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는 지루한 침묵만이 흘렀다. 어찌나 심심했는지, 아드리아나는 디에고의 마음을 그렇게까지 짓밟지 말 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시녀들은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마차가 좁다는 핑계로 따로 탄 데다가, 깜박 잊고 읽을 책마저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꼼짝없이 이대로 몇 시간이고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조금 미련이 남은 눈으로 디에고의 무릎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책에 손을 올리고 있는 디에고도 슬쩍 바라보았다.
언제나 홀린 듯 그녀에게 붙박여 있던 디에고의 푸른 눈은 이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상황인데도 어쩐지 거슬렸다.
그렇게 길고 긴 침묵 속에서 황녀가 탄 마차가 테네리페 성에 도착했다. 느지막한 황혼이 내릴 무렵이었다.
“황녀 전하, 그리고 올리바레스 소공작.”
아드리아나는 마차의 문을 열어 주는 낯선 청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습관처럼 상대를 살폈다.
“영윤은 누구지?”
“발데페르의 라슬로입니다. 손을 주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곧은 자세, 검은 머리카락과 다정한 다갈색 눈동자, 반듯한 태도와 제법 말끔한 얼굴. 청년과 어른의 경계에 있는 영윤에게선 싱그러운 여유가 묻어났다.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뺨을 조금 붉히며 그 단단한 손을 맞잡았다.
“발데페르?”
그 와중에 드물게 들었던 가문을 되짚듯, 다시 묻는 것도 잊지 않고.
“생소하시리라 짐작합니다. 저희 가문은 중앙에 진출하지 않기로 서약하였으니까요.”
아.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저 가문의 장자가 찬탈자를 지지했었다고 했다. 미쳐서 단독으로 저지른 짓이기에 연좌제를 적용하지는 않았다고, 언뜻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럼에도 스스로 모든 작위를 반납하고 지역의 조그만 영지만 다스리며 산다고….
“아.”
그녀의 반응에 라슬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폐하께서 배려해 주셔서 테네리페 성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드리아나는 그 말만으로도 행간을 짐작했다. 황족도 아닌 이가 황족도 없는 성에 머문다는 것은, 시종장의 일을 배운다는 뜻이었다. 수도의 황궁이라면 대단한 명예겠지만, 글쎄, 테네리페 성의 시종장은 권력은 없고 명예만 있는 쭉정이었다.
그 자리를 좋다고 받아들였단 말이지?
“흐음.”
아드리아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준수하게 생긴 얼굴, 시종장이 될 정도로 명석한 머리, 그러면서도 야심과 야욕은 없어 보이는 순한 낯짝, 훗날 뒷배가 될 만한 가문도 이미 만신창이.
“…영윤.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저만하면 그녀가 장성하였을 땐, 나이가 들어 들러붙는 날파리도 없을 터였다. 그래 봐야 서른 남짓일 테지만, 아드리아나의 기준으로 서른은 굉장한 어른이었다. 계산은 빠르게 튀어나왔다. 아드리아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앞으로의 일정에서 날 수행하도록 해.”
그녀는 보란 듯이 힘주어 라슬로의 손을 붙잡았다. 라슬로는 곤란한 듯 웃으며 디에고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아드리아나의 재촉에 못 이겨 발걸음을 떼었다.
“…….”
디에고는 망연한 눈으로 제게서 멀어지는 아드리아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내 그들이 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제게는 단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던 접촉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도 쉽게 내어주면서도.
디에고의 눈매가 서럽게 일그러졌다. 문득 올라간 시야에 발데페르 영윤의 머리가 보였다.
“…아.”
그제야 처음 보던 순간부터 그가 내내 거슬렸던 이유를 깨달았다. 라슬로의 머리카락은 흑색이었다. 그와는 달리.
