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3화 (3/76)

#3화. 제압 (1)

물론, 그런 독경을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개, 주인에게 눈독을 들이던 종자들이었다. 그가 가끔 담배를 피우러 건물 밖으로 나가면, 그들은 억지스러운 이유를 붙이며 따라와 시비를 걸고는 했다.

그때마다 독경은 예의 바르지만 대수롭지 않게 그 시비들을 쳐 냈다. 하지만 눈앞에서 알짱대는 하루살이가 힘이 약하다고 해서,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담배 필터를 입술로 지그시 물며 생각했다.

‘언제 한번 정리해야 하는데....’

***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날도 독경은 어김없이 샤워를 한 뒤, 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본다고 했더라?’

관심도 없어 한 귀로 흘렸던 영화 제목을 떠올리려 애쓰며, 그는 늘 그들을 만나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자신을 맞아 주던 주인과 일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텅 빈 공허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낯선 광경에 독경이 가로로 긴 두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동안 제게 일어났던 일들이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지면서, 눈앞의 풍경이 지독히도 생생하게 피부에 닿았다.

주인을 만난 순간이,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사실은 자신의 몽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절망과 공포가 그를 훅 덮쳤다.

“아....”

미세하게 벌어진 입술에서 허탈한 신음이 터졌다. 그때였다. 힘없이 쥐고 있던 휴대 전화에서 미약한 진동이 울렸다.

독경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액정 위로 ‘현주인 선배’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깜박였다.

“꿈은 아니었군.”

그가 전화를 받으며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을 쓸었다.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 순간, 독경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자신은 절대 주인을 모르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네, 선배.”

그가 뜨겁게 잠긴 목구멍 틈을 비집고 간신히 소리를 냈다. 수화기 너머로 약간은 소란스러운 소음이 들리더니, 잠시 뒤 어딘가 몹시 산만하고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독경, 지금 정문에 있어?]

“네, 막 도착했습니다.”

[아,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모임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주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독경이 나직이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그럼, 다음에 보죠.”

정말로, 그는 괜찮았다. 모든 일이 한 줌의 신기루로 사라지는 것보다, 하루쯤 바람을 맞는 편이 백만 배쯤 나았으니까.

[미리 연락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워낙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이 시간에 알바를 하는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내가 대타를 해 줘야 하거든.]

알바? 교통사고? 대타? 주인이 묻지도 않은 사정을 우르르 쏟아 냈다. 독경이 조금 흥분한 것 같은 그녀를 다독였다.

“전 정말 괜찮으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죠.”

[고마워....]

상대의 배려에 주인이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고는 이대로 전화를 끊을까 말까 망설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그럼, 와서 커피 마시고 갈래? 헛걸음하게 한 게 미안해서.... 윤희도 지금 여기 있거든.]

희미하게 흐리는 말끝에 독경은 잠시 침묵했다. 가끔 깜짝 놀랄 만큼, 그녀는 자신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순수한 선의인지, 호감의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짧은 정적이 부정적인 신호라 여겼는지, 주인이 멋쩍게 입을 열었다.

[혹시 부담되면 안 와도....]

“아니요, 가겠습니다! 위치만 알려 주십시오.”

그가 재빨리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낮게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확실하지는 않았다.

[학교 후문으로 나오면 오른쪽에 편의점 있잖아? 그사이 골목으로 오십 미터쯤 걸어오면 초록색 간판이 보일 거야. 그리로 들어오면 돼.]

“네, 어딘지 대충 알 것 같네요. 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독경이 가방을 고쳐 메고는 발길을 돌렸다. 단아하게 앞치마를 두른 자태로 커피를 내리고 있을 주인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녀가 일하는 카페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여름 잎사귀 같은 청록색의 고풍스러운 외관이 주택가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카페는 흔한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실내 장식은 사장의 고상한 취향이 한껏 반영돼 있었다.

새하얀 색의 깔끔한 탁자와 의자가 제법 너른 공간에 잘 배치돼 있었고, 벽면 한쪽을 그림 몇 점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기다 키가 큰 식물들이 곳곳에 넓적한 이파리를 잔뜩 늘어뜨리고 있어, 마치 관리가 잘된 식물원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독경이 입구에 서서 낯선 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어이, 독경 후배!”

