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11화 (11/76)
  • #11화. 감옥 (1)

    “누굽니까?”

    독경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는 주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짜증 섞인 거친 숨소리가 목덜미에 닿자, 주인은 지친 몸을 너른 가슴팍에 기댔다. 그러자 독경이 가지런한 정수리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김강석 실장님이라고, 아버지 비서 중 한 분이야. 주로 집안일을 담당하시는데, 가끔 나도 챙겨 주셔....”

    주인이 어딘가 무기력한 태도로 답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어깨를 조일 듯 두르고 있는 다부진 팔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제, 가야 해. 데리러 오신다고 했거든.”

    “같이 갈까요?”

    독경이 카페 앞 골목에서 본, 불온한 기운을 물씬 풍기던 검은 양복의 사내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 우리 집이 좀 엄해서.... 그냥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독경이 말뜻을 금세 알아챘다. 그 미지의 남자는 보호자가 아닌 감시자에 가깝다는 것을.

    그가 말없이 세탁기에서 옷을 꺼내 건넸다.

    “고마워.”

    그녀가 옷을 받으며 수줍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독경은 주인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돕고 싶었다. 그녀의 고통은 이제 자신의 고통과 다를 바 없으므로.

    “나, 갈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인이 인사를 건넸다. 독경이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반듯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요염한 자태로 제 무릎에 앉아 애간장을 태우던 여인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쉬웠다.

    “선배....”

    독경이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주인을 붙잡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손길이 애달프고 간절하다고 느꼈다.

    “우리, 내일도 볼 수 있는 거죠?”

    그의 음성이 목이 멘 것처럼 뜨겁게 젖어 있었다.

    독경이 다급하게 던진 말을 듣는 순간, 주인은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저렸다. 그것이 양심의 가책인지, 동정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냉혹해 보일 만큼 매섭던 눈매가 흐릿한 조명 아래서 서글프게 찡그려지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그를 유혹한 것을 약간 후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놓아줄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그럼. 내일 만나.”

    주인이 선이 굵은 이목구비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독경이 그 손길에 제 얼굴을 맡긴 채,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약간의 안도와 희열이 혼탁한 흑색 눈동자에 아른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그를 달래고 싶었으나, 주인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고는 밖으로 나섰다.

    독경만이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았다.

    언제나 답답할 만큼 좁다고 여긴 공간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주보다 더 광활하게 느껴졌다. 한겨울 한기 같은 고독감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기이한 상실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남긴 아주 작은 흔적 하나라도 찾아보려 기를 썼다.

    하지만 주인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깨끗이 정리한 채 증발해 버렸다. 그녀와 함께한 짧은 시간이 한낱 백일몽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

    이튿날, 주인은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위층에 있는 제 방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주인 학생, 오랜만이네. 요즘 시험이라 계속 일찍 나가더니....”

    거실을 가로질러 가던 도우미 아주머니가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녀가 늘 그렇듯 상냥하지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뒤, 부엌으로 들어섰다.

    죽기보다 싫었으나 너무 오래 빠지면 눈치가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식사였다.

    게다가 주인은 어제 일 때문에라도 오늘은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십여 년을 이 집에 살면서 체득한 깨달음 중 하나는 공연히 책잡힐 일을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식탁에 다가와 앉자, 초로에 막 접어든 남자가 쯧 하는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신문을 성마르게 탁 내려놓았다.

    주인의 부친이자 태성그룹 회장, 현태성이었다.

    그는 안경을 슬쩍 내린 채 언짢은 기색으로 제 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새된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물었다.

    “대체, 뭘 하느라 얼굴 보기도 힘든 게냐?”

    “죄송해요. 요즘 시험 기간이라 좀 바빴어요.”

    주인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작게 대답했다.

    “회장님, 음식 다 식겠어요. 어서 드세요.”

    옆에 앉은 여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식사를 권했다.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게 곱고 청초한 인상의 여인은 주인의 모친인 박은아였다.

    젊은 시절 나름 전도유망한 배우였으나, 임신과 동시에 은퇴한 현 회장의 숨겨 둔 여인 중 하나였다.

    현 회장은 아내의 말에 군말 없이 식사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고개를 휙 쳐들며 주인을 똑바로 보았다.

    “밖으로 나돌면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적당히 성적 관리하다 졸업하면 바로 시집갈 준비나 해. 알겠어?”