아드리아나는 근래 드물게도 흡족했다. 모든 것이 라슬로 덕분이었다. 그는 역사에 대해 아주 박식했으며,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간혹 던지는 재치 있는 농담은 배를 잡고 깔깔 웃게 만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억양과 태도는 또 어떻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오래된 귀족 가문 특유의 기품과 고결함이 묻어났고, 목소리에서는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편안한 분위기가 흘렀다.
매번,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디에고와는 달리.
분명, 처음 테네리페 성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라슬로는 디에고를 떼어 내기 위해 아무렇게나 붙잡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중에는 디에고의 존재마저 종종 잊었다. 디에고를 알게 된 이후로 이렇게까지 소공작을 신경 쓰지 않았던 건 처음이었다.
나중에는 하다 하다 라슬로가 외국어를 두 개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외국의 사절들을 대하는 건 황제인 제가 다 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황녀.”
“어머니!”
부드러운 음성에 아드리아나는 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활짝 웃었다. 황후가 웃으며 팔을 활짝 펼치자, 아드리아나는 제게 조금 높았던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곧장 황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아드리아나는 깊은 만족감에 숨을 들이쉬며 엘레나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제 어머니의 품에서는 늘 그렇듯 다정하고 깨끗한 라벤더 향이 났다. 그 위로 희미하게 묻어나는 아버지의 서늘한 향까지도, 평소의 그대로였다.
황녀는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려 제 어머니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버지께서 찾으셨던 일은요? 잘 해결되었어요?”
“그래. 네 귀여운 얼굴도 얼마 못 보고,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그래도 내내 의젓하게 있었지?”
“그럼요!”
황후의 품에 안겨서 소곤대고 있자니, 어느새 조용히 일어나 있던 라슬로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서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
괜히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눈치 빠르게 사라지는 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라슬로의 뒷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던 아드리아나는, 애정을 듬뿍 담은 눈으로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아버지는요? 이번에 같이 내려오신 거예요?”
“네 아버지께선 바깥 정원에 계셔. 지금 나가 볼래?”
“좋아요!”
“그런데….”
엘레나의 청회색 눈동자가 서고 안을 가볍게 훑었다.
“너와 함께 왔다던 올리바레스 소공작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
“둘이 싸웠니?”
“싸우기는요. 그런 것은 아니에요.”
아드리아나는 콧잔등을 가볍게 찡그렸다.
“그냥…. 모르겠어요.”
아드리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엘레나는 아드리아나의 손을 붙잡고 복도를 걸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무리 그래도 네 계승식을 축하하기 위해 와 준 친구인걸.”
“그건, 알지만….”
“그 소공작이 싫니?”
“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는 말은 아드리아나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무능하고, 멍청해 보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를 떠올릴 때면, 그녀는 가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게, 왜일까?’
아드리아나의 귀여운 얼굴이 때 이른 고민으로 잔뜩 찌푸려지자, 황후가 나직하게 소리 내며 웃었다.
“소공작은 널 되게 좋게 보는 모양이던데.”
“…으.”
투덜거리며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에 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계단의 맨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무언가가 파드득 움직인 것은. 자세히 보니, 후드를 코 앞까지 뒤집어쓴 사내애였다.
그리고 테네리페 성을 다 뒤져도, 저 나이대의 사내애는 디에고 하나뿐이었다.
“…….”
아드리아나의 눈매가 가늘어지려는 순간, 디에고가 계단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필사적일 정도로 전속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니, 제가 뭘 했다고….
당황한 것은 찰나였고, 아드리아나의 제비꽃색 눈동자가 일그러진 것은 순간이었다. 왜 도망가? 제가 먼저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저렇게 괴물 보듯 피할 이유가 있나? 그야말로 평생 두 번 다시 마주하지도 않을 것처럼….
‘평생 안 본다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드리아나는 엘레나의 손을 놓고 전속력으로 디에고의 뒤를 추격했다. 쫓아오는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디에고가 화들짝 놀라며, 더더욱 빠르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아!”
