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 10년 후
“나는 대체 언제 어른이 돼?”
자그마한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볼멘소리에 시녀들의 눈에 곤란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은 최근 들어 어린 황녀께서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소망이었다.
흑갈색 머리카락과 청보라색 눈동자, 황제의 대단한 미모를 쏙 빼닮은 앳된 얼굴은 벌써부터 대단하게 자랄 미래를 짐작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황녀의 연치는 이제 겨우 열 살이셨다.
어른이 되기는커녕 청소년기에 접어들지도 못한, 그런 나이.
“응? 나는 언제 어머니처럼 어른이 될 수 있어?”
황녀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제 시녀에게 매달렸다. 시녀, 아멜리아는 가까스로 황녀를 추슬러 안았다.
“그건, 저기, 백 밤만 더 주무시면….”
“저번에도 그랬잖아, 아멜리아. 그때부터 백 밤 다 지났어.”
“…….”
“어른들은 이게 문제야.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속이려고 들어.”
황녀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숫제 세상 다 산 것 같은 음성이라, 근처에 서 있던 하녀들의 얼굴에 귀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아멜리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황녀의 뺨을 매만졌다.
“죄송해요. 전하께서 너무 귀여우셔서.”
“이번만 봐주는 거야. 아멜리아라서.”
“물론이에요. 그런데, 전하.”
“응?”
“왜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으셔요?”
놀랍게도 황녀의 얼굴에 떠오른 건 새빨간 홍조였다. 열 살 답지 않게 이지적인 눈매가 그때만큼은 아이처럼 새침해졌다.
“그건 숙녀의 비밀이야.”
“지난주에 올리바레스 공작을 만나셨거든요.”
황녀의 말과 엇비슷하게 끼어든 것은 레베카였다. 황녀는 들고 있던 땅콩을 뺏긴 다람쥐처럼 망연해졌다.
“올리바레스 공작?”
“그거 비밀, 비밀이라고 했는데!”
뒤늦게 바동거리며 항의해 봤지만, 이미 화제를 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멜리아는 황녀의 저항에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쳐 안았을 뿐이었다. 충실한 시녀의 눈매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 댁에 계신 또래 영윤도 아니고, 공작을?”
“글쎄, 그러시더라니까요. 아멜리아께서도 그때 황녀께서 얼마나 의젓하셨는지 보셨어야 해요.”
“하지만 황녀께선 폐하를 늘 뵙잖아. 고작 그 정도 외모에 이렇게나 넘어가셨다고?”
“…폐하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되죠. 그러면 우리 전하, 평생 결혼도 못 하실걸요.”
“내려 줘.”
부루퉁한 목소리에 그들은 그제야 황녀를 돌아보았다. 다람쥐처럼 부푼 볼에 찡그린 콧잔등은 저 나름대로의 항의 표시겠지만, 귀여운 것을 더 귀여워 보이게 할 뿐, 위엄은 없었다.
아멜리아는 순순히 황녀를 땅으로 내려놓았다. 애써 웃음을 참는 어른들의 얼굴에는 미미한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황녀가 소소하게 분개하기 직전, 하녀 메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녀 전하. 황태후께서 오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아멜리아와 레베카의 연대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황녀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깃들었다.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어디? 어디 계셔? 내가 지금 간다고 당장 말씀드려.”
“진정하세요, 아드리아나 황녀. 이미 이곳에 있답니다.”
곤란한 듯 웃는 메리의 등 뒤에서 다정한 음성이 들렸다. 그제야 아드리아나는 하녀에게 가려져, 시에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녀는 있는 힘껏 달려가 시에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힘에 시에나는 뒤로 살짝 밀려났으나, 이내 안정감 있게 손녀를 받쳐 들었다.
“으응…. 보고 싶었어요, 할머니.”
시에나의 품에 제 뺨을 묻으며 아드리아나가 웅얼거렸다. 예법상으로만 따지자면 지나치게 허물없는 태도였으나, 황녀의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저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아예 예법에 무지한 것도 아니라 더더욱.
저렇게 무구한 열 살처럼 굴다가도 조금만 불편한 자리에선 온갖 예의를 다 차렸다.
“나도 무척이나 그랬답니다. 에스페다를 떠나 있는 동안, 얼마나 황녀가 보고 싶던지.”
“눈은? 아팠던 건 이제 많이 나았어요?”
“황녀께서 걱정해 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다….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죠?”
“당분간은 황궁에 머물 거랍니다. 그보다 밖에서 듣자니, 언뜻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재미있는 이야기요?”
