대꾸했다. 독경은 조금 더 투정을 부리고 싶었으나, 활짝 핀 얼굴을 보자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약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뭐 어떤가. 방금까지도 세상 모든 고뇌를 홀로 진 것처럼 괴로워 보였던 그녀를 웃게 했으니, 그걸로 족할 따름이었다.

    “어젠 잘 들어갔습니까?”

    “응, 독경 후배도 잘 잤어?”

    “아니요.”

    그 말에 주인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도발했다.

    “왜? 그것도 나 때문이야?”

    “잘 아시네요.”

    독경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서더니,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당황한 주인이 몸을 뒤로 빼자, 그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아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누,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녀가 손으로 힘껏 그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독경은 꿈쩍도 않은 채 빙글빙글 미소 짓기만 했다.

    “걱정 말아요, 다 확인했으니까. 여긴 우리 둘뿐이에요.”

    그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보들보들한 뺨에 제 얼굴을 문질렀다. 매끈하고 따뜻한 피부의 감촉이 묘하게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독경에게는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확인해야 했다.

    그가 상체를 곧게 세우며 주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늘 그렇듯 값비싼 보석처럼 광택이 흐르는 까만 눈동자에 제 얼굴이 또렷이 비쳤다.

    흥분과 열기가 공존하는 들뜬 표정이었다. 기뻤다. 저 맑고 깊은 눈에 오롯이 자신만을 가득 채운 광경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으니.

    독경이 그녀의 입술로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주인이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술이 그에게 게걸스럽게 잡아먹혔던 것이다.

    “으음, 이독경....”

    주인은 몇 번이나 몸을 틀며 벗어나려 했지만, 독경이 완강히 포박하자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제 몸을 독경에게 맡겼다. 그러자 그의 혀끝을 따라 피어나는 감각이, 주인을 황홀경에 빠뜨렸다.

    조금 전까지 온몸을 짓눌렀던 불안과 공포가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다. 어느새 이성은 마비되고 본능만이 남아 강렬하게 펄떡였다.

    오직 이 세상에 그와 자신만 남아,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묵직하게 차오르는 쾌락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아!”

    주인이 그의 뒷머리를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꽉 그러쥐었다.

    “아, 선배!”

    뒷덜미를 당기는 저릿한 느낌에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입술을 떼며, 독경이 탄식했다. 그러고는 다시 입술을 격렬하게 맞부딪히며 속삭였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요!”

    “으음, 우리 딴 데로... 딴 데로 가자....”

    그녀가 입술 틈새로 중얼거렸다.

    독경은 주인을 공사 직전의 낡은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원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됐으나, 개보수를 앞두고 있어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그는 불이 켜지지 않아 어스름한 복도 끝 벽에 그녀를 몰아붙이고는, 하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연한 피부 위를 몇 번이나 쪽쪽거리며 입을 맞춘 뒤, 거친 혀끝으로 핥기 시작했다. 말랑거리던 피부가 단단한 이로 잘근잘근 깨물렸다.

    “아, 아....”

    주인이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신음을 흘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짰다.

    “음, 그렇게 너무... 세게 하면....”

    그 말에 독경이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묻지 않아도 다 알았다.

    그녀의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린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 마요, 선배. 보이는 곳엔 흔적 안 남길 거니까.”

    악동처럼 씩 웃은 독경이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제 무해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보드라운 손끝을 하나씩 깨물기 시작했다.

    마치 이갈이를 막 시작한 강아지처럼, 천진하고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아, 그러지 마. 간지러워.”

    주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빼내려 했다. 그가 그런 그녀의 손을 더욱 꽉 붙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독경이 주인의 손등에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우직한 신하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신실한 신도가 절대자에게 신의와 경애를 표하는 것처럼.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모두 바치겠다는 양, 경건하고 장엄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주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결단코, 이 순간의 감각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경이로운 쾌락으로 달아오른 몸과 충만하게 차오르는 마음을. 자신에게 제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지는 상대의 애정과 헌신을.

    이미 알게 된 이상, 몰랐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제는,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독경 앞에서는 그 어떤 방어막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허물어진 모래성처럼, 자신도 어느새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음을.

    주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 줄기 눈물을 주르륵 떨궜다. 그가 제 인생을 구원해 줄 천사인지, 나락으로 떨어뜨릴 악마인지 아직은 분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독경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눈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동굴 입구처럼 서서히 벌어졌다.

    “이독경, 넌 내 거야.”

    주인이 선언하듯 비장하게 읊조렸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하얗고 뾰족한 어금니를 드러내며 세상 더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꺼이.”

    극상의 희열로 가득 찬 목소리가 텅 빈 복도에 느른하지만 묵직하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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