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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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를 뵙습니다.”

    비센테가 문을 통과하자, 황후의 집무실 내에 있던 시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며칠째 황제 부부 사이에선 묘한 냉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황후가 밀린 일을 핑계로 황제의 침실을 찾지 않은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그리고 황제도 어제까지는 황후를 찾지 않았다.

    “엘레나.”

    그의 등장을 알았을 텐데도 고집스럽게 시선을 서류에 고정하고 있던 엘레나는 그 부름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를 취하는 자세는 우아했지만, 폴폴 풍기는 냉기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오셨습니까?”

    목소리에서부터 묻어나는 기색이 범상치 않았다. 이렇게나 냉랭한데도 황궁 내에 둘의 불화설이 떠돌지 않은 것은 오로지 황제의 시선 때문이었다. 엘레나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순간마다, 비센테의 시선은 그녀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물러나라. 황후와 독대하겠다.”

    “예, 폐하.”

    얌전히 고개를 조아린 시종들이며 관료들이 부지런히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목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들리고 얼마간의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엘레나는 잉크가 묻은 손을 손수건에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시간을 잠시 냈어.”

    “오전이 바쁘실 텐데요. 공회에 드셔야 할 시간이 아니십니까?”

    둘만 남게 되자 비센테가 습관적인 평어를 사용한 것과 달리, 엘레나는 사늘한 공대로 대꾸했다. 비센테가 헛웃음을 삼키는 것도 모르는 척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의무를 등한시하시면 안 될 일입니다.”

    의무를 등한시하다니. 엘레나는 제가 뱉은 말을 곧장 머리로 비웃었다. 그가 새벽까지 공무에 몰두했던 것을 그녀는 알았다. 황제궁의 집무실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제발 폐하께 휴식을 권해 달라고, 시종장이 어제도 와서 읍소했으니까.

    “…….”

    그렇게 다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는 말들은 이처럼 뾰족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 제가 비센테에게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대하겠는가? 비센테는 3년이나 그녀를 기만했지만, 저는 감히 그에 대해 따질 수조차 없었다.

    유순히 내리떴던 그녀의 눈매에 바짝 날이 섰다.

    “왜 오셨어요?”

    “요즘 약을 바르는 것을 잊었더라.”

    아. 엘레나는 입술을 꾹 짓씹었다. 요 며칠 경황이 없어, 흉터를 옅게 만들어 주는 힐다의 약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힐다는 요즘에도 주기적으로 한 번씩 약을 보내오곤 했다.

    “…….”

    힐다를 생각하자 자연스레 비센테가 감내한 세월이 뒤이어 떠올랐다. 그녀는 익숙한 부채감을 삼켰다. 한풀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 가시면 제가 바를게요.”

    “그리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비센테가 양팔을 뻗어 책상과 제 몸 사이에 엘레나를 가뒀다. 고개가 비스듬히 숙여지고, 자연스레 콧등이 스칠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입술부터 맞댔을 테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었다.

    우울감이 묻어나는 비센테의 근사한 눈매가 일순 일그러졌다.

    “네가 나를 피하고 있잖아.”

    그의 목소리에서는 사소한 절망이 묻어났다. 그녀의 외면을 도통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

    엘레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그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삼켰다. 비센테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은 자꾸만 약해졌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차올랐다.

    지금도 행복하지 않느냐고, 아이까지는 욕심이라고, 그의 말대로 하나만 양보할 수는 없겠냐고.

    어쩌면 모두 옳은 소리였다. 그러나 감히, 그에게 생각을 바꾸어 달라 애원할 수조차 없는 부채감은? 뒤집힐 수조차 없는, 평생 뒤따를 감정적 불균형을 견디는 게 그녀의 사랑을 퇴색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그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제 소망은?

    ‘이기적이야.’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 비난을 퍼붓는 것 같았다. 그래, 정말 그랬다. 그리고 엘레나의 분노는 자기혐오와도 맞닿아 있었다. 비센테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를 그렇게 만든 상황과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제가 하필 카스타야의 딸로 태어나서, 그와 끔찍한 약속을 맺어서, 제 허술한 몸이 그를 기어이 불안하게 만들어서….

    “엘레나.”

    “폐하를 피하다니, 그런 적 없어요.”

    그의 부름에 그녀는 한 박자 늦게 매끄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존댓말이라는 것부터가 매끄럽지 않았으니 노력은 무용했다. 애초부터 큰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지만.

    비센테의 어깨를 밀어내려 손을 얹자, 그가 그녀의 손을 냉큼 붙잡아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 자연스러움에 엘레나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정색했다. 비센테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네 이 표정마저도 다 내 착각이라고?”

    “…물론 착각이세요.”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경어는 쓰지 않기로 했잖아.”

    “…….”

    “황궁의에게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의무실에 통보도 없이 찾아가, 황궁의에게 뜬금없는 질문이나 던져 댔으니. 진작 비센테의 귀에 들어갈 것은 알았다. 그도 그녀가 숨겨 오던 사실에 대해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며칠간 그녀를 찾지 않았던 것일 테고. 생각이라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엘레나는 비센테의 시선을 열없이 피했다.

    “피임에 대해서는 왜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네가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잘 아시면서….”

    “…네 몸 상태에 대해 황궁의의 권고가 있었어.”

    엘레나는 그제야 비센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청보라색 눈동자에는 그녀에 대한 염려 말고는 어떤 불순물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고 하던가요?”

    “…….”

    “아니면, 제 몸 상태로는 아이를 낳다 죽을 수도 있다던가요?”

    그 말에 비센테의 눈빛이 조금 더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엘레나의 목소리에 순간 날이 섰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겠어요.”

    “…….”