시에나의 아름다운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짓궂어졌다.
“우리 황녀께 첫사랑이 생기셨다고요.”
“……!”
아드리아나의 작은 얼굴이 배신감으로 굳어졌다. 시녀들에 이어, 시에나까지 저를 놀리려 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표정이었다. 차마 제 시녀들 앞에서 하듯 발을 동동 구를 수는 없는 노릇인지, 황녀는 작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웅얼거렸다.
“그거, 진짜 비밀이었는데….”
“무엇이요?”
뒤이어 응접실로 안내되어 들어온 인물에 아드리아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오늘 이 방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던 올리바레스 공작, 그 자신이 들어온 것이다. 황녀는 조금 전까지 잔뜩 억울해하던 것도 잊고 허둥지둥 시에나의 몸 뒤로 쏙 숨어 버렸다.
물론 제 눈만 가린 것이나 다름없었고, 귀염을 떨다 잔뜩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시에나의 무릎 옆으로 삐져나온 참이라 주변 사람들이 눈이 조금 더 흐뭇해졌다.
하마터면 상황에 휩쓸려 같이 웃음을 터트릴 뻔한 공작은 제정신을 붙잡고 황녀께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저… 네. 공작을 뵙습니다.”
아드리아나는 시에나의 치맛자락을 꼭 쥔 채로, 머뭇거리다가 겨우 예법대로 인사를 올렸다. 볼이 잘 익은 자두처럼 발개진 와중에도 위엄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바짝 치켜올렸다.
“그런데, 저기, 오, 오신다는 기별을 듣지 못하였는데요!”
“황태후께서 안에 들어 계신다는 소식은 시종에게 전해 들었으나, 폐하의 명령을 우선 받잡느라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부황의 명령이라니요?”
“그러니까….”
공작은 무어라 말을 전해야 할까 고민하며 턱을 쓸었다. 황녀의 첫사랑에 대한 소문이 황궁 내에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작 그 풋정을, 황제께선 철없는 어린아이의 감정쯤으로 넘길 생각이 아예 없으시기 때문이겠고.
덕분에 그는 억울하게도 오전 내내 비센테의 눈총 아닌 눈총만 잔뜩 받다 온 참이었다. 물론 황제께선 단정하고 고상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탁 까놓고 의미만 들여다보면 결국 추궁과 비난이었다. 희대의 파렴치한으로 모는 매도는 덤이었고. 그런 것을 세 시간쯤 듣고 있다 보면 있던 죄스러움도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 힘겨운 인내의 마무리는, 당장 네 아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황녀와 안면을 트게 하라는 다소 당혹스러운 명령으로 끝이 났다.
올리바레스 공작으로서는 급히 제 열 살 난 아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면서도 도저히 이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 비센테를 제치고, 제가 숙녀에게 선택받는 날이 올 줄이야. 더구나 그 숙녀가 비센테의 딸일 줄이야….
기분이 좋으면서도 동시에 좋지 않았다. 정말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덤이었고.
“그러니까?”
어쨌든 제 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갸웃대는 황녀가 몹시 귀여웠으므로, 그는 찜찜함을 잊고 흐뭇한 웃음을 물었다.
“황녀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소개요? 갑자기?”
“제 아들 녀석입니다.”
아드리아나는 공작이 가리키는 아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저와 눈이 마주치는 높이에 공작의 바짓자락을 붙잡은 채로 얼어붙어 있는 또래의 남자아이가 보였다. 황녀의 예리한 눈이 그의 이모저모를 훑었다.
금발과 벽안. 아직 어린 얼굴이기는 했지만, 가히 여자만큼이나 예쁘장해 보이는 생김새였다.
“무엇하느냐? 어서 나와서 황녀께 인사 올리지 않고.”
공작의 추궁에도 소공작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저, 저기, 저, 저는….”
아드리아나는 곧장 실망했다. 아무래도 소공작에게는 줏대도, 숫기도 없는 모양이었다. 황녀의 마음속 채점지에 빨간 줄이 죽죽 그어졌다. 그녀의 눈초리가 조금 더 싸늘해지자, 소공작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얼굴 하나는 예쁘니 우는 얼굴도 역시 어여쁘겠지만, 아드리아나에게는 큰 흥미로 와닿지 않았다. 근사한 얼굴이라면 부황으로도 실컷 목도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것에 관심을 쏟을 리가.
“저는 놀이 동무는 필요 없어요.”
“…….”
“특히 저렇게… 예쁘장하게만 생긴 남자애는요.”
아드리아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의 대치를 바라보던 어른들의 표정에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