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5화 (5/76)
  • #5화. 제압 (3)

    훈계조로 내뱉는 말에 3학년이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들썩였으나, 입안이 가득 부어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네요.”

    다시 독경이 얼굴을 연거푸 내려쳤다.

    철썩, 철썩, 철썩.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상대를 다루는 모습을 보며, 다들 기가 질렸는지 선뜻 말리지 못한 채 방관만 했다.

    저, 악독한 미친 개새끼를 건드리면 끝장난다!

    이 순간,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건의 주도자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본보기로 한 사람만 조져 놓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설설 기어 올 것이다. 공포란 원래, 전염성이 강하니까.

    하지만 유일하게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은 이가 있었다. 서원우였다.

    “이독경, 이제 그만해라.”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핼쑥한 몰골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그가 독경의 어깨를 잡았다.

    ‘어라?’

    독경이 겁에 질린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싸움을 말리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심 약간 놀랐다.

    ‘하긴, 그 김윤희 남친인데 이 정도 배짱은 있겠지....’

    되도 않는 모범생 노릇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독경은 조금 더 장난질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말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쯤에서 정리해야 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그가 멱살을 움켜쥐었던 손을 탁 놓았다.

    그러자 남자가 무너지듯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몇 사람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가자....”

    원우가 앞으로 나서며 힘없이 말했다.

    “잠깐만요, 원우 선배.”

    독경이 깍듯하게 답하더니, 아직 볼일이 남았는지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던 다른 3학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주십시오.”

    말은 공손했으나, 노려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눌린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 전화를 머뭇거리며 내놓았다.

    그러자 전화기를 빼앗듯 낚아챈 독경이 물건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는, 체중을 잔뜩 실은 발로 힘껏 밟아 부숴 버렸다.

    “앗!!”

    상대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숨을 턱 멈추더니, 박살 난 제 물건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의 일을 뒤에서 몰래 촬영하다 들킨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십시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싸늘하게 흘렀다. 남자가 질린 표정으로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독경이 그런 상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원우 쪽으로 돌아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커다랗고 난폭해 보였다.

    그동안 카페 안은 난리가 났다. 주인은 어지러운 손발을 간신히 움직여 마감을 하고는, 목을 뺀 채 두 사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다림이 길어지자, 그녀는 탁자 사이를 서성이며 손끝으로 제 입술을 거칠게 매만졌다.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껴졌다.

    “야, 정신 사나우니까 제발 좀 앉아 있어!”

    보다 못 한 윤희가 버럭 성질을 부렸다. 그 말에 주인이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휙 돌아서서는 친구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너, 아까 나 왜 말렸어?”

    “뭐?”

    “아까 내가 이독경 불렀을 때, 네가 눈짓했잖아.”

    주인의 안광이 서슬 퍼렇게 번뜩였다. 이럴 때마다 윤희는 그녀의 가녀리고 청순한 외모가 실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냥, 왠지... 걔가 그걸 원하는 것 같았거든....”

    “뭐?”

    돌아온 답변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주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희는 자신이 그에게서 받은 인상을 상세히 풀어내려다, 그냥 입을 꾹 닫았다. 아직 확신할 수 없기도 했고, 말로 설명하기에 어딘가 미묘한 부분도 있었던 탓이었다.

    “아, 몰라. 그런 게 있어....”

    “대체, 무슨....”

    무책임하게 말을 돌리는 친구를 보며, 주인은 저답지 않게 몹시 성이 났다. 그녀가 막 노기 띤 음성으로 따지려는데, 그때 카페 문이 덜컹 열렸다.

    주인과 윤희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꽂혔다.

    먼저 원우가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뒤이어 한쪽 입술이 터진 독경이 등장했다. 주인의 고운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때까지도 평정심을 잘 유지해 온 윤희도 벌떡 일어나 원우에게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주인도 독경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경 너머로 초점 없이 떨리는 남자 친구의 눈을 보며 윤희가 물었다.

    “어, 그게....”

    원우가 진이 다 빠졌는지 맥없이 대꾸하다, 옆에 서 있는 독경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 찰나의 시선을 윤희가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주인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독경의 얼굴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이독경, 괜찮아?”

    맑고 깊은 눈동자가 자신의 터진 입술에 머무는 것을 느낀 독경이,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이게?”

    그녀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분을 씹어 삼키듯 중얼거렸다.

    “아, 진짜 별거 아니에요.”

