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51)
  • “신께서, 당신을 구하시길.”

    그의 잠든 귓가에 닿았던 그 읊조림은 틀림없이 엘레나의 것이었다. 그 말을 믿어서 그는 여기까지 왔다. 네가 나의 안위를 신께 빌었다면, 나는 죽어도 패배할 리가 없다고. 너야말로 나의 신이니까. 나의 구원자니까….

    그 힘든 전투를 거쳐 오면서도 단 한 차례도 차지 않았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엘레나의 안전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지금 즉시 고꾸라져 일어나지 못한대도 그저 기꺼울 것만 같았다.

    “…….”

    어느새 그는 초상화 앞에 섰다. 뽀얗게 앉았던 먼지가 쓸려 나간 흔적을 어렵지 않게 읽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명패를 눌렀다. 덜컹거리며 문이 열리는 그 잠깐 사이에도 목이 죄었다.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그는 거대한 창문 너머로 환하게 쏟아진 빛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윽고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아.’

    탄식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듯했다. 붉은 카펫에 파묻히듯 쓰러져 있는 엘레나의 여윈 몸은 창백했다. 마치 몸에 남아 있던 모든 생명력을 전부 끌어다 쓰고, 끝내 쓰러진 것처럼….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제 입가를 가렸다. 손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그때였다.

    “흐….”

    작고, 여린 숨소리. 그것이 그를 구원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안위만을 빌고, 빌고, 빌며 시간을 돌이켰던 수많은 순간처럼.

    엘레나는 살아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온몸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비센테는 홀린 듯 걸음을 내디뎠다.

    “…….”

    엘레나는 여윈 몸을 제 팔로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작은 어깨와 부드러운 이마, 물기에 젖은 뺨,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발간 입술 사이로 색색 새어 나오는 숨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마저 만져질 듯 부드러웠다.

    ‘따듯해.’

    비센테는 경탄하며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든 순간, 그는 그들에게 걸려 있던 마법이 영원히 끝이 났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비센…테…?”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엘레나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꿈결을 헤매는 듯한 음성이었다. 비센테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는 늘 이 순간을 기다렸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들을 인위적으로 묶어 놓았던 끈이 완전히 사라지고, 인간의 의지로만 서로를 붙잡고 있게 될 이 순간을. 그녀의 곁에서 찰나의 시간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될 순간을.

    “…….”

    사실 이곳에 다다르기 직전까지도 그는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확신하지 못했다. 내내 불안 속에서 상실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편이 나을지, 여태 그랬듯 영겁일지라도 버텨 내는 것이 나을지….

    그러나 이제는 온전히 확신이 생겼다. 지금 이 순간을 감히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비센테는 품속에서 바르작거리는 엘레나를 빈틈없이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엘레나…. 내가 왔어.”

    그리하여 이제는, 전부 괜찮았다.

    02. 3년 후.

    먼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황후궁에도 내렸다. 복도를 순찰하던 하녀장은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급작스러운 인기척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황후의 침실로 바로 이어지는 복도였다. 창문은 모두 잘 닫아 둔 것을 확인했고, 하녀들은 아직 침실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녀장의 눈이 의심을 품고 가늘어졌다. 그러다 이내 가까워진 사람을 확인하곤 아연한 얼굴로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폐하.”

    “쉿.”

    비센테는 제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 나직한 소리를 냈다. 길고 긴 원정에서 막 돌아온 젊은 황제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위태로운 피로가 묻어났다. 이번 토벌전이 유독 길었던 탓일까? 얼굴 전반적으로 깎아지르는 듯한 음영이 더 깊어지며 날 선 매혹을 자아냈다.

    “…….”

    하녀장은 제가 황제의 존안을 지나칠 정도로 넋 놓고 마주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황제는 조금도 거슬리지 않은 것처럼 하녀장이 지나쳐 온 복도 너머로 조급한 시선을 던졌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무엇을 보든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겠지만.

    “황후는?”

    “아직 기침 전이십니다.”

    그야 당연했다. 이런 새벽에 일어나는 에스페다의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황후 엘레나는 새벽까지 황제를 대신해 온갖 보고를 받고, 예산안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하녀장이 지난밤 황후의 수고로움을 되짚는 동안, 황제의 얼굴은 더없이 진중해졌다.

    “내가 들어가면 황후가 깰 것 같은데….”

    “잠귀가 예민한 편이시니까요.”