그러다 결국 제풀에 발이 꼬여 볼썽사납게도 나동그라졌다. 툭 튀어나온 돌에 무릎이 찍히기라도 했는지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꼴이 우스웠다. 그 와중에조차, 후드를 붙잡고 있던 손은 죽어도 놓지 않은 채였다.
“허억….”
꼴에 사내애라 그런지, 달리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겨우 따라잡고 나니 숨이 조금 찼다. 아드리아나는 헐떡이며 디에고의 앞에 서서 양손을 허리춤에 척 얹었다.
“왜, 도망가?”
흠칫, 몸을 굳혔던 소공작이 겨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시, 신경 쓸 필요 없, 없잖아….”
“얼굴은 왜 또 가려? 그 지저분한 후드는 대체 뭐야?”
“…….”
“너, 왜 나 안 봐?”
평소라면 얼빠진 얼굴로 눈을 떼지도 못하던 인간이, 이제는 찰나라도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볼만했다. 디에고는 파들거리는 손으로 후드를 더욱 꽉 붙잡은 채로, 가련하게도 쓰러진 자세 그대로 숨만 몰아쉬었다.
“…….”
그 기막힌 꼴 서서히 열이 올랐다. 그러다 불현듯, 제 얼굴만 망치면 네 곁에 있을 수 있냐던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드리아나의 얼굴이 굳은 것도 그 찰나였다.
“너, 설마….”
아드리아나는 기막힌 숨을 내뱉으며 그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디에고는 놀란 듯 펄쩍 뛰었다. 이 와중에도 그녀가 다칠 것을 생각한 듯 몸부림은 크지도 않았다. 그리하며 가련하게도 외치길.
“이러지, 이러지 마! 제발, 제발 부탁이야!”
“대체…. 너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른거야?”
아드리아나는 이를 악물고 디에고의 억센 손에서 후드를 빼앗았다. 소공작의 몸이 앞으로 휘청거리며 동시에 후드가 젖혀졌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는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흠 한 점 없이 찬란하기만 했던 금빛 머리카락이 온통 얼룩덜룩했다. 필시, 혼자 염색이라도 시도했던 게 분명했다. 흑색과 갈색, 적색이 엉망으로 뒤섞여, 마치 점박이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이게 대체 무슨….”
대체 염색약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그 기막힌 몰골에 일순 아드리아나가 얼어붙었던 찰나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디에고의 얼굴에 비참함이 차올랐다.
“흐, 윽…. 휴, 흉측하지?”
푸른 눈에 그득 고였던 눈물이 이내 굵은 빗방울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아드리아나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디에고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갑자기 왜 또 우는 거야?”
“내가 자, 잘생겼을 때도… 싫다며. 그, 그런데 이제는… 아주 못생겨졌잖아.”
“그건….”
“알아. 분명, 꼴도 보기 시, 싫겠지….”
고작 염색이 망했다고 나라라도 잃은 듯 서러움이 깊었다. 기막힌 비약에 말문이 막힌 채로 있자, 디에고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그래서, 그래서…. 보, 보여 주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이제는 마치 그녀가 저를 강제로 추행하기라도 한 듯한 어조였다. 물론, 도망가는 것을 기어이 쫓아와, 싫다는 걸 강제로 빼앗아 벗겨 낸 마당이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아드리아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뭐 이런 걸로 울고 그래.”
“흐엉, 어… 으, 흑….”
대충 달래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좀처럼 눈물을 그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결국 디에고의 앞에 털썩 앉았다. 눈물에 젖은 푸른색 눈동자가 조금 커진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아나는 반쯤 충동처럼 내뱉었다.
“울지 마. 지금도 예쁘니까.”
사실은, 부황처럼 금발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다. 깊디깊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도, 다른 이들을 볼 때는 귀찮다는 듯 심드렁한 눈빛이 제게는 끝도 없이 다정해질 때도, 발갛게 붉히던 뺨도, 어여쁘게 느껴지는 이목구비도.