어딘가 건들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희였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알은체를 한 뒤, 다가가 물었다.

“원우 선배는요?”

“아, 걘 3학년들이랑 술 마시러 갔어. 이번에도 빠지면 완전히 찍힌다나 뭐라나?”

윤희가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며, 눈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독경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주인 선배는...?”

“저기 있어!”

그녀가 손으로 카페 안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상품 진열대 너머로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주인이 분주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독경이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의외네요. 주인 선배가 이런 데서 알바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왜? 재벌가 따님은 이런 데서 용돈 벌면 안 돼?”

윤희가 턱을 괸 채 빙글빙글 웃으며 톡 쏘았다.

그랬다. 그의 눈에 주인은 곱게 자란 공주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른 채 온실 안 화초처럼 자랐으리라 여겼던 그녀가 학업과 일을 병행하고 있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제야 주인이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졌던 이유를 알게 된 독경이 무심코 고개를 까닥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일깨운 것은 윤희의 혼잣말이었다.

“내가 쟤처럼 얼굴도 예뻐, 공부도 잘해, 용돈은 알아서 해결해. 그러면 우리 엄만 날 업고 다닐 텐데. 저놈의 집구석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저런 기특한 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원.”

그녀가 혀를 끌끌 차며 연민 어린 눈길을 친구에게 던졌다.

독경이 그런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다, 심상한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눈매는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선배랑 주인 선배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셨다고요?”

“응. 내내 친했던 건 아니고, 고2 때 같은 반 되면서부터 가까워졌지.”

“그렇군요....”

그때, 두 사람 사이로 흰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주인이었다.

그녀는 막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독경 앞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모임 취소돼서 미안해. 너무 급하게 연락을 받는 바람에 경황이 없었거든....”

주인의 가지런한 눈썹이 눈에 띄게 축 처졌다. 독경이 서둘러 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근데 지금은 안 바쁘십니까?”

그의 질문에 그녀가 카페 안을 슥 둘러보더니,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일단, 주문받은 음료는 다 나와서 잠시 쉬어도 돼. 그나저나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마지막 물음은 윤희를 향한 것이었다. 지목을 받은 그녀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네 험담?”

“김, 윤, 희.”

주인이 제 친구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불렀다. 그 표정과 말투가 제법 지엄해서, 호명된 당사자는 물론이고 독경까지 흠칫 놀랐다.

그녀가 차분하지만 어딘가 냉랭하게 경고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쳇, 내가 뭘....”

윤희가 서운한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이 빙긋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삐치지도 말고. 내가 케이크 살게. 뭐 먹고 싶어?”

“아서라, 알바비 그거 얼마나 된다고 벗겨 먹냐?”

윤희가 약간은 누그러진 기세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주인이 계산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 이번에 과외비 받았어.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 독경 후배도 아직 저녁 전이지? 어떤 걸로 줄까?”

주인이 예의 친절한 미소를 띠며, 그를 빤히 보았다.

그 시선에 쑥스러워진 독경이 눈길을 슬쩍 피하며 입을 열려는데, 한 무리의 남성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안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입구 쪽으로 쏠렸다.

“어? 정말 현주인 있네?”

무리 중 한 명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주인을 가리켰다. 뒤에서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원우가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진정시켰다.

“그렇다니까요! 일단 자리에 앉아서 메뉴부터 확인하시죠?”

“원우야?”

윤희가 뜬금없이 등장한 자신의 남자 친구를 불렀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더듬더듬 사정을 설명했다.

“아, 그게 선배들이 주인이가 일하는 데 매상을 올려 주고 싶다고 해서.... 2차로 여기 왔어....”

“그래그래. 현주인, 우리가 너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 뭐가 제일 비싸냐?”

남자 중 하나가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며, 말을 가로챘다.

독경도 아는 얼굴이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주인의 맞은편에 앉아 껄떡대던 체구가 우락부락한 3학년 선배였다.

‘성가신 하루살이 새끼네....’

독경이 진한 눈썹을 불경스럽게 꿈틀거렸다. 어쩌면 지금이 그가 기다려 온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가 상대의 목덜미를 공격할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숨겨 둔 발톱을 조금씩 드러내며, 칼날을 갈 듯 혀끝으로 자신의 송곳니를 가볍게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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