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151)

이제는 언제 그렇게 우러러보았냐는 듯 시건방지고, 날 선 눈빛이었다. 단테는 아드리아나가 디에고 소공작에 대해 묘사했던 단어들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순하고, 잘 울고, 제 주장이라고는 하나도 못 하고, 거절을 잘 못 해서 내도록 끌려다닌다고….

‘저게?’

헛웃음을 눌러 삼키자, 소공작의 눈매가 더더욱 가늘어졌다. 이제는 눈동자마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더니.

“아드리아나 황녀 전하께서는 경이 무람없이 대해도 좋을 한낱 여자아이가 아닙니다. 장차 황제가 되실 분이시고, 에스페다의 영광이시며, 두 분 폐하의 하나뿐인 따님이십니다. 그런 분께,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

“황녀 전하의 위엄에 누가 될 짓을 저지르시기 전에, 경께서는 조금 더 조심하셨어야 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애초에 머리통에 입 좀 맞췄다고 사라질 위엄이면, 그게 위엄인가…. 그는 루카스에게 도와 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할 따름이었다. 네가 저지른 업보이니 너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인 듯했다.

그래서 다시, 소공작이 따지고 드는 황녀의 위엄으로 돌아가자면….

대체 어느 서른 살이 열 살짜리에게서 위엄을 느끼겠느냔 말이다. 그런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정말 미친놈이지…. 아무리 아드리아나가 조숙하다고 해도 단테의 눈에는 그저 애였다. 그의 앞에서 아주 어른인 양 주름잡고 있는 소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꼴이 볼만하기는 했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의 눈에는 한낱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것도 한 대 툭 치면 픽 쓰러질 것 같은 새끼 고양이. 발톱이 좀 따갑고 귀찮을 뿐인.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피차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아까 소공작이 말한 무슨, 뭐… 여자나 밝히는, 그거 말입니까?”

디에고는 단테가 제 말에 진지하게 대꾸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잽싸게 끄덕였다. 그 뒤로 줄줄 이어지는 말들이 하나같이 기가 막혔다.

“황녀께서야 무슨 소문이 돌든, 장차 손만 뻗으시면 원하는 사내를 아무나 고르실 수 있다지만…. 경께서는 입장이 다르다는 걸 아셔야지요.”

“…….”

“황녀께선 야망 또한 드높은 분이십니다. 고작 기사를 반려로 고려하실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해 봐야 아주 잠시, 찰나의 유희 상대일 텐데.”

“…….”

“물론 황녀 전하와의 염문이 경께는 더없는 영광이겠지만, 나이도 있으신데 요란스레 반품 대상이 되면요? 그 후엔 과연 어떤 귀부인께서 경과 맺어지려 할까요?”

이제는 아드리아나가 희대의 팜므파탈이고, 그는 거기에 걸려든 가련한 희생양쯤으로 말을 바꿔 버리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저는 그저, 그의 혼사가 막힐 것을 걱정했을 뿐이라는 양.

소공작의 푸른 눈이 별반 진지하지도 않게 단테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경께서는 어떠실지 모르나, 황녀께서는 경께 죽어도 진심이실 리가 없습니다. 전하를 곁에서 지켜봐 온 제가 보증합니다.”

이제는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제법 진지한 충고가 덧붙었다.

“눈을 조금… 아니, 좀 많이 낮추면, 저 밖 어딘가에 경께 걸맞는 여자가 있을 겁니다.”

저 조그마한 얼굴에서 노련한 정치가인 올리바레스 공작이 보이는 건 그저 착각일까? 단테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루카스를 한 번 더 흘긋 바라보았다. 요즘 열 살은 왜 다 이 모양이냐고.

딱 열 살배기의 조카가 있는 루카스 또한 진중한 낯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뜻이었다.

“일단 소공작, 오해가 있는 듯한데.”

단테는 한숨을 푹 내쉬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디에고는 어디 말해 보라는 듯 팔짱을 낀 채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녀께서 내게 죽어도 여자가 아닌 겁니다. 그 반대가 아니라.”

도저히 이런 억울한 비약과 매도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해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저랬다.

당연하게도 디에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단테를 바라보았다. 제 눈에 이다지도 어여쁜데, 여자로 보지 않는 게 가능이나 하냐는 듯. 모든 세상을 제 주관대로만 판단하는 어린애다운 관점이었다.

“게다가 전 이미 결혼까지 약속한 애인도 있다고요. 내년 봄에 결혼 예정입니다.”

“…정말이십니까?”

단테는 말없이 얇은 체인에 꿰어 목에 걸고 있던 약혼 반지를 들어 보였다.

“아….”

내내 파렴치한을 보듯 삐딱하던 디에고의 눈빛에 순식간에 공손함이 깃들었다. 팔짱을 낀 채로 아래위로 훑어보던 게 대체 어디의 누구였는지, 곧바로 양손을 모아 각을 잡는 자세에선 철저함마저 묻어났다.

“사실 저는 경께서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요즘 황녀 전하와 경의 관계를 두고 추측이 무성했던 탓에…. 제가 두 분의 우정에 과민했습니다.”

물론, 저 과민한 반응이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드리아나가 또래 남자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했으니까. 한때는, 황제 부부까지 진지하게 반응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올리바레스 공작, 지난번에는 루카스와 엔리케를 거쳐, 이번에는 그의 차례가 된 모양이었다. 단테는 디에고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껏 움츠러든 소공작의 자그마한 어깨를 토닥였다.

“뭐, 이해합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있으면 눈이 뒤집히는 게 에스페다인들 아닙니까?”

“역시 경께서는 대인배십니다…. 저기, 저는 그럼, 이만….”

“아, 그런데 소공작.”

얼굴이 발개진 채로 서둘러 마구간을 빠져나가려는 소공작을 단테가 느긋하게 불러 세웠다.

“…예?”

“혹시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 보셨습니까? 아, 소문으로 난 것이 아니라 이 정보까지는 모르셨으려나.”

“무엇 말입니까?”

순진하게도 동그랗게 떠진 눈이 단테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과 바다를 닮은 푸른 눈은 그림 속에서 갓 튀어나온 아기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저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이야말로, 디에고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아드리아나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제 부황을 쏙 빼닮았기 때문에.

“황녀께서는 흑발을 좋아하신다는 거요.”

단테는 죄책감 없이 씩 웃었다.

“금발은, 이제 지겹다고.”

사소한 복수였다. 분명, 처음에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