그래서였다. 기를 쓰고 그녀의 인생에서 밀어내려고 한 까닭은.
언젠가, 이렇게 홀리게 될 것을 직감했으니까.
“나는, 아드리아나….”
가련하게 떠는 속눈썹이 사랑스러웠다. 자늑자늑 움직이는 입술과 떨리는 숨결마저도.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아드리아나는 디에고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아름다움에 약했고, 그 드높은 심미안을 만족시킬 만한 얼굴은 지극히 드물었다.
처음 디에고의 얼굴을 마주했던 찰나에 아드리아나는 깨달았다. 이 남자애는 장차 자라서 그녀의 약점이 될 터였다. 이대로 곁에 두었다가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약점. 그 단어만 생각하면 속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완벽한 황제가 되고 싶었다. 제가 여자라서 황제가 될 수 없다고, 사내애를 낳아 후계를 더 튼튼히 해야 한다고, 하루가 멀다고 그렇게 읍소하는 귀족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 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으며, 누구보다도 대단한 위업을 달성한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눈에 드러나는 약점은 독이 된다. 특히나 저렇게, 지나치게 예쁜 얼굴은 쓸데없는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버리지, 마….”
제 무릎이 다 까진 것도 모르고 훌쩍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받았다. 순간이지만, 아드리아나는 치열하게 고민하던 목표조차 잊었다. 심지어 라슬로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네 곁에… 있고 싶어….”
저 꼴을 하고도 원하는 게 제 곁이라니. 황제의 곁을 노린다기엔 대단한 야심은 없어 보였고, 황녀의 앞에서는 감히 반말을 지껄이지도 못했던 순한 종자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붙잡듯 잡은 게, 고작 열 살짜리 여자애의 손이라면.
“…….”
그 절박함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조금 가파르게 뛰었다. 아드리아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포기했다. 조그마한 잇새 사이로 한숨이 폭 터져 나왔다.
“…그래. 알았어.”
“알겠다니….”
“너, 버리지 않겠다고.”
순간, 디에고는 제가 무엇을 들었는지 믿기지 않는 기색으로 망연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에 젖어 있던 새파란 눈동자가 기쁨으로 거세게 일렁였다.
“저, 정말? 정말이야?”
“그래. 그러니까 제발 울지 좀 마.”
“안 울게! 이제 두 번 다시 울지 않을게!”
잘도 그러겠다. 아드리아나는 혀를 차며,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 디에고의 무릎을 살폈다. 그녀는 속상한 심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이거 봐. 괜히 도망치다가 무릎이 전부 까졌잖아.”
“조금도 아프지 않아서 몰랐어.”
“아프지 않기는. 피가 이렇게나 나는데.”
“이런 건, 정말, 아무래도 좋아….”
제 몸이야 정말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양, 아드리아나만을 바라보는 눈빛은 반쯤 맹목에 가까웠다. 이제는 이것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도 같았고…. 아드리아나는 픽 웃었다.
“네가 좀 모자라서 걱정이긴 한데, 뭐…. 앞으로 평생 내가 지켜 주면 되겠….”
읍, 으읍. 말을 채 다 뱉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드리아나는 깜짝 놀라서 온몸을 버둥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 돼, 아드리아나.”
놀랍게도 그녀의 어머니인 엘레나였다. 흔치 않게도 새파랗게 질린 황후의 아름다운 얼굴에 아드리아나가 깜짝 놀라던 찰나였다.
“……!”
그와 동시에 제 앞에 있던 디에고의 몸도 번쩍 들어 올려졌다. 언제 오셨는지, 황제께서 다급한 기색으로 디에고를 붙잡아 올리바레스 공작에게로 떠넘기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반쯤 집어던지듯.
“당장 ‘이것’을 오스티나토 바깥으로 치워.”
아드리아나와 디에고는 망연한 얼굴로 어른들이 각각 저희를 찢어 놓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아드리아나는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가 않았다.