    그가 손을 내저으며 다친 입술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힐끔거리던 원우와 눈을 마주쳤다.

    독경이 슬며시 웃으며 의미심장한 신호를 보냈다.

    ‘미친 새끼!’

    입 다물라는 눈짓의 의미를 읽은 원우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냈다.

    방금까지 악귀처럼 날뛰던 새끼가 가증스럽게도 순한 양 흉내를 낼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금방이라도 깨질까 봐 어쩔 줄 모르며 그를 다루는 주인에게 밖에서 벌어졌던 일을 당장 밝혀야 했다.

    하지만 원우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제 여자 친구마저 위험해지면 큰일이니까.

    지금 그의 눈에 독경은 언제든 무슨 일이라도 벌일 수 있는 시한폭탄처럼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머지않아 윤희와 주인의 귀에 사건의 진상이 들어갈 것은 자명했다.

    윤희는 발이 넓은 편이었고, 주인은 눈치가 빨랐으니까. 자신은 그때 그들에게 부연 설명을 해 주면 될 일이었다.

    “일단, 너희는 돌아가. 차 끊기겠다.”

    주인이 친구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휙 돌려 독경에게도 같은 어조로 말했다.

    “이독경, 넌 잠깐 남아 있고!”

    그녀의 경직된 표정과 말투에 세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에는 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법이라 했던가. 싸늘한 압박감을 느낀 윤희와 원우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독경 후배는 어떻게 가?”

    윤희가 물었다.

    “전, 이 근처에서 자취 중이라 걸어가면 됩니다.”

    독경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와 단둘이 남을 친구가 걱정된 원우가 은근슬쩍 주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주인이 넌, 어떻게 갈 거야?”

    “난 김 실장님께 연락하든가, 아니면 택시 타고 가려고. 오늘 고생 많았어, 원우야. 조심히 가.”

    따뜻하게 건네는 인사에 원우는 왠지 모를 가책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술자리에서 주인의 이야기에 몇 마디를 덧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다 내 탓이야. 미안하게 됐다.”

    면목 없다는 양 두 눈을 내리깐 그를 지켜보던 주인이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신호를 알아들은 윤희가 남자 친구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그럴 수도 있지. 주인아, 독경 후배, 우리 먼저 갈게. 주말 잘 보내!”

    그녀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원우를 질질 끌고 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 두 사람만 남은 카페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주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렀다.

    “이쪽으로 와.”

    독경이 어둠이 자욱한 공간으로 고분고분 따라 들어갔다.

    “괜찮을까?”

    불 꺼진 카페를 멀거니 바라보던 원우가 작게 혼잣말을 했다.

    “뭐가?”

    윤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이런 상황에도 태평한 그녀가 원우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뭐냐니? 주인이가 이독경이랑 단둘이 있잖아.”

    그 새끼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아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그는 뒷말을 꾹 삼켰다. 윤희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남자 친구를 떠보았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어? 아, 아니!!”

    원우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윤희가 안 그래도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을 더욱 치켜떴다.

    “웃기고 있네! 밖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빨리 다 불어.”

    험악한 기세로 몰아붙이는 여자 친구를 내려다보며, 원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오늘 너무 힘들어서 기운이 없다. 그 얘긴 내일 하면 안 될까?”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김윤희가 아니었다.

    “너 내가 궁금한 게 있으면 잠 못 자는 거 알아? 몰라? 밤새 괴롭혀 줄까?”

    “정말이야. 나 지금 쓰러질 것 같다고, 응?”

    그가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그녀가 홀쭉해진 남자 친구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래, 알겠어.”

    윤희가 웬일로 선선히 단념하고는 그의 손을 잡더니, 익숙한 건물 앞으로 이끌었다. 단골 찜질방이었다.

    원우가 목적지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오늘은 집에 가고 싶다니까....”

    잔뜩 토라진 목소리에 윤희가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씩 웃었다.

    “걱정 마! 장난 안 치고 곤히 재울 거니까. 대신 아침에 일어나면 나한테 다 말해 주기다?”

    악동 같은 야릇한 미소에 홀린 원우가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독경은 어둑한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약한 조명에 의지해 둘러보니 큰 탁자 하나와 긴 사물함 몇 개, 상자 등이 주변에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창고로 쓰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는 당연하게도 잘 알았다.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주인과 자신 둘뿐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런데 확신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섞여 있어도, 그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고.

    경쾌한 발소리와 은은한 라벤더 향이 그녀가 누구인지를, 독경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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