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제압 (2)
그사이 주인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운을 뗐다.
“죄송해서 어쩌죠? 재고가 다 떨어져서 이제 마감하려고 했거든요. 다음에 오세요.”
공손하지만 제법 단호한 음성이었다. 아마 저들이 매상을 올려 줘 봤자, 영업에 방해만 될 뿐이라 판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다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 술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에 다른 손님들도 슬슬 눈살을 찌푸리는 중이었다.
“그, 그래! 형, 우리 다음에 다시 와요. 주인아, 미안하다. 이만 갈게!”
원우가 주인과 윤희에게 손을 흔들며, 3학년 선배의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빈정거렸다.
“현주인, 네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툭하면 튕기고 지X이야! 저기 저 새끼한테 줄 커피는 있고, 우리한테 줄 건 없냐?”
남자가 사납게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멀뚱히 앉아 있는 독경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애꿎게 지목을 당했음에도, 불쾌해하거나 긴장하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의자 등받이에 느른하게 기댄 채, 이 모든 상황을 심드렁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물론, 속으로는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 가장한 여유로운 태도가 상대방의 화를 더욱 부추긴 모양이었다.
“야, 넌 선배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뭘 쳐 보고 있어, 이 새끼야!”
“아! 안녕하십니까?”
독경이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으로 잔을 입가로 가져간 뒤 빨대를 쪽 빨았다.
“아쉬우시겠습니다, 선배님. 여기 커피 진짜 맛있는데!”
밉살스럽기 짝이 없는 도발에 3학년의 눈이 희게 뒤집혔다.
“뭐? 저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때, 팔짱을 낀 채 관망만 하던 윤희가 입을 열었다.
“선배, 많이 취하셨어요. 오늘은 이쯤 하시고 쌓인 건 다음에 푸시죠? 독경 후배한테도 제가 알아듣게 잘 얘기해 둘게요. 원우야, 뭐 해? 빨리 선배님 택시 잡아 드려.”
“어? 어!”
멍하니 서 있던 원우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남자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그러자 3학년이 그를 밀치며 외쳤다.
“야, 너 안 일어나지? 그렇지 않아도 영 거슬려서 한번 밟아야지 싶었는데.... 잘됐다, 너 이 새끼 따라 나와!”
상대가 삿대질을 하며 시비를 걸자, 독경은 의외로 순순히 말을 따랐다.
그 순간, 윤희는 코앞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의 입꼬리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양, 입맛을 다시는 모양새였다.
‘어라? 뭐지?’
그녀가 제 눈을 의심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독경은 3학년 앞에 우뚝 섰다.
“따라갈 테니 앞장서시죠.”
“이독경!!”
그 말에 주인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그녀가 불안과 걱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독경은 주인이 자신을 염려해 준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뿌듯했다.
물론, 저 상냥하고 다정한 여인은 누구에게라도 저렇게 애간장이 녹을 것 같은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저런 눈을 제게만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러자 싸움을 걸어온 하루살이가 아주 조금은, 고마워졌다.
독경이 주인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며 환히 웃었다. 날렵하게 긴 눈매가 이때만큼은 부드럽게 휘었다. 아이처럼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였다.
이 와중에 저런 표정을 짓다니.... 주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따라 웃어야 할지, 말려야 할지 헷갈렸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 주려는 듯, 그가 나직이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 잠시만 얘기 나누고 올게요.”
“아....”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침착한 목소리에, 주인은 애꿎은 입만 벌렸다. 윤희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남자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니까 우린 빠지자.”
그 말에 주인이 제 친구를 돌아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이상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분명 이 사태를 정리하려 발 벗고 나섰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태도는 몹시 기묘했다. 방관하는 듯도 하고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한, 복잡한 의도가 엿보였던 탓이다.
윤희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주인을 향해 한쪽 눈을 살짝 깜박이며 신호를 보냈다.
눈치를 챈 주인이 벌어진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두 주먹을 꽉 쥐며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어느새 독경은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나갔다.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는 주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표정이 그녀의 뇌리에 또렷하게 박혔다.
으슥한 골목 한구석에 독경과 남자가 마주 보고 섰다.
다른 선배들이 독경의 등 뒤에 기세등등하게 자리 잡았다. 깍듯하지만 어딘가 오만방자한 자세로 일관하던 신입생을 다들 마뜩잖게 여기던 차였다.
뒤에 서 있던 원우가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형! 말로 해요, 말로! 우리가 무슨 고딩도 아니고, 이 나이에 싸움질이라니요! 말이 됩니까?”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른 3학년이 그의 어깨를 누르며 빠르게 속삭였다.
