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의 주인-1화 (1/76)

#1화. 사슴

마침내, 고대하던 그날의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독경은 창 앞에 우뚝 서서 어슴푸레 밝아 오는 하늘을, 칼날처럼 가로로 긴 예리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현주인과 함께 이곳을 떠나는 날이었다. 그녀는 늘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영민한 그는 그 사실을 빠르게 간파했다.

이 비밀스러운 여정이 끝나면,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오롯이 서로만을 의지한 채 살아갈 것이다. 얼마나 완벽한 삶이란 말인가.

독경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인생을 목전에 두고는, 승리자처럼 교만하게 미소 지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말이다.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모양이 단순한 반지 한 쌍이 나란히 담겨 있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면 독경은 반지를 내밀며 주인에게 청혼할 참이었다.

그녀의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에 반지를 끼울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아직,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는 상자를 다시 바지에 넣으며, 새삼 비장하게 다짐했다. 자신과 그녀 앞을 막아서는 모든 장애물을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고.

“선배!”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던 독경이 멀리서 다가오는 주인을 불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가 역력했다.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그가 슬쩍 손을 잡았다. 주인이 애써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독경의 걱정 어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라, 공항으로 향했다. 평일의 도로는 제법 한산했다. 뻥 뚫린 길처럼 모든 일이 순조롭게 느껴졌다.

그들 뒤로 검은색 차량 두 대가 따라붙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독경!”

주인의 새된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무참히 깨뜨렸다. 독경이 어금니를 빠드득 씹으며 소리쳤다.

“꽉 잡아요!”

그 말에 그녀가 차창 위에 달린 손잡이를 으스러질 듯 꽉 붙잡았다. 그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두 사람의 몸이 뒤로 밀리며, 차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검은 차들도 덩달아 속력을 높여 따라왔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독경이 차를 급정거한 뒤, 재빨리 운전대를 돌려 방향을 바꿔 달아났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뿐, 정체 모를 검은 차들은 어느새 그들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잔뜩 약이 오른 상대는 토끼를 사냥하는 성난 개들처럼 울부짖으며, 더욱 거칠게 두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독경의 이마 위로 굵은 핏줄이 툭 불거졌다. 주인의 크고 까만 눈망울이 조금씩 흔들렸다.

“...다, 내 잘못이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자책으로 가득한 주인의 말에 독경이 화가 난 듯 쏘아붙였다. 그는 결단코, 단 한 번도 그녀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말이다.

그때, 그런 그를 시험이라도 하듯 거대한 불운이 찾아왔다. 그들 앞을 대형 화물차가 덮친 것이다.

끼이이익!! 쾅!!

날카로운 마찰음과 둔탁한 충격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며, 두 사람이 탄 차가 종잇장처럼 순식간에 구겨졌다.

온몸의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이 독경을 향해 엄습했다. 그런데도 그는 이를 악물며 주인을 향해 손을 뻗어 숨결을 확인하려 했다.

잠든 것처럼 얌전히 눈을 감은 그녀의 이마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생사를 알아야 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했기에.

독경은 설령 그곳이 지옥이더라도 어디든 그녀를 따라나설 준비가 돼 있었고, 후회 따위를 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주인과 처음 눈을 맞닿은 그때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독경은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깊고 맑은 검은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담던 그 영원 같은 찰나를.

주인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윽고, 그를 집어삼켜 버렸다. 온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주인을 잃은 반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독경이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그녀가 숲속 한가운데 고고히 서 있는 한 마리 사슴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크고 깊은 까만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마주쳐 왔을 때, 자신의 느낌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독경은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좀 더 오래 자신에게 머물기를 바랐지만, 무심하게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낯선 후배에게 짓던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도 신기루처럼 동시에 사라졌다.

그는 멍하니 서서, 잠시 고민했다.

하얗고 기다란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면 저 눈이 내게 머무를까? 아니면, 아예 저 두 눈을 뽑아 가질까?

그리하면 저 보석 같은 눈에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오롯이 새겨질 텐데....

그것참 보기 좋은 광경이겠구나 싶어, 독경은 남몰래 작게 미소 지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뾰족한 송곳니가 설핏 드러났다.

아주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포식자가 갖는 환희가 그 안에 그득 들어차 있었다.

현주인, 한국대 경영학과 2학년.

그녀는 학내에서 이미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또래답지 않게 성숙하고도 서늘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미인인 데다, 태성그룹 둘째 딸이라는 배경도 한몫했다.

