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151)
  • “내가 이리 끝날 리 없어. 네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 부황께서 아시면….”

    “네 부황인 로드리고는 죽었다. 네 손으로 직접 죽여 놓고도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니다, 아니야! 거짓말이다! 사특한 술수야!”

    “하기야. 진실로 너의 부황인지도 의심스럽지 않나. 네 어미에겐 근친상간의 혐의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있었으니.”

    카스트로의 눈빛이 일순 사나워졌다. 그러나 겨우 카우치에나 기대앉아, 검에 얕게 찔린 채로 헐떡거리는 꼴은 조금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제 몸에 상처 나는 것을 극도로 끔찍해하는 놈이니 이 와중에도 흉터가 늘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머릿속이 그대로 읽혔다. 비센테가 기막힌 듯 웃자 카스트로가 이를 악문 채로 소리를 질러댔다.

    “내 어미가 아주 부정하더라도 결국 내겐 적통의 피가 흘러! 그 여자가 제 남편의 형과 붙어먹었으니까!”

    “너도 안 믿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

    “나의 부황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믿으셨다! 증거와 증인을 대자면 수없이 많고!”

    비센테는 담담히 카스트로를 응시했다. 분명, 최초의 순간에는 그렇게 믿었던 자들이 많았다. 선황제와 로드리고는 장성할 때까지 제법 사이가 괜찮은 형제였으니까. 로드리고가 한순간에 돌아서 저를 그리 아껴 주던 형을 죽였다고 믿기 보다는, 그들 사이에 그럴만한 원한이 있었다고 믿는 편이 더 속이 편했으니까.

    그래야 저들의 반역이 선황제를 배반한 게 아니라, 기만자를 처단한 것이 되니까. 불의에도 침묵한 것이 아니라, 명예를 잊은 자를 버린 것이 되니까.

    기실, 그 당시 전부가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장성할수록 비탈리 후작을 닮아 갔다. 그럭저럭 준수하게 생긴 용모도, 짙푸른 초록색 눈동자도, 가느다란 입매와 턱선마저도. 의심은 주변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카스트로에 한 번 닿았던 시선이, 그 곁에 선 비탈리 후작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비탈리 후작이 그 젊은 나이에 제 영지에 칩거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게 고작 그들이 아홉, 열 살 무렵의 일이었다.

    ‘이제는 중요하지도 않은 진실이지.’

    비센테는 그의 목을 겨누었던 칼날을 내렸다. 카스트로의 눈매가 진의를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입씨름도 피로하군. 그런 게 네게는 여전히 중요한가?”

    “네 아비의 부정에 관심이 없다고?”

    카스트로는 기막힌 듯 그를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시모라의 계집을 닮아 그런지 뻔뻔하기가 대단하구나. 여기까지 와서 혼자 고결한 척해 봐야….”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서술되기 마련이지, 카스트로. 아까 일깨워 주었는데 그새 잊은 것 같지만.”

    “다 아는 개소릴, 여태….”

    비센테가 한 걸음 다가서자, 카스트로는 놀랍게도 움츠러들었다.

    “해서 나는 너를 황제의 아들로도 비천한 거지의 아들로도 만들 수 있다. 네 어미를 아주 부정한 여자로 만들 수도 있겠고.”

    “…….”

    “네 보잘것없는 혈육들 또한 마찬가지지.”

    카스트로는 눈을 부릅뜬 채로 얼어붙었다. 그건 차라리 현실 부정에 가까웠다. 비센테가 이렇게까지 저열하게 굴 줄 몰랐다는 것처럼. 여태 몽롱하던 눈빛에 서서히 살기가 어렸다. 눈의 흰자위에 분노로 벌건 핏대가 섰다. 입가에 버르르 고인 침 거품이 벌어진 입에서 턱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이 개, 개새끼… 가…!”

    카스트로는 발악하듯 소리쳤지만 그저 말에 그치는 분노였다. 비센테의 눈에 어린 경멸에 카스트로의 양 뺨이 초라하게도 파르르 떨렸다. 한동안 그 꼴을 바라보던 비센테의 입매가 매끄럽게 끌어 올려졌다.

    “네가 살아서 그 치욕을 견디는 꼴을 보고 싶군. 한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래….”

    “그러니 부디 오래, 길게 견뎌 주길 바란다. 사촌.”

    그 말로 카스트로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어 낸 비센테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허리를 심하게 다친 모양이니 급하게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기사들이 너와 네 시종장이 있어야 할 곳을 안내해 줄 거다. 루카스!”

    “…죽이지 않으신다고요?”

    비센테가 목소리를 높여 기사를 부르는 것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시종장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비센테는 그제야 카스트로의 시종장이 여태 바닥에 엎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비센테는 서늘한 눈매를 내려 시종장을 일별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득시글대고 있었다. 분노일까? 혹은, 굴욕감?

    비센테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조금 싣다가, 그대로 늘어뜨렸다. 그래 봐야 카스트로 군의 잔챙이일 뿐이었다. 넓게 보자면, 그의 아버지 대부터 충성해 오던 시종 중 하나였고.

