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151)
  • “…네가 왜 여기 있어?”

    아드리아나는 마차에 올라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마차에 앉아 있던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디에고는 얼굴을 발갛게 붉힌 채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황제 폐하께서, 공작저로 기, 기별을 보내셨습니다.”

    “아.”

    그 짧은 말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짐작한 아드리아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황후라면 모를까, 부황께서 개입하셨다면 번복의 여지가 없었다. 얌전히 올리바레스 소공작과 함께 테네리페 성으로 오늘 떠나든지, 아니면 계승식 당일 부황과 함께하든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 시녀를 향해 물었다.

    “어머니께서는? 언제 출발하신대? 나, 그 마차를 타고 가면 안 돼?”

    “황후 폐하께서는 어제 이미 출발하셨어요.”

    “…뭐?”

    “전하께서 아시면 조를 테니, 비밀로 해 달라고 하셔서.”

    아드리아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조금만 더 어렸고, 기품이 덜했다면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열 살이었다. 어린아이처럼 굴 시기는 진작 지난 셈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디에고를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황께서 네게 기별을 보내셨다니. 그런 일이 있었으면 응당 내게 알렸어야지.”

    물론, 디에고는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찾을 때마다, 자리를 비운 척을 했던 것은 황녀였다. 디에고의 눈빛에서 사소한 원망을 읽어 낸 아드리아나는 조금 머쓱하게 그의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

    일단 별도리가 없으니 앉기야 했지만, 오늘은 소심한 소공작을 상대할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팔꿈치를 마차의 창턱에 대고 턱을 괴었다. 그러자마자 디에고가 조심스럽게 제가 가져온 두꺼운 책을 무릎에 올려놓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시는 동안 책을 읽어 드릴까요?”

    “…아니.”

    “그러면… 이대로 마차만 탈 것이 아니라, 함께 말을 타는 것은 어떠신가요?”

    창문 바깥에 고정되었던 아드리아나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그제야 흘긋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황녀의 시선에 소년이 습관처럼 뺨을 붉혔다.

    “탈 줄은 알아?”

    “작은 말이라면요. 시종에게 이야기하면 바로 준비해 줄 거예요.”

    “조랑말은 흥미 없어. 우리가 그럴수록 시간만 지체되고.”

    그녀는 쌀쌀맞게 대꾸하고는 아예 눈까지 감아 버렸다. 우물쭈물하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침묵이 지루하게 여겨질 즈음이었다.

    “지난번 전하께서 보고 계셨던 그 역사서 말이에요.”

    “소공작.”

    그녀가 제게 말을 먼저 걸어 줄 줄 몰랐다는 양 흠칫 놀란 눈이 둥글었다. 아드리아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채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금발, 그보다 더 화사한 이목구비, 그리고 바다를 닮은 짙푸른 눈동자.

    이런 얼굴에 대고 모진 말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지난번에는 공작의 말에 넘어가서 널 떠맡았지만, 내가 널 좋아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노력하지 마.”

    “…….”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가자.”

    그녀의 시선을 받은 것만으로도 목덜미까지 붉어졌던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앙다문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아드리아나는 여상하게 생각했다.

    또 울겠네.

    “왜?”

    그러나 소공작은 울지도, 연약하게 떨지도 않았다. 따지듯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독기마저 어려 있었다. 심지어 반말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당혹감에 눈을 깜박이며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풀었다. 디에고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재차 물었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는데? 왜 노력해도 안 되는데?”

    그는 제가 황녀에게 감히 하대하고 있는 줄조차 깨닫지 못한 듯했다. 망연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니, 될 대로 되라는 듯 전부 자포자기한 것 같기도 했다.

    아드리아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해?”

    “중요해. 그러니까 대답해 줘.”

    “글쎄…. 일단 너는 키가 너무 작잖아.”

    “나중에는 저 기사보다 더 크게 자랄 거야.”

    그가 창문 밖에 있는 아무 기사나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심드렁히 그 손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손도 너무 작고.”

    “손도 마찬가지로 더 커질 거야.”

    “어떻게 장담해?”

    “노력할게. 안 되면 될 때까지.”

    아드리아나는 냉소적인 헛웃음을 참지 않았다. 키가 노력한다고 커졌으면, 그녀는 진작 부황만큼이나 커졌을 것이다. 물론, 여태 소용없었다고 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유를 먹는 노력을 그만두진 않을 테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멍청한 남자는 싫어.]

    [오늘부터 책을 처음부터 전부 다 다시 읽을게. 네가 흡족해할 때까지, 원한다면 황궁 도서관 전체라도.]

    과시하듯 내뱉은 브리타냐의 말에 원어민만큼이나 매끄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 순간,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디에고를 조금 다시 보았다. 또래의 귀족과 황족 전부를 통틀어도 이 정도로 브리타냐 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그녀는 놀란 감정을 감추려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 크흠. 그리고… 어…, 네가 너무 인기가 많은 것도 싫어.”

    “인기가 많다고?”

    “여자애들이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잖아. 몰랐어?”

    “…몰랐어. 여자앤지 남자앤지 딱히 성별로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디에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잘생긴 것이 싫어?”

    디에고가 그거야말로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양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그야, 잘생긴 것을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남편감이라면 달랐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날파리들이 꼬일 텐데, 얼굴까지 잘생기면 두 배로 더 복잡해질 테니까.

    아드리아나는 작은 얼굴을 도도하게 치켜올렸다.

    “따지자면, 그래.”

    생각만 해도 피곤하니까. 가끔은, 부황께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여자들에게 선을 긋는 게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렇게까지 그어도 미친 것들이 즐비하니까. 감히 황제에게, 제 목을 내놓고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걸 곁에서 전부 지켜본 아드리아나는 그렇게까지 피곤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내 얼굴만 망가지면 돼? 어떤 식으로든?”

    아드리아나는 질겁해서 내리떴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까부터 계속 반말을 지껄인다 싶더니,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눈빛이 은은히 돌아 있었다.

    “진짜 미쳤어? 그러지 마.”

    “그럼 그러지 않고도 네 곁에 있을 방법을 알려 줘.”

    디에고의 표정이 절박하게 일그러졌다. 아드리아나는 조금 당혹했다. 여태 그녀가 조금만 쌀쌀맞은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선을 그으면 다들 알아서 적당히 물러났다.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녀는 연회 때마다 모후의 곁에만 바짝 붙어 있던 부황을 떠올렸다. 받아 줄 수 없으면 여지조차 주지 말라고 했던가. 제게는 다소 이르게만 들리던 당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게 이르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비센테를 닮은 아드리아나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나는 황제가 될 거야. 그렇게 태어났고, 잘할 자신도 있어.”

    “…….”

    “그리고 너는 내 곁에서 버티기엔 유약해 보여. 나는 그런 사람은 필요 없어.”

    “…네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앞으로 내가….”

    “달라질 일 없어. 네가 어떻게 노력해도.”

    디에고의 푸른 눈이 상처로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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