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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주인-2화 (2/76)
  • #2화. 접근

    그러나 금방 끝나리라 예상했던 사냥은 좀처럼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에게 다가가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탓이다.

    대신 독경은 우연한 기회에, 그녀와 단짝인 김윤희와 제법 말을 섞을 수 있었다. 윤희는 주인과 같은 학생회 소속으로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또 붙임성도 좋은 편이어서, 모두가 약간 어려워하는 그를 서슴없이 대하고는 했다.

    ***

    어느 날 오후, 도서관에서 막 나오는 그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어이, 이독경 후배님!”

    통통 튀는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희였다.

    “아, 윤희 선배.”

    독경이 무뚝뚝하게 대꾸하고는 슬쩍 옆을 곁눈질했다.

    그녀 옆에는 주인이 여상하게 서 있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하고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가 속으로 혀를 쯧 찼다. 그때, 윤희가 한심하다는 양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거야? 동갑이니까 편하게 이름 부르자니까?”

    “전, 선배랑 편하게 지내기 싫은데요?”

    독경이 평소답지 않게 빙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 그 농담에 윤희가 도끼눈을 뜨며 바락 외쳤다.

    “이것 봐라? 공격!!”

    그녀가 제가 들고 있던 상자 더미를 그에게 우르르 떠넘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주인이 들고 있던 상자도 모조리 옮겨 버렸다.

    얼떨결에 상자를 한 아름 받은 독경이 황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뭡니까? 이건?”

    “뭐긴 뭐야, 학교에서 나눠 주는 홍보물이지. 날 농락한 죄로 그걸 과방에 갖다 놓아라, 후배여!”

    윤희가 빨리 사라지라는 듯, 그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멀뚱히 서 있는 주인의 팔짱을 끼며, 흐흐 웃었다.

    “저 덩치를 아꼈다 뭐 해. 이럴 때 써먹는 거지. 그렇지, 주인아? 우린 빨리 도서관 가자.”

    그 말에 주인이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윤희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 쳤다. 마치 성질 나쁜 작은 개를 보호자가 혼내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 모습에 독경이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김윤희, 후배 괴롭히면 못 써. 그리고 도서관엔 너 먼저 가 있어. 나 사물함에 교재 두고 왔어.”

    말을 마친 그녀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자 윤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알았어. 내가 자리 맡아 둘 테니까, 빨리 와야 해!”

    손을 흔들며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친구를 바라보던 주인이 독경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그가 들고 있던 상자를 자신이 들 수 있을 만큼 가져갔다.

    뜻밖의 행동에 독경이 약간 말을 더듬었다.

    “아! 괘, 괜찮습니다. 별로 안 무겁습니다.”

    그녀가 앞장서 걸으며 입을 열었다.

    “윤희가 원래 사람들이랑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어서, 가끔 실수하거든.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아니요, 별로 그렇진 않습니다.”

    독경이 재빨리 그녀와 나란히 발을 맞췄다. 그의 굵직한 팔뚝에 벨벳처럼 촘촘하고 보드라운 긴 머리카락이 사르륵 스쳤다.

    주인이 특유의 차분하고 고아한 음성으로 대화를 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환영회 때 고마웠어. 실은, 그 자리가 좀 거북했었거든....”

    “아....”

    독경이 대답 대신, 낮게 신음했다.

    ‘눈치가 전혀 없는 편은 아닌가 보군.’

    그가 생각했다. 상대가 별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있자, 주인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까무잡잡하고 선이 굵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감도는 새까만 눈동자에 독경의 얼굴이 꽉 들어찼다.

    자신의 당황한 표정이 잘 닦인 거울처럼 선명하게 반사되는 눈을 보며,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크고 단단한 목젖이 위아래로 묵직하게 움직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손을 뻗어 저 눈을 가지고 싶다는,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단전 아래서부터 들끓기 시작했다.

    등이 갑작스레 뜨거워지고, 허리가 곧추섰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독경은 주인의 여리고 섬세한 목덜미를 움켜쥐려, 천천히 우악스러운 손을 뻗었다.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행동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갈 곳 잃은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다,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겁습니다. 그냥 제가 들겠습니다.”

    목 안이 꽉 잠긴 것 같은 목소리가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주인이 든 상자가 독경의 품으로 하나씩 옮겨졌다.

    주인이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깜박거리는 눈망울에서 약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호기심이 읽혔다.

    성급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억누를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했다.

    독경에게 이런 맹렬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가지고 싶어 안달 난 사냥감이라니, 이토록 손에 넣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피식자라니....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하면 온 신경이 그녀에게로 쏠리는 것을,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었다.

    “젠장!”

    독경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꾸겼다. 짜증스러웠다.

    방심한 사이 너무 빨리 불순한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잘 감춰 왔다고 믿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 것 같아 허탈했다.

    그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어둑한 자취방 한구석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조급한 마음을 갈무리한 뒤, 느긋하게 담배를 죽 빨아들였다.

