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지 주변이 환하다 싶었더니 어느새 황녀의 머리 위로 성스러운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천사의 행진을 알리는 나팔 소리인 듯했다. 그 순간 황녀가 다시금 그를 한 번 흘깃 쳐다보았다.
“…….”
제비꽃을 닮은 말간 청보라색 눈동자에 제가 비치던 순간, 심장이 다시 한 번 천상에서 지저까지 굴러떨어졌다. 그를 아주 마뜩잖게 쳐다보았다는 사실이나, 싸늘한 표정에 위축되었던 직전의 기억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바야흐로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
“그래서 소공작을 떠맡게 되셨다고요?”
“맞아.”
아드리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구간의 짚더미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는 말똥 냄새가 지독했지만, 황녀는 개의치 않았다. 부황의 기사들을 친오라비 마냥 따르며 다섯 살 무렵부터 마구간과 기사단 연무장을 제 궁처럼 드나들었던 탓이었다.
말의 갈기를 빗어 주던 단테가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좋은 것 아니에요? 올리바레스 소공작, 잘생기기로 소문이 자자하잖아요. 벌써부터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대단하다던데.”
그 말에 과거를 되짚던 아드리아나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얼굴이야 물론 잘 생기기는 했다. 어지간한 외모에도 심드렁히 반응해 댄 탓에 종종 무던하다고 오해받기는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사실 누구보다도 까다로운 심미안을 지녔다.
제 부황을 보고 자란 탓에, 웬만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지.
그럭저럭 생기다 만 것과 그럭저럭 생긴 것을 굳이 구분해서 뭐 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 걸….
그런 아드리아나의 눈에도 소공작의 외모는 독보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처럼 예쁘장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나이를 먹으면 개선될 여지가 있으니 흠이랄 것도 없었다. 그러니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나이 들어서 얼굴값 할 것 같아서 싫어.”
얼굴값…. 가차 없다 못해 노골적인 평가에 단테와 루카스가 동시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벌써부터 그런 것을 걱정하십니까?”
“벌써부터 조짐이 좋지 않으니 하는 소리지.”
부황처럼 사내답게 근사한 것도 아니면서, 아직 어여쁘기만 한 주제에, 또래 영애들 사이에서는 그 이름으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만나기도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탓에 솔직히 첫 만남에 거는 기대가 컸었다.
그가 도달할 최고점이 제 아비와 같은 인재라면 곁에 못 둘이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런데 만나고 보니 형편없었지…. 얼굴이 근사하면 뭘 해. 천치처럼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는걸. 기회가 기회인 줄 모르는 놈 치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리고 그런 어중간한 놈들이 나중엔 더 사고를 치고 다니기 마련이라고. 스승인 기메라 백작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귀에 퍼붓는 당부란 죄다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가 보기에 소공작은 겨우 붙잡은 기회조차 못 살리는 놈이었다. 그녀는 단언했다.
“장차 내 후광을 장신구 삼아 여자들 사이를 누빌 것 같은 상이야.”
“제가 볼 땐 자진해서 발 닦개가 될 상인데요.”
“…단테가 그걸 어떻게 알아? 본 적 있어?”
“저기 와 있네요.”
“으.”
단테가 가리킨 문간 쪽을 바라본 아드리아나는 정확한 억양으로 ‘으’ 발음을 내고는 있는 대로 진저리를 쳤다. 요 며칠 황녀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 도장을 찍더니, 어느새 황녀궁의 하녀들을 살뜰하게도 꼬여 낸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황녀의 도피처가 기사단의 마구간이라는 것을 대체 소공작이 어떻게 알았으려고….
물론 저 외모라면 어렵지도 않았겠지. 여자 어른들은 대체로 귀엽고 예쁜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니 겉껍질만은 최상인 저 어린애에게 홀랑 넘어가, 제 주인의 정보를 값싸게 팔아 치운 하녀가 있다고 해도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소공작을 바라보는 아드리아나의 제비꽃 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단테가 소공작을 향해 손을 흔들자, 소년은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지위상으로야 장차 제가 위겠지만, 황녀와도 무람없이 지내는 기사였다. 그 짧은 찰나에 공경이 뼛속에 새겨진 듯했다.
단테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하면 착하고 순해 보이는데요. 뭐, 당장 뭘 어쩌라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친구로 지내는 것도 싫으십니까?”
아드리아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물론, 소공자의 근성과 수완 하나는 인정해 줄만 하기는 했다. 그러나 소공자와 같이 있는 시간은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정확히는, 그들이 같이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흐뭇하게 보내는 시선들을.