아니, 언제는 친하게 지내라며? 싫다고 할 때마다 억지로 붙여 놓을 때는 언제고?
“전하! 황녀 전하!”
디에고는 황제의 서늘한 눈빛에도 반항적으로 제 아비의 품에서 바둥거렸다. 그 필사적인 꼴에 비센테가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군. 성년이 될 때까지 레알 코르도바에 처넣어야겠어.”
“…제 아들을요?”
“그래. 네 아들을.”
올리바레스 공작은 항의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두 아이들을 보고 얌전히 도로 다물었다.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저 애절하다 못해 기막힌 꼴을 보고 있자니 비센테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거기서 10년쯤 머리에 뭘 집어넣다 보면, 제정신이 돌아오겠지.”
“말도 안 돼요! 레알 코르도바라뇨! 절 혼자 늙어 죽게 만들 셈이세요?”
가까스로 황후의 손에서 얼굴을 빼낸 아드리아나가 반항적으로 외쳤다. 재차 디에고를 부르는 목소리가 퍽 애절했다.
고작 열 살배기들 주제에….
“소공작!”
“황녀 전하!”
서로를 향해 뻗어진 손이 애처로웠다. 뒤이은 절절한 외침이 허공을 수놓았다.
“디에고! 걱정하지마! 내가, 앞으로, 남은 평생…!”
“아드리아나!”
“널 지키…! 읍, 으읍!”
***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엘레나는 왁자지껄한 연회장을 빠져나와 테라스에 지친 몸을 기댔다. 유독, 피로가 쌓인 하루였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디에고와 절대 헤어질 수 없다느니, 너무하시다느니, 울고불고 떼를 쓰던 아드리아나는 저녁이 되자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의젓하게 오스티나토 공 임명식을 치러 냈다.
그 앳되고 당당한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자랑스러웠는지….
“엘레나.”
테라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센테가, 곧장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가볍게 끌어안았다. 관자놀이에 와 닿는 입술은 부드러웠으나, 숨결은 조급했다.
“네가 연회장 안에 없어서….”
“조금 더워서. 시종에게 전언을 전했는데 엇갈렸구나.”
엘레나는 살며시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내린 달빛이 고인 제 남편의 얼굴은, 몇 년을 마주해도 심장이 떨리도록 근사했다. 세월이 흐르며 황제의 권위에 걸맞은 기품이 더해진 뒤로는 더더욱.
그 아래, 짙푸른 청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직시했다. 언제나처럼, 언젠가처럼.
“힘들지는 않아?”
아직도 제가 갓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라도 된다는 양, 걱정을 그득 담은 눈빛에 가슴 깊은 곳부터 따듯함이 밀려들었다. 엘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견딜 만해.”
“…힘들구나.”
비센테의 입가에 단정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금세 위태롭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의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비센테의 단단한 가슴에 제 머리를 기댔다. 저 멀리, 연회장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잔잔한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노랫소리가 듣기 좋다.”
콧노래로 음을 따라 하던 엘레나가 문득 비센테를 돌아보며 물었다.
“춤출래? 그러고 보니 내 성년식 때 정작 당신이 춤을 요청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정확히는 할 수 없었지.”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내게 요청해 봐.”
과거를 되짚는 그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 들었다.
“아마 정원으로 쫓아갔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아. 그랬어.”
그녀를 품에서 놓아준 비센테가 난간을 성큼 넘어 정원으로 빠져나갔다. 시절을 맞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의 풀밭에서 그가 엘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조각 같은 얼굴에 매끄러운 미소를 띤 채로.
“영애.”
비센테가 한쪽 손을 내밀며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엘레나는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커다란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성은 어디에 빼먹었어.”
“네 가문 싫어하잖아.”
“그랬나?”
“아직도 지긋지긋하게 여기면서. 잘 알고 있어.”