    화살은 곧장, 박은아에게도 향했다.

    “당신도 딸이라고 오냐오냐하지 말고, 귀가 시각 철저히 확인해. 계집애가 어디서 사고나 치고 오면 내 얼굴은 물론, 회사 이미지에도 먹칠하는 거니까!”

    “네....”

    그녀가 두 눈을 내리깐 채 고분고분 응대했다.

    ‘당신 얼굴이나 회사에 먹칠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잘나신 아드님이겠지.’

    주인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힐난을 억지로 삼키기 위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본처 소생이자 주인의 배다른 오빠인 현상현이야말로,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개망나니 아니던가.

    국내에서 하도 사고를 쳐서 해외로 보냈더니, 마약 중독자가 돼 돌아왔다던 증권가 정보지 속 재벌가 자제가 바로 그였다.

    그나마 요즘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경영 수업을 받는다며 여기저기 기웃거렸으나,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어제도 진탕 퍼부은 모양이었다.

    밤새 집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동안 부친에게 잘 보인다며 참석하던 식사에도 불참한 것으로 보아, 아직 숙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주인은 싹 달아난 입맛 때문에, 밥을 반 공기도 채 비우지 못하고는 먼저 일어섰다.

    현 회장은 그런 행동마저도 심히 거슬렸는지,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다시 혀를 끌끌 찼다.

    주인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질식해 죽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시험을 핑계 삼아 재빨리 짐을 챙기고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비 내린 뒤의 상쾌한 아침 공기가 코끝을 스치자, 꽉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막 정원 계단을 밟는 그녀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주인 학생.”

    주인은 그 목소리를 잘 알았다. 탁하고 꺼칠한, 차분하지만 어딘가 위협적인 김강석 실장의 음성이었다.

    그녀가 뒤를 돌자, 정원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독경처럼 키가 크거나 골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것 같은 탄탄한 체형이 눈에 띄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검은 선글라스를 낀 각진 얼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외모가 선글라스로 인해 더욱 고압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주인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강석이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

    “요즘 귀가가 좀 늦던데....”

    강석이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 앞에 우뚝 섰다.

    “시험 기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곧 끝나니까, 앞으로 늦을 일은 없을 거예요.”

    주인이 저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요, 회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시니 너무 늦진 말고.... 혹시 필요하면 전 기사 부르세요. 얘기해 두죠.”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안도의 숨이 절로 터졌다. 그 순간, 강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근데....”

    주인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제 도서관에만 있었던 거 맞습니까?”

    “네? 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짙은 선글라스 너머로 설핏 드러나는 가는눈이 자신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 보니까 신발이 꽤 젖어 있던데?”

    억양 없는 그 말에, 주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그랬다. 옷과 머리는 독경의 집에서 말릴 수 있었지만, 신발은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책 가지러 잠깐 다른 건물에 갔다 왔었는데, 그때 젖었나 봐요.”

    주인이 당혹감을 애써 갈무리하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강석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말이 없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알겠어요. 조심히 가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가 본능적인 공포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을 뒤로 감추며 묵례를 하고는 돌아섰다. 정문을 나설 때까지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세차게 요동쳤다.

    그때, 한 손에 꽉 쥐었던 휴대 전화로 짧은 문자가 왔다. 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주인의 숨통이 약간이나마 트였다.

    <선배, 어디십니까?>

    독경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주인은 독경이 준 유자차를 앞에 둔 채,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아무래도 김 실장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강석이 두려웠다.

    그에게 꼬리를 밟힌다는 것은 그 집에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이라는 뜻이었고, 감시와 통제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의미였으므로.

    주인은 가끔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장면을 하릴없이 되새기며, 어둡고 차가운 기억 속으로 무력하게 빨려 들었다.

    ***

    현 회장의 첫 부인이자 상현의 친모가 지병으로 사망한 후, 박은아는 주인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차지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당시 현 회장에게는 그녀 외에도 여럿의 내연녀가 있었고, 그들 모두 그 자리를 노렸으리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제 모친이 태성그룹 안주인 자리를 꿰찼는지는, 당시 어렸던 주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집에 들어간 첫날, 경멸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오시하던 이복 오빠를 보며 막연하게나마 불길한 앞날을 예감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나이가 열두 살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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