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6화 (6/76)
  • #6화. 함정 (1)

    어느새 다가온 주인이 의자를 가져와 맞은편에 앉더니, 무릎 위에 구급상자를 올려놓았다.

    “원래는 사장님이 손님용으로 준비한 건데....”

    ‘뭐, 독경 후배도 손님이니까.’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가 상자를 열었다. 독경이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집요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저 약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펴볼 뿐이었다.

    “음, 여기 있다.”

    주인이 연고 하나를 높이 들며 말했다. 그러고는 탈지면에 소독제를 묻혀 터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

    상처 부위가 쓰렸는지, 독경이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냈다.

    “조금만 참아.”

    주인이 나긋하게 달래며, 재빨리 굳은 피딱지를 닦았다. 그리고 잠시 뒤, 손가락 끝에 연고를 묻힌 뒤 말했다.

    “고개.”

    짤막한 명령을 알아들은 독경이 고개를 들어 다부진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인이 길고 우아한 손끝으로 그의 턱을 살포시 잡더니 왼쪽으로 돌렸다. 상처를 잘 보기 위해서였다.

    독경이 속으로 역시 왼뺨을 맞기를 잘했다 생각하며, 순순히 얼굴을 내주었다. 주인이 상처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피부에 닿은 것처럼 간질거렸다.

    “많이 아파?”

    주인이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값비싼 보석처럼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눈이었다. 독경이 그런 그녀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무 가까웠다. 위험할 정도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흠....”

    그녀가 못마땅한 듯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끝을 살짝 움직이더니, 상처 부위를 꾹 눌렀다.

    “이래도?”

    돌발적인 행동에 독경은 순간 아픔을 못 이긴 채 소리를 낼 뻔했으나, 간신히 목구멍 뒤로 삼켰다.

    “네.”

    그 반응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주인이 웃음을 픽 흘렸다.

    조금 뒤, 그녀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상처 부위에 약을 발랐다. 짓궂던 조금 전과는 몹시도 대조적인 손길이었다.

    “오늘 일은 미안했어. 괜히 나 때문에....”

    주인이 기어들 듯 입을 열었다. 독경은 왠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친절한 이유가 순전히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자신을 좋아해서 잘해 주기를 바랐는데....

    언제나 그녀는 굶주린 사람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처럼 굴었다. 베푸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행위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목숨이 오갈 만큼 절박한 일이었다.

    문득 그는, 박애주의자처럼 구는 주인에게 심술이 났다.

    저 선심을 온전히 자기에게만 쓰기를 바라마지 않았기에, 저 선행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싶었기에.

    독경이 차갑게 내뱉었다.

    “선배는 이렇게 아무에게나 잘해 줍니까? 그러니까 선배들이 오해하는 거 아닙니까?”

    스스로가 생각해도 고약한 말이었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질문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바라보는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선배들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을 거 같아서요....”

    주인이 생각에 잠긴 채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마른 입술을 뗐다.

    “방금 그 말, 굉장히 위험해. 자칫 모든 일을 피해자 탓으로 돌릴 수 있거든. 세상에는 ‘그냥’ 남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어. 이유는 나중에 얼마든지 붙일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카페를 나서는 순간까지도, 불편한 기류는 이어졌다.

    독경이 무슨 말이든 꺼내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그때 주인이 가방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액정에 뜬 문자를 잠시 노려보던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린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다. 집에서 데리러 오셨거든. 그럼, 조심히 가.”

    “아, 네....”

    그가 어딘가 다급하고 초조하게 돌아서는 등에 대고 망연히 중얼거렸다.

    가로로 긴 눈에, 골목 어귀쯤 주차된 고급 세단 한 대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이 음험하게 포착됐다.

    그날 밤, 독경은 자신이 던진 말을 후회했다. 물론 그 말이 지닌 도덕적 결함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그저 퉁명스럽게 뱉은 한마디가 주인을 언짢게 만들고, 두 사람 사이를 어색하게 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날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원인은 알량한 제 자존심에 있었다. 그녀가 죄책감이 아닌 호감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웃기는 일이었다.

    주인을 돕는 순간 그 부채감으로 옭아맬 계산부터 했으면서, 막상 닥치고 보니 온전한 마음을 얻고 싶은 욕심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멍청한 새끼!”