    사냥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고, 기회는 또 잡으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경은 지칠 줄도, 포기할 줄도 모르는 포식자였다.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빈손으로 물러날 리 없었다.

    게다가 목표물은 스무 해 남짓의 인생에서 가장 탐나는 것이 아니던가.

    ***

    며칠 뒤, 독경은 점심을 먹기 위해 복작한 학교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막 걸음을 떼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독경 후배! 혼자 왔어?”

    슬쩍 뒤를 돌아보니, 윤희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옆에는 그녀의 동기이자 남자 친구인 서원우가 뚱하게 서 있었다.

    “혼자 왔으면 같이 먹자. 좀 이따 주인이도 올 거야.”

    원래는 거절할 마음이었지만, 뒷말에 독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따랐다.

    “독경 후배는 왜 맨날 혼자야? 아직 동기들이랑 안 친해졌어?”

    윤희가 숟가락 가득 흰 쌀밥을 퍼 담으며 물었다.

    “글쎄요. 별로 친해질 계기가 없어서요. 나이도 다르고....”

    독경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이가 다르면 초반엔 좀 어색하지. 근데 꼭 그 탓만은 아닌 것 같은데....”

    원우가 반찬으로 나온 불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맞은편을 힐끗거렸다.

    눈앞의 신입생은 잘생겼지만, 어딘가 차갑고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키도 훤칠하고, 체구도 건장했다.

    여자 친구가 아니었으면, 절대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유형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윤희는 평소처럼 스스럼없이 그를 대했다.

    “그럼, 이따 우리랑 같이 영화나 보러 갈래? 마침 표가 한 장 남는데.”

    “글쎄요?”

    독경이 다시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독경 후밴, 영화 별로 안 좋아하나 봐?”

    그때, 주인이 그의 옆에 앉으며 싱긋 웃었다.

    “우린 가끔 금요일에 모여서 영화 보거든.”

    “그렇습니까?”

    독경이 강경하게 고수하던 태도를 약간 고치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윤희가 악동 같은 얼굴로 씩 웃었다.

    “혹시, 공포 영화 잘 봐? 우린 그런 거 좋아해.”

    “뭐, 싫어하진 않습니다만?”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저녁 무렵, 독경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한가로운 교정을 가로질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주인과 윤희, 원우는 이미 정문에 모여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서 와, 이독경.”

    주인이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와 상냥한 눈웃음에 독경은 제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늦겠다, 빨리 가자!”

    윤희가 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세 사람이 고른 영화는 온갖 악취미로 점철된 괴상하고 끔찍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독경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살 너머로 주인의 얼굴을 보느라 고개를 돌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얼굴색은 매번 다르게 물들었다.

    알록달록한 빛깔들이 반짝이며 우수 어린 긴 속눈썹 끝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고집스럽게 우뚝 솟은 콧날 위를 스쳤다.

    황홀한 빛의 향연이었다.

    그는 이 순간이 마치, 기이하지만 몹시도 아름다운 환상처럼 느껴졌다.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았다.

    독경은 화면이 붉게 물들고 비명이 난무해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채, 숨을 죽이고 주인만을 응시했다.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주인은 달랐다. 그녀는 홀로 이 공간을 점유한 사람처럼 상대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영화에만 집중했다.

    주인이 독경과 눈을 맞춘 것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였다.

    “어땠어?”

    “뭐....”

    상대의 질문에 그가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독경은 단 한 장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뭐, 봤다 한들 반응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테지만.

    난처한 그를 구한 사람은 윤희였다.

    “우리 술 마시러 가자!!”

    흥을 주체 못 한 그녀가 목청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경은 꽤 자연스럽게 주인의 무리와 어울리게 됐다.

    그리고 그 몇 주 동안, 그는 제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안락한 시간을 보냈다.

    그 안에는 사고를 치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아버지도, 지긋지긋하게 찾아오는 빚쟁이들도, 폭력으로 도전하는 동급생들도 없었다.

    독경은 무리에서 벗어난 늑대처럼 늘 혼자였고, 또 스스로도 그편이 편했다. 그에게 타인은 성가시거나 이용할 가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런 그에게 주인 일행은 순수한 즐거움을 알려 준 존재들이었다. 물론 대개는 역시 귀찮았지만, 그런데도 신기하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친구’ 비슷한 것을 가져 보기도 했고, 또래 집단이 주는 ‘소속감’이 생각보다 안정적이기도 했다.

    그 무렵 독경은 그저 수업을 마친 뒤, 적막이 감도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러고는 지하에 있는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을 한 다음, 샤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런 장식도 로고도 없는 검은색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은 쓸쓸했지만 그만큼 평온했다.

    이 일상은 금요일이 오면 조금 달라졌다.

    금요일이면 독경은 가볍게 샤워를 하고는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툭툭 말리며 정문 쪽으로 걸었다.

    그러면 윤희와 원우가 시끌벅적하게 그를 맞았고, 주인이 그린 듯 어여쁜 웃음으로 눈을 맞췄다. 이상하게도 독경은 그 순간이, 변치 않고 이어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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