    “…왜. 왜 그를….”

    시종장은 누구에게 묻는지도 모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비센테는 멈칫하다가 여상히 대꾸했다.

    “때로는 사는 것이 더한 고통일 테니까.”

    시종장이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바닥을 짚은 손이, 등줄기가 벌벌 떨리는 게 보였다. 비센테는 곧 시종장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모든 것이 일단락되어 가고 있었다. 습관처럼 초조함이 목을 죄었다.

    카스트로의 신변이 인도되는 즉시, 엘레나가 있는 방으로 달려갈 것이다. 마음이 벌써부터 조급했다.

    그가 피로한 눈매를 살짝 내리뜨는 것과 등 뒤에서 카스트로를 포박할 기사들이 들어온 것, 카스트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과 시종장이 바닥에서 단검을 집어 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모두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놓쳤다.

    “……!”

    다만, 카스트로의 등 뒤에서 시종의 여윈 손이 높이 치켜 올라갔다. 섬뜩한 번뜩임이 섬광처럼 카스트로의 등을 찔렀다. 사선으로 짓이기듯 내리쳐진 칼날에 카스트로가 비척거리는 신음을 뱉었다.

    “커, 흑… 윽….”

    고통에 민감한 초록색 눈이 크게 트였다. 범인을 찾으려는 듯 고개가 덜걱덜걱 등 뒤로 돌아갔다. 시종장은 그 낯짝을 마주하고 나자, 억눌러왔던 시뻘건 분노가 터지듯 악을 질렀다.

    “죽어! 죽, 어…. 죽어! 제발, 죽으란 말이야…악!”

    억, 큭, 끄윽…. 눈앞에서 숨을 끊어놓다 못해, 지옥에라도 따라가 짓이길 기세였다. 그 무자비한 광경에는 피에 익숙한 기사들마저 얼어붙었을 지경이었다. 머리, 목덜미, 가슴, 등, 허벅지. 하나씩 차례로 짓이겨지는 광경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비센테였다.

    그는 성큼 다가서서 시종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위, 위험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주변으로 허둥지둥 몰려들었다. 비센테는 시종장의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시종장의 몸을 억지로 떼어 내자, 카스트로는 줄 끊긴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으, 그으으….”

    카스트로는 그때까지도 숨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더 처참한 몰골이었다. 짓뭉개진 벌레처럼 바르작대면서도 기어서라도 도망치려는 듯 손가락이 바닥을 짚었다. 생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그러나 이미 입은 치명상으로부터 삶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카스트로는 눈을 홉뜬 채로 천천히 제게 닥치는 가장 비천한 죽음을 목도했다. 녹색 눈동자에서는 피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으….”

    비센테에게로 뻗어졌던 카스트로의 손은 발끝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축 고꾸라졌다. 벌레의 날갯짓처럼 파들거리던 경련은 이내 멈췄다. 이윽고 그 눈에서 혼탁한 빛마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후욱….”

    그때까지도 비센테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시종장은 온통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그 채로 눈만 번들거리는 광경이 악귀가 따로 없었다.

    비센테는 서늘한 눈으로 시종장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그의 질책에 시종장은 천천히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카스트로의 목숨은 그를 지지했던 귀족들을 억제할 방파제로 쓰여야 했다. 너는 지금 제국을 끝없는 분쟁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이윽고 시종장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붙잡힌 손목이 덜덜 떨린다 싶더니, 잡히지 않은 쪽 팔로 제 몸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목숨이요?”

    시종장의 퀭한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얼굴에 들러붙은 핏자국이 눈물에 씻겨 나갔다.

    “전하께서는….”

    “…….”

    “저자를 곱게 가둬둘 작정이셨겠지요. 고문도 없이…. 성정이 그러하시니까….”

    “…….”

    “그리 안온하게 사는 꼴은, 못 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종장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보여 줬던 모든 광기와 의지는 불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까맣게 죽은 눈이었다. 그는 시종장을 기사들에게 넘겨주었다.

    “끌고 가라.”

    비센테는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 나자빠진 카스트로를 일별했다. 비참하게도,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남아 있던 이에게 등을 찔렸다. 이런 자는 죽어서조차 명예를 얻지 못할 것이다. 지옥에도 안식은 없으리라.

    비센테는 이내 그 참혹한 시체로부터 등을 돌렸다.

    “총사령관님?”

    전쟁의 완벽한 승리였다. 승전을 선언하기는커녕 자리를 이탈하는 그를 누군가 의아하게 불렀지만, 비센테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그를 부르며 뒤따르는 기사들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무엇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계단을, 그 위를, 그의 목숨을 향해 달렸다.

    “폐하.”

    무언가를 짐작한 듯 사층의 초입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루카스가 그에게 양손으로 황제의 망토를 건넸다. 비센테가 그것을 받아 들고 스쳐 지나가자, 그의 등 뒤에서 루카스가 굳건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린다. 자리를 이탈하지 마라.”

    복도에는 어느새 느지막한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 있었다. 그는 서둘러 복도의 중앙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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