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다는 듯 비센테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엘레나는 미처 그 기색을 바로 눈치채지 못한 채로 조금 들뜬 채 말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가져야겠지? 에스페다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이젠 당분간 토벌전을 나갈 필요도 없으니까. 게다가 시에나께서도 기대하고 계시고….”
“…엘레나, 잠깐만.”
비센테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엘레나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네 몸도 아직 다 낫지 않았잖아.”
엘레나는 비센테의 당혹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가 지난 3년 동안 아이를 원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녀는 서서히 당혹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다는 거야?”
“물론, 아이야 예쁘겠지. 너와 나를 닮았을 텐데.”
욕심이야 대단했다. 아이만큼 완전한 고리가 또 있을까? 언젠가 엘레나의 마음이 제게서 떠나더라도 아이가 있다면 아주 내치지는 못할 테니까. 그 약해진 틈을 빌미로 제가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애초에 그런 불상사는 없어야겠지만,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거슬렀던 그는 인간의 마음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네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을 지금 상황에서 진행할 수는 없어.”
“내가 원하는데? 나는 가지고 싶어.”
“…이번만 네가 양보해. 다른 것은 무엇이든 네 의견을 따를 테니까.”
“양보.”
엘레나는 비센테의 품에서 벗어나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저히 그의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양보할 수 있는 무엇이냐는 물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열이 오를 때처럼 숨이 금세 밭아졌다. 그가 무슨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잔뜩 기대했던 마음이 꺼져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어른의 손을 놓친 아이처럼 망연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비센테, 그러면 우리 후계는….”
“올리바레스 소공작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지. 나이가 차면 그 아이에게 의무를 지우면 될 일이야.”
“…….”
“엘레나?”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깜박 놓쳤던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그가 고작 잉태된 지 몇 주 된 아이를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것은 급작스레 생각해서 되는대로 내놓은 답이 아니었다.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이런 상황이 닥칠 때를 대비하고 생각해 온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가쁜 숨을 억누르며 말했다.
“운이 좋지 못하면 멀쩡히 숨 쉬다가도 하루아침에 죽어.”
“알아. 그래서 나는 네가 위험한 것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아이가 ‘위험한 것’ 이야?”
“적어도 완전히 안전한 상태는 아니지.”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이었다. 엘레나는 제가 비센테와 언쟁을, 그것도 이런 종류의 언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제 안에 차오른 용암 중 무엇부터 터트려야 할지 몰라 당혹했다. 아니, 그 전에. 그에게 이런 몰염치한 감정을 내보일 수나 있을까?
비센테가 당혹으로 발개진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진지하게 덧붙였다.
“네 안위와는 무엇도 타협할 수 없어.”
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짧은 탄식이 흘렀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겨우 그의 말에 대꾸했다.
“…타협은 없다고.”
그래, 몇 번이나 그녀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돌이켰던 비센테를 알았다. 그 마법이 깨진 이후로 그녀의 안위에 대해서만큼은 강박적일 만큼 철저해지는 그를 이해했다.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감내하고,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만한 몰이해의 대가였다. 제 이기심에 숨이 막혔다.
“엘레나.”
그가 달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이해했어.”
“이해했다니.”
“내가 경솔했어. 네 말대로 두 번 다시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게.”
그녀의 수긍에 비센테의 표정에 빠르게 안도가 번졌다. 그리고 엘레나는 황후가 된 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
“말해 보라.”
황궁의는 의무실에 들이닥친 고귀한 여자를 당혹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제 무례를 뒤늦게야 깨닫고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이곳까지는 어찌 찾아오셨냐는 공손한 물음이 혀 위에 얹어지기도 전이었다. 급박하게 다가온 황후 엘레나는 제 얼굴만큼이나 다급하게 물었다.
“폐하께서 주기적으로 복용하시는 약이 있으신가?”
황궁의의 눈이 일순 둥그렇게 커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무슨 연유로 하문하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폐하의 안위와 직결되는 사항은 기밀인지라, 아무리 황후 폐하라고 하셔도….”
“폐하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 황궁의의 의무라면, 폐하께서 사소한 불편이 없는지 살피는 것 또한 나의 일이지. 하물며 나라의 후계와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
“이래도 황궁의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 주장할 것인가?”
나라의 후계. 그 말에 황궁의의 유약한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소, 소, 송구합니다.”
“폐하께서 약을 언제부터 복용하고 계셨는가?”
황궁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다 아시고서 하문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서…. 황후가 묻거든 어떤 것도 함구하라는 황제의 엄명이 떠올랐으나, 모든 걸 알고 난 후 확인을 위해 찾아오신 분 앞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제 햇수로 3년이 꼬박 되어가십니다.”
“…삼 년?”
황후의 무표정한 낯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평정을 회복했다.
“그토록 오래 복용하면 추후 해가 있지는 않겠는가?”
“약의 복용량은 늘 주의 깊게 살피고 있습니다.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으실 겁니다.”
“큰 무리라니….”
“언제든 약을 중단하기만 한다면 약효는 일주일 내로 사라질 겁니다. 여인이 직접 복용하는 것보다야 부작용도 훨씬 덜하고요.”
황후의 얼굴이 일순 종잇장보다도 더 창백해졌다. 황궁의는 일순 제 말에 무슨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보았다.
“만약….”
황후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그대가 처방한 약을 꾸준히 복용 중인데도 아이를 배태하였다면? 그런 경우도 있는가?”
“송구하오나, 적정량과 기간을 지켜 피임약을 드셨는데도 효과가 없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천진하게 되묻는 순간, 황후의 눈빛에서 빛이 죽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어지는 황궁의의 말에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황후는 이윽고 몸을 돌려 빠르게 의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