비센테는 매끄럽게 웃으며 그녀가 정원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도왔다. 발을 무겁고 피로하게 만들던 구두는 이미 벗어 던진 뒤였다.
이 밤, 그들은 고작 이름 없는 영윤과 영애였으니까.
“해서, 춤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한 번만이라면 좋아요. 제가 조금 바빠서.”
엘레나는 정말 그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새치름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구하게 자란 영애가 저를 연모하는 영윤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고작 가정인데도 감히 자기 말고 누구와 춤을 추려고 했냐는 듯, 비센테의 눈매가 조금 사납게 가라앉았다.
“한 번?”
평소보다 억센 힘으로 그가 엘레나의 허리를 붙잡고 제 쪽으로 바짝 붙였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차라리 저를 전부 가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그 보답으로 영애의 인생에서 남은 춤을 모조리 제 것으로 주시고.”
짙어진, 한껏 깊어진 목소리에 등줄기가 자르르 떨렸다. 가끔 이렇게 못 이기듯 드러나는 집착과 소유욕이, 말도 못 하게 좋다는 걸 그는 알기는 할까?
“그건, 안….”
새침하게 안 된다고 말하려는 입술을, 그가 절반도 듣지 않고 치죄하듯 그대로 집어삼켰다.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날 선 자극이 얽혔다. 서로를 속속들이 아는 움직임에 흥분은 빠르게 고조되었다. 엘레나의 숨이 버겁게 차오르자 그가 이윽고 입술을 떼어 냈다.
“아….”
열이 오른 몸에 서늘한 밤바람이 스치자 등허리가 가늘게 떨렸다.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기 무섭게, 비센테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테네리페 성의 인기척 드문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조급했다.
입맞춤의 여운에 살짝 넋이 나가 있던 엘레나는, 그가 방문 앞에 멈춰서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비센테. 그러고 보니 나, 깜박하고, 오늘은… 약, 안, 먹었는데….”
“약?”
이미 문을 여는 손길에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기색이 묻어났다. 곧장 침대로 걸어간 비센테가 엘레나를 그 위에 부드럽게 눕혔다. 어느새 장식마저 죄다 풀어낸 긴 흑갈색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흐트러졌다.
“나는 좋은데… 이러다, 아이라도 생기면….”
말과는 다르게 착실하게도 비센테의 견장을 벗겨내는 손길이 급했다. 비센테는 그녀가 제 옷을 조금 더 잘 벗길 수 있도록 상체를 숙여 주며 웃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잘 수발들 자신도 있고.”
“근데 아드리아나가 질색할 텐데.”
그 말에 비센테의 움직임이 찰나의 순간 멎었다. 수려한 얼굴에 흔치 않은 근심이 묻어났다.
“걔는, 너무… 음….”
“이게 다 당신을 닮아서 그래.”
“…나를?”
아주 오래전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비센테의 눈빛이 조금 망연해졌다.
“나 어릴 때는 저렇게 유난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사실… 그렇긴 해. 저 정도까지는 아니긴 했지.”
“그래서… 그만둘까?”
그녀의 머리 위로 그늘진 비센테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이미, 다 알지만, 제 입으로 확언을 듣고 싶다는 양. 엘레나는 그의 우아한 목덜미에 제 팔을 얹었다.
“아니….”
그 말과 동시에 다시 입술이 틈 없이 얽혔다. 숨과 생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이것이 추락이라면 아주 달콤한 나락이었고, 구원이라면 더없이 완전한 해방이었다. 이윽고 마지막 여유를 주듯 입술이 떨어졌다.
가쁜 숨을 헐떡이던 엘레나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비센테….”
종종 생이 기적 같았다. 수십, 혹은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을 반복하여 가까스로 얻게 된 완전한 행복은 언제 보아도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웠다.
언제나, 엘레나, 그녀의 모습으로. 비센테는 벅차오르는 충만함 속에서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 엘레나. 내 모든 생으로, 언제까지라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