벌써부터 그들 둘의 미래를 엮어 가늠하고, 결국 좋은 한 쌍이 되리라고 축복하는 속내들은 성가시기만 했다. 그녀는 우울하게 읊조렸다.
“놀이 친구는 정말이지 필요 없어.”
자주 보고, 가까이에서 보다가 코라도 꿰이면 인생이 망하는 거다. 아드리아나는 열 살답지 않은 신중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하늘인 부황께서도 누차 말하셨다. 평생은, 그리고 인생은, 아주 신중히 걸어야 하는 거라고. 정말 결심이 섰을 때가 아니면 무엇도 함부로 약속하지 말라고.
“으흠. 그야말로 한창 노는 게 좋으실 연치이신데.”
“누차 말하지만 나이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실례야. 게다가 정말 좋지 않다고….”
아드리아나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공부를 금지당했단 말야. 어머니께서 소공자가 찾아오는 날엔 수업을 받는 대신 무조건 함께 어울리라고 명령하셨어. 내가 쟤 보모도 아닌데.”
“그러셨습니까?”
“어머니께서 장차 치세에 도움이 될 친우를 만드는 것도 좋은 군주의 자질이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어차피 죄다 어린아이에 장차 자라면 내 신하가 될 텐데? 우정을 쌓아 봐야 무슨 소용인지.”
말하는 본인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잊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단테와 루카스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일곱 살 시절부터 퍽 되바라진 소녀였고, 황후가 걱정하는 것을 알아 제 부모와 시녀들 앞에서 어린양을 떠는 것과는 다르게, 제 아버지의 기사들 앞에서는 조금 더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이곤 했다. 그러니까 가끔은 이렇게 다 성숙한 어른인 듯 군다는 소리였다.
“지금 저희와는 착실히 우정을 쌓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야 정신 연령이 맞으니 그렇지.”
아드리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짚더미에서 바닥으로 풀썩 뛰어내렸다. 정신 연령을 운운하는 새침한 얼굴과 달리 까뒤집힌 드레스 자락이나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은 그저 앳되고 귀엽기만 했다. 그 간극에 무덤덤한 루카스조차 흐린 미소를 지었다.
“벌써 가십니까?”
“으응…. 내일부터 바쁠 일정이라.”
“아. 그러고 보니 테네리페 성으로 내일쯤 떠나시겠군요? 오스티나토 공 임명식이 부쩍 가까워진 게 실감이 나는군요.”
“맞아.”
아드리아나의 자그마한 얼굴에 자부심이 차올랐다. 비센테를 쏙 빼닮은 청보라색 눈동자가 야심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머니께서 미리 내가 물려받을 첫 영토를 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그리 충고해 주셨어. 시녀들과 오후에 출발할 거야.”
황녀가 수줍게 덧붙였다. 아무리 다 자란 척해 봐야 ‘어머니가’, ‘어머니께서’를 연발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열 살배기 그 자체였다.
“경들도 내 임명식에 올 거지?”
“당연히요. 물론 저희야 폐하를 모시고 당일에나 도착하겠습니다만.”
“좋아. 그러면 그때 또 봐.”
그 말을 끝으로 볼일은 끝났다는 양 황녀는 대충 손을 내밀었다. 단테는 그 손을 무시하고 황녀의 양 뺨을 붙잡아 그 정수리에 연신 입을 맞췄다. 아드리아나가 질색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질색해서 더 귀엽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드리아나는 자그마한 손으로 단테의 입술을 여러 차례 때리곤, 잽싸게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문간에 서 있는 소공자에게는 철저하게도 시선 한 줌 주지도 않고.
소공작은 그 자리에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황녀의 등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눈빛이 퍽 아련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찰나였다. 그가 갑자기 단테 쪽으로 시선을 휙 돌렸다. 그리고 단테는 소공자의 눈빛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불쌍하지 않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그러니까 저건, 불쌍하다기보다는….
“단테 경과 루카스 경 되십니까?”
어느새 그들의 앞까지 다가온 소공자가 대뜸 물었다. 이름을 틀리지도 않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벌써 아드리아나의 주변 조사까지 철저하게도 마친 모양이었다. 애초부터 대답을 요구하고 물은 질문은 아닌지 소공자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황녀 전하께서 지위의 고하 없이 막역히 어울리신다고는 하나, 경들께서는 조금 더 황녀 전하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전 그들이 하늘이라도 되는 양 올려다보던 사실은 그새 잊은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단테가 황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던 그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