태성그룹은 국내 제약 부문에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중견 기업이었다.

정작 본인은 제 집안 배경을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이만큼 흥미를 끄는 얘깃거리가 없다는 양 끊임없이 대화에 오르내렸다.

독경은 입술 사이로 담배를 지그시 물며 선배들과 동기들이 그녀에 대해 떠드는 말들을 조용하게, 하지만 주의 깊게 듣고는 했다.

“하, 진짜 한번 들이대 보고 싶은데 너무 철벽이라....”

2학년 남학생 중 하나가 눈을 음침하게 치켜뜨며 중얼거렸다. 옆에 서서 함께 담배를 태우던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조소를 머금으며 욕설을 뱉었다.

“미친놈, 네 면상에 현주인이 가당키나 하냐? 거울 좀 보고 와라.”

“왜? 의외로 나 같은 놈이 취향일 수 있지. 지난번에 정외과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3학년 새끼 하나도 걔한테 차였잖아.”

“멍청아, 그 정도 되니까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거야. 넌 그냥 입구 컷임.”

“야, 이씨....”

뿔테 안경의 남자가 얕보듯 킬킬거렸다. 그러자, 상대가 벌게진 얼굴로 짜증을 내려 시동을 걸었다. 재빨리 주제를 돌려야 했다.

안경을 쓴 남학생이 그들 옆에 서서 묵묵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신입생에게 말을 걸었다.

“너, 일 년 재수했다며? 그럼, 우리랑 갑이네? 편하게 말 놓을래?”

“아닙니다. 나이는 같아도 선배신데, 그냥 존대하겠습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깍듯하게 울려 퍼졌다. 그 답변이 만족스러웠는지 남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눈빛이 음흉한 2학년이 신입생의 단단하고 널찍한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자식! 그래, 말은 좀 더 친해지면 놓자. 이따 저녁에 환영회 올 거지?”

그 말에 독경은 반쯤 피운 담배를 꺼,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으며 답했다.

“네.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따 저녁때 뵙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는 그를 향해 두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독경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조금 더 있다가는 천박하게 놀리는 저 주둥아리들을 찢어발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고 신중하게 자신의 충동을 억제했다.

그에게 타고난 기질 중 가장 큰 미덕은 인내와 끈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훌륭한 사냥꾼의 자세이기도 했다.

먹잇감을 향한 집요한 탐색, 완벽한 기회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신중함,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을 때 달려드는 대범한 행동력.

독경은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춘, 날 때부터 잔인하고 냉혹한 맹수였다.

하지만 벌써 이빨을 드러내기는 이른 시기였다. 다른 이들에게도, 목표물에도.

게다가 알다시피 사슴은 경계심이 강한 동물 아니던가. 지금은 그저 주변을 맴돌며 조금씩 영역을 허무는 시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독경은 학교에서 단정하고 성실한 모범생인 것처럼 굴었다. 과묵하지만 모두에게 정중한 신입생. 그것이 딱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인상이었다.

그는 주인에게도 똑같이 행동했다. 특별히 더 신경을 쓰지도 의식을 하지도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주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 일관하던 독경도 때때로 그녀가 곤경에 처한 순간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주인은 뭔가 곤란한 상황을 마주하거나 깊은 생각에 잠길 때, 길고 가는 손끝으로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럴 때면 독경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근처로 다가가, 그녀를 돕고는 했다. 지금처럼, 발정 난 남자 새끼들이 억지로 술을 먹이려 하는 경우 말이다.

“선배님, 저쪽에서 윤희 선배님이 찾으십니다.”

남자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주인의 어깨를 그가 톡톡 두드렸다.

“그래? 고마워....”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하지만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불편한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 여겼는지, 독경에게만 들릴 정도로 은밀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이 그의 귓가에 간질거리며 닿았다.

“야, 현주인! 어디 가냐?”

맞은편에 앉아 반쯤 풀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체격이 다부진 3학년 남학생이 외쳤다. 그러자 독경이 재빠르게 그녀가 일어선 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소주병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이독경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이름을 들은 다른 남학생이 따르는 술을 받으며 알은체를 했다.

“네가 올해 과탑이구나? 새끼, X나 똘똘하게 생겼네?”

주인이 빠진 자리에서 시답지 않은 농담들이 오갔다. 독경은 그 너저분한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제 반듯한 뒤통수에 온 감각을 집중했다.

멀찍이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간질거리는 그 시선을 느긋하게 음미하며 이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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