    하녀장은 당혹하지 않고 대답했다. 황후를 향한 황제의 지극정성은 이제 와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3년 전. 그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황위에 오르자마자, 비센테 황제는 과거 반역으로 멸문했던 가문들의 복위 절차를 밟았다. 특히 카스타야 후작의 반역은 반역이 아닌 잔적한 이를 몰아내기 위한 혁명쯤으로 포장되었다. 그렇게 카스타야 출신의 황후는 반역자의 딸이 아닌, 공신의 딸이 되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황후에 대한 삿된 소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자들은 점차 사라졌다. 황제가 황후를 지극히 아끼면 아낄수록, 에스페다의 백성들이 죽음에서 되살아난 황후와 황제의 사랑 이야기에 열광하면 열광할수록 더더욱.

    지금의 하녀장이 황후궁에 배정받은 것은 그 시절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유난스럽던 시절에 대해서는 소문으로나 알음알음 전해 들었을 따름이었다.

    “…….”

    황제는 어둑한 복도에 못박인 듯 서서 황후의 침실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다가갈 생각도, 물러날 생각도 못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녀장이 알기로 황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게 서 있는 황제는 애달파 보이기도 했고, 초조해 보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다. 그제야 하녀장은 전임자가 떠들어대던 ‘그 시절’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평소라면 황후께서 깨시겠지만.”

    반쯤 충동적으로 낸 목소리에 황제가 고요히 시선을 마주해 왔다. 하녀장은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며 마저 고했다.

    “간밤 무리한 일정으로 피로하셨으니, 얼굴만 살짝 보시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고맙군.”

    황제가 긴 한숨과 함께 감사를 전했다. 하녀장은 황송해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곁방에 목욕물과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부탁하지.”

    비센테는 서둘러 대답하고, 하녀장을 지나쳐 조급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방문 앞에서야 냉정을 되찾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소리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목문을 열었다.

    “…….”

    거대한 응접실 너머 침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막 떠오른 햇살이 자그마한 체형대로 부푼 이불의 발치를 비추고 있었다. 비센테는 소리를 한껏 죽인 채로 천천히 움직였다. 엘레나는 이불에 몸을 돌돌 만 채로 옆으로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비센테는 침대 옆의 의자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잠든 엘레나의 얼굴에는 피로와 평화가 동시에 공존했다. 그가 그녀를 볼 때마다 죄책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듯.

    “으…. 안 돼. 기각….”

    꿈속에서도 서류 작업에 쫓기고 있는지, 웅얼대는 잠꼬대가 기가 막혔다. 한껏 찌푸려진 미간과 가냘픈 콧대, 오물대는 입술, 베개에 짓눌린 발그레한 뺨은 낱낱이 아름다웠다.

    지나치게 오랜만에 그녀를 본 탓일까?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치솟은 욕심으로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가 목을 죄는 갑옷의 목장식을 슬쩍 느슨하게 풀었을 때였다. 그 미세한 인기척에 엘레나가 눈을 반짝 떴다.

    “…….”

    “…….”

    잠기운이 그득 묻어난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는 걸 보니, 현실이 아닌 꿈의 연장선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흔하지 않게 방심한 얼굴이 귀여워서 비센테는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엘레나는 이 모든 게 현실이라고 자각한 모양이었다.

    “…비센테?”

    “일어났어?”

    “정말… 너야? 모두 끝내고 돌아온 거야?”

    누워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이불에 엉켜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비센테가 서둘러 붙잡았다. 그는 엘레나를 욕심껏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아주 밀어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절반만 끌어안았다.

    “그래. 모두 다 끝내고 왔어. 이제 당분간 토벌전은 없을 거야.”

    “얼굴 보고 이야기해.”

    “…조금만 이대로 있자.”

    “이럴 거면 제대로 안아 주면 안 돼?”

    엘레나가 그의 품에 꼭 안기려 들며 투덜거렸다. 그녀는 파득파득 뛰는 작은 동물 같았다. 가끔은 엘레나가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이렇게까지 생기가 넘칠 수 있다는 게 기적 같았다.

    비센테는 달래듯 웃었다.

    “흙먼지투성이라 지저분해. 전장에서 돌아온 즉시 네게 온 거야. 이런 꼴로 널 봐선 안 됐는데.”

    “이런 꼴이라니.”

    “마지막 마을에서 조금 점검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전장이나 구르던 꼴이라. 널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너무 급했어.”

    “…근데 왜 얼굴도 안 보고 이렇게 어중간하게 안는데?”

    “지금 네 얼굴까지 보면 자제하기 힘들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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