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함정 (2)
야외 활동을 하기에는 더없이 쾌적한 봄날이었다.
신입생들은 펜션의 너른 공터 한쪽에 노란 병아리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까르륵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중 활달한 친구 몇은 벌써 잔디밭 전체를 제집인 것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좋을 때다.”
숙소 앞에 차양을 길게 늘여 만든 그늘 가에 앉아 있던 윤희가 생기 넘치는 신입생들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게....”
나란히 앉은 원우가 초췌한 몰골로 부러운 듯 대꾸했다. 그녀가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남자 친구의 병약한 얼굴을 슬쩍 보며 픽 웃고는, 맞은편으로 눈을 돌렸다.
그 앞에는 원우와는 정반대로 까무잡잡하고 건강미 넘치는 독경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천진하게 놀고 있는 신입생 무리를 구경 중이었다.
“독경 후배는 저기 안 끼어?”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일행이 된 그를, 윤희가 수상하게 훑었다.
“아, 뭐 별로....”
독경이 무뚝뚝한 어조로 답했다. 그 말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유치해서 끼기 싫어?”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다들 절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아쉬움이나 서운함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원우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 봤자 한 살 차이 아닌가?”
“방금까지 1학년들 체력을 부러워한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윤희가 빙글빙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
“뭐? 아, 아니거든!!”
꼴 보기 싫은 자식을 앞에 두고 망신만 당한 원우가 뻐끔거리며 대꾸하려는 사이, 주인이 양손에 시원한 음료를 들고 다가왔다.
“엊그제만 해도 쌀쌀했는데, 이젠 낮에 덥네....”
독경 옆에 털썩 앉은 그녀가 옷깃을 펄럭이며 땀을 식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주인의 어깨가 그의 굵은 팔뚝에 스쳤다.
이제는 꽤 익숙한 듯, 스스럼없는 접촉이었다. 독경은 매끈한 살결이 닿을 때마다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이렇게 가까이서 부대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주인이 자신을 편하게 여긴다는 점이었지만.
“이제 저녁 준비해야지?”
주인이 윤희를 보며 물었다. 그녀가 곧장 대답했다.
“응,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불 피우려고.”
“그래? 아까 보니까 술이 좀 부족할 것 같은데, 앞에 슈퍼에서 더 사 올까?”
“그럴래? 돈은 총무한테 받아 가. 난 원우랑 식사 준비하고 있을게. 혼자 들고 오기 무거우니까 한 사람 더 데려가고.”
“제가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독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윤희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승낙했다.
“그래, 잘됐네. 둘이 같이 갔다 오면 되겠다.”
주인이 덤덤한 상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물었다.
“그럼, 우리 지금 다녀올까?”
“네, 그러시죠.”
독경이 기지개를 켜듯 커다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주인도 따라 일어섰다.
“우리 갔다 올게.”
“응, 조심히 다녀와. 너무 늦진 말고. 빨리 안 오면, 우리가 너희 몫까지 다 먹어 버릴 거야!”
윤희가 농을 던지며 상큼하게 손을 흔들었다. 원우가 멀어지는 두 사람을 째려보다 불퉁거렸다.
“난, 이독경이 우리랑 어울리는 거 싫어.”
“또, 또 그런다. 난 재밌고 좋은데, 왜. 주인이도 딱히 싫어하는 거 같지 않고.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고깝게 보는 인간들도 없잖아.”
그 말에 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날 독경이 본보기로 선배 하나를 손본 이후, 그를 건방지게 보는 시선은 싹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속으로 시원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그 3학년의 횡포에 크고 작은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던 불만들도 망가뜨린 물건을 후하게 보상해 줬다는 소문이 돌면서 급격히 잦아들었다.
어느새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선망 비슷한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머리도 좋은 놈이 배짱도 두둑한 데다, 현주인과 제법 잘 어울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죽어도 인정하기 싫지만 이독경은 자신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남자였다.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문제야....”
원우가 탄식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주인이가 왜 저런 놈이랑 가까이 지내는지 모르겠어.”
그 말에 윤희가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씩 웃었다.
“넌 몰라도 돼. 알려고 하지 마. 이해 안 될 테니까.”
어느덧, 건물 주변으로 어스름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학생들은 둥글게 늘어놓은 탁자에 적당히 모여 앉아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셨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한적한 야외를 가득 채웠다.
깊어 가는 밤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술이 동나기 시작했다. 모두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자,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이런 들뜬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주인은 평소보다 술을 더 마셨다. 원래도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오늘따라 유독 볼이 발갛게 달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독경이 슬쩍 훔쳐보았다. 흥미로웠다.
