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10화 (10/76)
  • #10화. 유혹 (2)

    주인이 뜨거운 숨결로 독경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녀의 쇄골과 윗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는 모습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비에 젖은 얇디얇은 블라우스가 피부에 딱 밀착해 어깨선은 물론, 가슴골까지 훤히 드러났던 탓이었다.

    눈앞의 아찔한 자태에 독경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 하마터면 저 여린 몸을 억세게 끌어안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버텼다. 자신의 미덕 중 하나라 여겼던 자제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독경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며 침음을 삼켰다.

    “선배, 이게 대체....”

    “아, 그게.... 갑자기 비가 와서 우산을 찾으려고....”

    주인이 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떼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어이없는 답변에 그가 혀를 쯧 찼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떨리는 몸에 둘렀다.

    “아, 괜찮은데.... 네 옷까지 젖잖아....”

    “상관없습니다.”

    주인이 사양했으나, 독경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제 옷이 벗겨지지 않게 단단히 묶을 뿐이었다.

    “저한테 전화하시지....”

    쓴 입맛을 다시며 내뱉은 말에 그녀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서 쉬고 있을 텐데, 방해할 순 없잖아....”

    “...괜찮으니까 앞으론 바로 연락하십시오.”

    “언제든?”

    주인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하지만 독경은 따라 웃지 않았다.

    “네, 언제든.”

    그저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 강하고 묵직한 한마디에 주인이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그를 주시했다.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발하는 것 같기도 한 오묘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야릇하고 음험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독경은 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너무 많이 젖었네요. 이대로 갈 수 있겠어요?”

    “음.... 사물함 어디에 수건이 있을 텐데, 그걸로 대충 닦고....”

    그녀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아니면....”

    그때, 그가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아주 짧은 망설임 끝에 덧붙였다.

    “저희 집에서 말리고 가시겠어요?”

    어둑한 방 한쪽 창가에 우뚝 선 독경은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빗소리에 섞인 희미한 물줄기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세탁기의 진동과 흐릿한 샤워 소리가 고요하고 메마른 제 보금자리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고, 그는 느꼈다. 이 충만한 떨림이 황홀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때, 달칵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 감상에 빠진 그를 일깨웠다.

    독경이 뒤를 돌아보자, 주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나오다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화장실 잘 썼어. 그리고 옷도....”

    주인이 품이 넉넉한 새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독경이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드라이어를 들었다.

    “머리 말리셔야죠?”

    “응....”

    “젖은 옷은 세탁기에 돌렸어요. 건조 모드로 했으니까, 금방 마를 거예요.”

    “응....”

    그녀가 다시 짤막하게 대꾸하며,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단출하다 못해 어딘가 썰렁하기까지 한 자취방을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이독경 집이구나. 엄청 깨끗하네.”

    그가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짐 많은 걸 싫어해서요. 방이 좀 좁기도 하고.”

    “음, 그렇구나. 기숙사엔 왜 안 들어갔어? 거기가 싸고 시설도 좋지 않아?”

    “거긴 규칙 같은 게 많아서 좀 귀찮더라고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방 쓰는 것도 불편하고.”

    독경이 선선히 이유를 밝혔다.

    주인은 제가 아는 그라면 정해진 규율을 성가시게 여길 것이 뻔하다 생각하며, 수긍했다.

    “머리, 말리셔야죠?”

    그가 드라이어의 코드를 콘센트에 꽂으며 재차 물었다.

    “응, 나 줘.”

    그녀가 손을 내밀며 답했다. 그러자 독경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짓궂게 웃었다.

    “제가 말려 드릴게요.”

    “뭐?”

    뜻밖의 말에 주인이 두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손목을 잡아끌었다.

    “선배, 여기 앉아요.”

    “응? 으응....”

    주인이 그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마주 앉았다.

    독경이 젖은 머리카락 틈으로 굵은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기계의 전원을 켰다. 그러고는 제법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 구석구석을 훑기 시작했다.

    위잉.

    드라이어의 소음이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주인은 상대의 손에 제 머리를 온전히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굳은살이 박인 듯 거칠고 단단한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어쩐지 졸음이 밀려오며 나른해졌다.

    독경 또한 생경한 체험에 온 신경을 오롯이 집중하는 중이었다.