    “황후의 의무에는 후계를 낳는 것도 있어요. 저는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겁니다. 부디 저를 폐하시고 괜찮은 가문의 여인을 골라 황후로 맞이하세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곧장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쥔 비센테가 기막힌 것처럼 되물었다. 괘씸하다는 듯 그녀의 뺨을 쥔 손에 힘이 조금 실렸다. 엘레나는 양 뺨이 짓눌린 채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조금 더 건강하고 기반이 든든한 여자를 황후로 들이신다면, 폐하의 치세에도 오래 도움이 될 거예요.”

    조금 더 분명하고 똑똑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볼이 눌린 탓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비센테의 손을 제게서 치워 냈다.

    “…나중에 돌이켜서 후회할 말은 하지 말아야지, 엘레나.”

    “황위를 이을 후계를 보셔야지요. 사촌의 자식을 벌써 휘말리게 하실 생각은 마시고.”

    “네가 화낼 만한 일이라는 건 알아.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도. 그러니 제발 그만해.”

    “제 쓸모가 무용해요.”

    “널 아이나 낳아야 하는 도구처럼 취급하는 말도 그만두고. 내가 그런 식으로 널 취급한 적도 없지만.”

    “…….”

    “너는 쓸모 있거나 유용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야. 널 도구처럼 써야 할 상황이 오면, 차라리 나를 이용하라고 말했잖아.”

    “좋아.”

    엘레나의 눈매에 일순 암사자처럼 사나운 기색이 어렸다. 여태 비센테에게 일방적으로 붙들려 있던 손으로 그의 셔츠 깃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면 세워.”

    “…….”

    “내가 널 ‘도구처럼’ 쓸 수 있게.”

    비센테는 입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어이 여기서 그를 가지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청회색 눈동자는 사납다 못해 맹렬하게 느껴졌다. 그런 눈빛마저 어여뻐 보이면 어쩌라는 것인지….

    “세우기는 널 본 순간 진작 세웠고….”

    허탈하게 대답하자 엘레나의 뺨과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렇게나 부끄러워할 거면서, 아닌 척 금세 뻔뻔해진 눈초리가 우습고도 귀여웠다.

    그는 그녀의 눈가에 부드럽게 입 맞추며 솔직하게 사과했다.

    “너와 상의하지 않았던 것 미안해. 우리 일인데 나 혼자 독단으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도.”

    “…….”

    “네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어.”

    “…….”

    “잠깐 실망하고, 네 몸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 아이를 갖겠다고 말할 것을 알기도 했고.”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만약 황궁의가 처음부터 솔직하게 그녀에게 몸 상태에 대해 말했다고 해도, 그녀는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 죽어도 없었다. 어쩌면 지금보다도 연약했던 3년 전의 몸으로 어떻게든 아이를 가질 생각부터 했을지도 모르겠다.

    엘레나의 생각을 짐작한 듯, 비센테가 눈매를 설핏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도저히 아이는 포기가 안 돼?”

    “응….”

    “네가 아주 아프고, 힘들지도 모르는데?”

    “…응. 나는 우리 아이, 꼭 낳고 싶어.”

    우리. 제가 말하고도 그 말이 주는 묘한 여운에 젖어 엘레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조금 더 열렬한 태도로 이어 말했다.

    “나는…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주고 싶어.”

    “…….”

    “너의 생을 내가 아주 많이 빼앗았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네가 누릴 새로운 생을 안겨 주고 싶어. 네게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행복을 알려 주고 싶어. 그리고….”

    내가 없더라도 네가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주고 싶어. 그녀는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은 가까스로 삼켰다. 그러나 비센테는 그녀가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모두 짐작한 듯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더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아주 다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상관없어.”

    상체를 수그린 그가 엘레나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힘겹게 고개를 묻었다. 엘레나는 제 등허리에 얹어진 비센테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확신을 주듯 그의 등을 마주 꽉 끌어안았다.

    “비센테. 나 정말 괜찮아.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붙어 있는 피부를 타고 그의 헛웃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비센테의 고동을 느끼듯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바깥에서 막 들어온 비센테의 체온은 평소보다 조금 서늘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이 섞여 미지근해지도록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이윽고 비센테가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을 조금 풀어냈다. 복잡한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픽 웃음을 물었다.

    “널 닮았으면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겠다.”

    “맙소사! 지금 이거 승낙한 거지?”

    엘레나의 눈동자에 깃든 환희에 그의 눈빛이 조금 더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 표정에 불안해진 듯 엘레나가 재차 확인했다.

    “마음 바꾸면 안 돼.”

    “바꿀 마음이었으면 애초부터 승낙하지도 않았어.”

    “약은? 아직 먹고 있어?”

    “네가 황궁의에게 다녀간 그날부터 끊었어.”

    “일주일은 지났네. 당장 침실로 가자.”

    “굳이?”

    그대로 몸이 들어 올려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혹한 그녀가 비센테의 허리에 다리를 감는 것과 동시에 치맛자락이 걷어 올려졌다.

    며칠 전, 그가 음탕하게도 속삭였던 것처럼 한낮의 집무실에서…. 우습게도 이 와중에 몸은 습관처럼 준비가 끝나 있었다. 엘레나가 당혹해하는 사이 그가 묵직하게 밀려들었다.

    “으응…!”

    저도 모르게 내뱉은 가파른 허덕임에 비센테가 입술을 붙이며 나직하게 웃었다. 귓가에 닿는 성마른 목소리란.

    “조심해야지, 엘레나.”

    “흐, 읏….”

    “한낮의 집무실이야. 네 목소리를 저 복도의 사람들에게 다 들려주고 싶으면, 참지 않아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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