꽤 자주 함께 술을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네....’
독경은 맞은편에 앉아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주인도 그를 따라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윤희가 그녀를 말렸다.
“주인아, 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냐?”
“음, 그런가?”
주인이 술잔을 든 손을 멈칫하며,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래, 너 지금 얼굴 살짝 빨갛다.”
원우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맞장구를 쳤다. 주인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제 뺨을 손으로 더듬었다.
“흠,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뜨겁네. 살짝 어지럽기도 하고....”
“아이고, 이것아! 고기도 좀 먹으면서 마셔야지, 술만 냅다 들이부으면 어떡해?”
윤희가 새된 목소리로 타박하며 물을 건넸다. 주인이 찬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앞자리의 독경을 향해 얼굴을 비스듬히 꺾었다.
“독경 후배도 내가 취한 것처럼 보여?”
갑작스럽게 자신이 호명되자 그는 당황한 나머지, 마시던 술을 내뿜을 뻔했다.
질문을 던진 주인이 천천히 눈꺼풀을 깜박이며, 반쯤 풀린 동공으로 독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 잠시 망설이다, 침착하게 남은 술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고는 태연히 눈을 맞췄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발그레한 뺨에 반쯤 벌어진 입술, 몽롱한 눈이 어딘가 항상 스스로를 억누르는 것 같던 느낌과는 완전히 반대였던 탓이었다.
그 흐트러진 외양에 독경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차분함을 가장한 채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좀 피곤해 보이시는 것도 같은데.... 숙소까지 데려다드릴까요?”
“음, 그럴까? 나 잠깐 들어가서 쉬고 나와도 돼?”
주인이 윤희와 원우를 번갈아 보며 허락을 구했다.
“그래. 뒷정리는 나랑 원우가 할 테니까, 넌 가서 쉬어.”
친구의 동의에 그녀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걷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 보였다.
독경이 당연한 것처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가시죠, 선배. 숙소 가는 길이 좀 어둡더라고요. 제가 플래시 비춰 드릴게요.”
“음, 그럼 부탁해.”
그녀의 말에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몸을 슬쩍 돌렸다.
“나 참, 경호원이 따로 없네!”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주인과 독경의 뒷모습을 보며, 원우가 혀를 찼다. 윤희가 별다른 반응 없이 멀어지는 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은 잔디밭 뒤쪽 오솔길을 나란히 걸었다. 예약된 숙소는 가장 안쪽 건물이라 공터에서 제법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그들이 걷는 비좁은 자갈길 양옆에는 벚꽃나무 몇 그루가 우뚝 서 있었는데, 만개한 꽃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며 운치를 더했다.
주인이 그중 한 그루 앞에 멈춰 서서는 탐스럽게 핀 꽃들을 올려다보았다.
“예쁘네....”
그녀가 나직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게요.”
독경이 벚꽃이 아닌 주인을 바라보며 여상하게 읊조렸다.
“독경 후배 눈에도 그렇게 보여?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음, 저한테도 심미안이란 게 있습니다만?”
어딘가 부루퉁하게 돌아오는 답에, 주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싸늘한 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그녀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추우십니까?”
어둠 너머에서 독경의 음성이 낮고 단단하게 울렸다.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추우면 얘기하세요.”
그가 불어오는 바람을 자신의 넓은 등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응....”
돌아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캄캄한 숙소 안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딱히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돌아온 사람은 둘뿐인 모양이었다.
독경은 방 한쪽에 쌓여 있던 침구 하나를 가져와 구석 자리에 폈다. 그사이 주인은 작은 냉장고를 열어 안을 살피고 있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어느새 이부자리를 깔끔하게 펼쳐 놓은 그가 다가와 물었다. 그녀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응, 목이 마른데 물이 없네....”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일단, 저기서 좀 쉬세요.”
독경이 이부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독경이 휘파람을 불며 음료수와 약간의 과일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주인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는 사냥 직전의 포식자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다가가,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창 너머로 쏟아지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바라본 주인의 얼굴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창백한 얼굴 위로 은은하게 감도는 홍조가 함께 본 벚꽃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흩날리는 꽃잎처럼 연약하지만 우아한 기품이 물씬 풍기는 이목구비였다.
독경은 넋을 놓고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다, 이내 어깨를 움찔했다.
속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던 주인이 갑자기 몸을 뒤척이며,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기 때문이다.
“음....”
작게 벌어진 입술 틈으로 신음이 샜다.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환한 미소가 번졌다. 무저갱과도 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안광이 야비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