“야, 눈치 챙겨. 안 그래도 이독경 저 새끼, 건방지게 군다고 벼르는 놈들 많았으니까.”
“그, 그래도....”
원우가 땀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정작 당사자인 신입생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무감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있는 그를 보며,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야, 어디서 눈깔을 그렇게 떠? 빨리 안 까냐?”
“흠, 말 참 기네. 그냥, 먼저 한 대 때리시죠?”
독경이 낮은 음성으로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이죽거리듯 슬며시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제 왼뺨을 툭툭 치며 덧붙였다.
“이왕이면 이쪽을 때려 주십시오. 전 왼쪽 얼굴이 더 괜찮거든요.”
“하? 뭐, 이 새끼야?”
3학년은 황당했는지 헛웃음을 짓고는, 이내 어금니를 꽉 물며 온 체중을 실어 주먹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며 독경의 턱이 휙 돌아갔다.
원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고소하다는 양 비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이 X발 놈아, 하라는 대로 했으니 불만 없지?”
남자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상대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며 약을 올렸다.
독경이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입가에 손을 갖다 댔다. 손끝에서 피가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네, 적당하고 좋네요.”
“뭐? 뭐가 적당.... 억!!”
그 대꾸에 어이가 없다는 양 남자가 되물었다. 하지만 질문은 끝맺을 수 없었다.
독경이 순식간에 제 두툼하고 넓적한 손으로 남자의 뒷머리를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상대의 얼굴을 내리누르며 자신의 무릎을 세워 가격했다.
퍽!!
“윽!!”
둔탁한 타격음이 골목 안의 공기를 거세게 가르기 무섭게, 남자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나가떨어졌다. 손가락 틈으로 새빨간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 시작입니다, 선배님.”
독경이 바닥에 뒹구는 3학년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일으키더니, 건물 벽에 세게 처박았다. 쿵 하며 건물이 요란스럽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으으으....”
남자의 눌린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샜다.
“야, 이....”
놀란 구경꾼들이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 성큼 다가오자, 독경이 가로등 아래서 뾰족한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나직하게 경고를 날렸다.
“이 꼴 나기 싫으면 오지 마세요, 선배님들.”
그가 보란 듯이 뒤통수를 짓이기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그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벽에 박힌 얼굴이 거친 표면에 갈리며 움직였다.
“아, 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곧바로 뒤따랐다. 남자의 손발이 허공에서 발버둥 치다, 이내 부들부들 떨렸다.
벽돌에 새겨진 희미한 핏자국을 보며, 모두 그 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시비를 건 선배는 몸깨나 쓰기로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본인보다 체격이 큰 신입생에게 덤볐던 것이다.
하지만 허우대만 멀쩡할 뿐 조용히 도서관만 들락거리는 샌님 같은 녀석에게 이렇게 무참히 밟힐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통증으로 혼미한 남자는 물론, 일행까지도 무시무시한 힘의 격차에 압도당한 채 말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이 혼돈의 시발점인 독경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싸움은 기선 제압이므로. 그리고 싹수는 밟을수록 좋았다. 이왕이면 뿌리째 뽑는 것이 최고였다.
게다가 천성 또한 완벽을 추구했기에, 더욱 철저하게 상대를 짓밟는 것을 선호했다. 비열하고도 잔인했지만, 그에게 딱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독경이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 사람들 한가운데로 질질 끌고 왔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모든 이의 시선이 쫙 펼친 거대한 손바닥에 몰렸다. 그 순간, 그가 3학년의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철썩!!
뺨을 맞은 남자의 얼굴이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연달아 다른 쪽 뺨도 딱딱한 돌덩이 같은 손등에 부딪혔다. 그의 턱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푹 꺾였다.
독경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선배가 됐으면....”
철썩!
“선배답게....”
철썩!
“나잇값을 해야죠?”
철썩!
“안 그래요?”
내뱉는 말투는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부드럽고 나긋하기 그지없었으나, 쉴 새 없이 휘갈기는 손길은 지나치게 가혹했다.
남자의 상처 난 양 볼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온몸이 그에 맞춰 속절없이 흔들렸다.
철썩!
다시 찰진 마찰음이 골목 안에 퍼졌다.
“다시는 주인 선배나 다른 사람한테 치근덕거리지 마요. 형은 자존심도 없어요?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독경이 뻔뻔한 낯짝으로 잘도 지껄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