    무릎을 맞댄 채 굽힌 주인의 작고 동그란 머리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가 이다지도 향기로울 줄은 몰랐다. 향에 취해도 어지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처음 알았다.

    “다른 사람 머리를 말린 건 처음인데....”

    독경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물기가 마른 보송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주인이 그 말에 감았던 눈꺼풀을 살포시 들어 올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처음치곤 잘하는데?”

    “그런가요?”

    그가 그녀를 마주 보며 따라 웃었다.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두툼한 손이 발그레한 뺨으로, 다시 촉촉한 입술로 옮겨 갔다.

    “키스, 해도 됩니까?”

    은근한 열기와 흥분을 품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 긴장과 어색함에 숨죽이던 주인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싫다면?”

    “선배가 싫다고 하시면 안 할 겁니다. 그렇지만....”

    독경이 자신의 팔로 가녀린 허리를 뱀처럼 미끈하게 휘감았다.

    “머지않아 하게 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 말에 담긴 비열함과 냉혹함을 주인은 희미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녀는 기꺼웠다. 자신이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손에 넣었으니까.

    주인이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며시 포갰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독경은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입술을 더욱 가까이 붙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주인은 조금 두려웠다.

    난폭하고 무자비한 본성을 굳이 감추지 않는 그가 자신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을까 걱정됐던 것이다.

    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독경이 거칠고 조급하게 몰아붙여도 당황하지 않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며 입을 맞췄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의 키스가 기대보다 훨씬 부드럽고, 차분하고, 다정했던 것이다.

    독경은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려는 듯 주인의 입술을 잠시 가볍게 비비더니, 이내 혀끝을 내밀어 입술 주름을 하나하나 찬찬히 훑었다.

    그사이, 그녀의 입술이 물기를 머금으며 조금씩 벌어졌다. 그 틈으로 단단히 힘을 준 그의 혀끝이 미끄러지듯 서서히 파고들었다.

    “으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주인이 느릿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자극을 받았는지 독경은 그녀의 몸을 한 팔로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제 혀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혀가 촉촉하고 말캉한 볼 안쪽 점막을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다, 이내 그녀의 혀를 능숙하게 감았다.

    두 사람의 혀가 한데 뒤섞였다.

    마치 아끼던 사탕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독경은 주인을 이리저리 물고 핥고 굴리며 세상 더없이 감미롭게 녹이고 있었다.

    성급하게 깨물어 삼키는 것은 결코,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집요하다 싶을 만큼 길고 느릿하게, 모든 감각을 고스란히 만끽하는 것이 타고난 성미에 가까웠다.

    독경의 인내심과 자제력은 어쩌면 이런 기질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

    오랜 입맞춤을 마친 그가 입술을 떼며 진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안광을 강렬하게 빛내며 주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좋아합니다, 선배. 좋아해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차분하던 공기를 묵직하게 흔들었다. 주인이 그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무심한 손길로 매만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알아.”

    무성의한 한마디에 독경의 미간이 슬며시 찡그려졌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선배 생각이 궁금해요.”

    주인이 자신의 상체를 꽉 부둥켜안은 채 속삭이는 독경을 여상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상대를 모조리 씹어 삼킬 기세로 욕심껏 희롱하고는, 이제는 마음까지 내놓으라며 떼를 쓰니 말이다.

    ‘욕심이 많네....’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날렵하게 각진 턱을 긴 손끝으로 우아하게 어루만졌다.

    “음, 나도....”

    그때, 주인의 가방에서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몸을 일으켜 휴대 전화를 꺼내 확인한 그녀가 인상을 팍 구겼다.

    독경은 늘 무감하게 평온하던 그녀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주인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김 실장님. 무슨 일이세요?”

    그녀의 질문에 전화기 너머에서 굵고 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번에는 독경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상대의 질문에 주인은 차분하지만 어딘가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것 같은 어조로 답했다.

    “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친 다음에 가려고 했어요. 혹시, 아버지께서 절 찾으셨나요?”

    나직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들렸다.

    “아, 네. 다행이네요.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괜찮은데....”

    다시 눅진한 음성이 끈질기게 귓가에 달라붙자, 주인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삼십 분 뒤요? 네, 알겠어요. 그럼, 맞춰서 정문으로 나갈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독경은 한발 떨어져서 숨죽인 채 지그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야생 동물처럼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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