    비좁은 침대에 누운 독경이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다 잡은 먹잇감을 눈앞에서 놓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열불이 났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그가 손으로 제 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곳에는 아직도 주인의 보드라운 손길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한번 실패했다고 이렇게 의기소침해지면 안 되지....’

    그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보상이 큰 사냥감일수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니까.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않은가.

    독경이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리며 담배를 물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폐 속 깊숙이 연기를 죽 빨아들였다.

    어찌 됐든 오늘 일 덕분에 현주인은 그에게 빚을 졌다.

    독경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큰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도움을 주면 나중에 유용한 패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특히, 그녀처럼 남에게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라면 더더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겠지.

    짙은 어둠 속으로 뿌옇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는 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곧게 뻗은 속눈썹과 단정히 빗어 내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

    월요일이 오자, 독경은 학교 식당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식사를 마치고 슬슬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예상하는 순간, 그녀가 윤희와 함께 나타났다.

    “주인 선배.”

    독경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주인이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가 평소보다 조금 더 경직되고 갈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녀가 잠시 물끄러미 상대를 올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강의실 가 있어. 금방 갈게.”

    그 말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친구를 향한 것이었다.

    “응? 으응....”

    윤희가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낄 데 안 낄 데 구분은 그런대로 하는 모양이라고 독경은 생각했다.

    주인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어디서 얘기할까?”

    주인은 너른 잔디밭 한구석에 놓인 벤치에 앉아 독경을 기다렸다. 외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점심시간임에도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녀는 나뭇가지마다 파릇파릇하게 돋은 새순들을 보며, 새삼 봄이 왔음을 실감했다. 이제 곧 벚꽃이 피면, 지금보다 더 봄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으리라.

    “새삼스럽게 계절은 무슨....”

    주인이 자조 섞인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늘 계절의 변화에 무감한 편이었다. 그럴 상황도, 처지도 아니라고 여겼던 탓이다.

    하지만 올해는 어쩐지 벚꽃 길을 한 번쯤 걸어 보고 싶기도 했다. 혼자도 좋고, 친구랑 걸어도 좋을 것이다.

    ‘윤희한테 얘기해 볼까?’

    그녀가 속으로 이런 궁리를 하는 사이, 멀리서 양손에 음료를 들고 오는 독경이 보였다. 그는 제법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왔음에도,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여기....”

    그가 사 온 음료를 슬쩍 내밀었다. 따뜻한 유자차였다. 봄이라지만 아직 기온은 서늘했기에, 일부러 따듯한 음료를 고른 모양이었다.

    “고마워.”

    주인이 양손으로 유리병을 감싸며 짤막하게 인사했다. 뜨끈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식후라 그런지 약간 나른해졌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나란히 앉은 독경이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안할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지난번엔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헛소리를 지껄였다고. 그는 그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은 그편이 좋았다.

    다만 늘 격식을 갖추던 평소와는 달리, 오늘은 마치 자신보다 훨씬 높은 사람에게 아량을 구하는 것처럼 매달리는 태도가 조금 낯설었다.

    주인은 진한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안달복달하며 애원하는 그가,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안쓰러웠다. 약간 몽롱한 기분이 마음을 너그럽게 만든 걸지도 몰랐다.

    ‘꼭 혼나기 싫은 강아지 같네....’

    사실, 주인은 독경에게 특별히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부리는 심술을 무시하는 어른처럼,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정작, 신경 쓰이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물론 그가 실언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사과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럴 성격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탓이었다.

    ‘이상한데....’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독경을 마주 보았다. 깜박이지 않는 탁한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동굴처럼 어둡고 스산한 눈이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설마? 진짜?’

    그 순간, 주인의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가정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한숨을 작게 내쉰 뒤, 보드라운 입술을 신중히 열었다.

    “알겠어. 다음부턴 조심할 거지?”

    꽤 긴 침묵 끝에 나온 말에, 독경이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곧장 대답했다.

    “네, 안 그럴 겁니다.”

    그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단호하게 답했다. 주인은 희한하게 웃음이 났지만 꾹 참고는,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려 화제를 돌렸다.

    “다음 주 주말에 엠티 있는 거 알지? 갈 거야?”

    “선배는요?”

    “난 가야지. 학생회 소속이니까.”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주인이 그를 힐끔 보았다. 여전히 독경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은은하게 띠며 주인이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 잘됐다. 재밌겠는걸....”

    그녀의 혼잣말에 독경 또한 슬며시 웃음기를 머금었다. 기대감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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