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51)

탕! 탕탕!

백기를 든 투항자들의 등 뒤에서 한바탕 총격이 일었다. 순식간에 가장 뒷열부터 쓰러지기 시작했다. 계단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떻게든 먼저 총의 사정거리 바깥으로 나가려는 몸부림은 재림한 지옥를 보는 듯했다.

피, 시체, 널부러진 목숨들. 쓰러진 아군을 짓밟고서라도 자신만은 살려는 천박한 발버둥.

“문이 다시 닫힙니다!”

“적들에게 정비할 시간을 주지 마라! 진격하라!”

비센테는 명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쏜살같이 말을 앞으로 달렸다. 계단과 부상병들을 훌쩍 뛰어넘어 그대로 열린 문으로 들이닥쳤다. 총사령관의 몸이 쏠리자, 기사들과 병사들도 다급히 뒤따랐다.

머스킷은 장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저들이 한 차례 화력을 썼으니, 재장전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바, 방어해라!”

“돌격, 돌격을…해! 도, 도망치지 마라!”

카스트로 군 지휘관들의 상반된 명령에 병사들이 우왕좌왕 물러서기 시작했다. 공격은 반쯤 자포자기 같았다. 비센테는 말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저를 위협하는 총검 두 자루를 팔째로 잘라 냈다. 목숨을 끊지 않은 것이 최대한의 자비였다.

“사, 살려…!”

검과 검이 맞붙으며 불꽃이 튀었다. 그의 기사들의 손속은 점점 더 비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끓었다. 황태자 궁 안에는 면면이 아는 얼굴들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비탈리의 권력에 개처럼 붙어 기생했던 자들, 조롱에 앞장섰던 자들, 시에나 전 황후의 축출에 가장 먼저 배신했던 자들….

“목숨은 끊지 마라! 심문이 배는 고될 것이다!”

“생포하여 포로로 붙잡는 것이 우선이다. 분노에 매몰되지 마라!”

그나마 멀쩡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루카스와 올리바레스가 번갈아 명령을 쏟아 냈지만, 이미 일방적으로 기운 학살이었다.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뒷 열의 기사들이 칼을 놓고 도망치기 시작하자, 전투는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팽팽히 맞서던 기사들조차 제 뒤에 아군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하나둘 검을 내렸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기사들은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오르며 한 층씩 차례대로 점거 해 나갔다. 비탈리의 기사들은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양손이 포박된 채 차례로 복도에 무릎이 꿇렸다. 승리의 흥분에 도취된 군인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찬탈자를 찾아라!”

“찬탈자를 찾는 자에겐 큰 상을 내릴 것이다!”

그때였다.

“차, 찬탈자 카스트로가 여기에 있다!”

새된 고발이었다. 시종 옷을 입은 자가 백기를 번쩍 든 채로 복도를 내달려왔다. 겁에 질린 낯짝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창백했다. 시종은 다급히 걸음을 옮기다가, 복도에 널린 시체를 밟고 넘어진 뒤 히익거리며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재차 손가락질하며 빽 소리를 질렀다.

“저, 저쪽에 찬탈자가 있다!”

비센테는 시종이 가리키는 복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긴 복도의 끝, 황태자 비의 침실 쪽이었다. 거대한 목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검을 바짝 쥐었다. 그러기 무섭게 등 뒤로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혼자 가겠다.”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황태자 궁에 배치되어 있던 인원의 절반은 도주했고, 나머지 절반은 복도에 꿇려졌다. 그가 파악하지 못한 세력이 비밀 통로를 통해 황태자 궁 안으로 들어왔다면 모를까.

루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충언했다.

“폭약을 설치해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병사들을 시켜 이곳으로 끌고 오심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다. 저들을 방패로나 쓴다면 장차 누구의 존경을 이끌어 낼 수 있겠나.”

“…….”

“최악의 경우 카스트로가 자멸하더라도 이미 우리의 승기는 확고해. 올리바레스 소공작이 나머지를 수습해 줄 테지.”

“…….”

“혼자 가겠다.”

“…중간까지만이라도 수행하게 해 주십시오.”

루카스의 고집에 비센테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 복도를 걷는 동안 오로지 침묵과 뒤따르는 기사들의 군홧발 소리뿐이었다. 기사들은 정확히 복도의 중간 지점에서 멈춰 섰다.

“다녀오십시오.”

그는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둑한 복도 너머, 활짝 열린 황태자비의 침실에는 햇빛이 쏟아지듯 들이치고 있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문지방을 넘자, 카스트로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드, 디어, 왔…군.”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스트로는 웃통을 벗은 채로 시종의 극진한 시중을 받고 있었다. 허리를 무엇으로 찔린 모양인지, 꽉 감아 놓은 붕대에선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 네가, 이럴 줄 나는 진, 작 알았지….”

꼴사납도록 헐떡이면서도 이를 드러내는 꼴은 조금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저 몽롱하게 맥이 탁 풀린 눈동자. 약이라도 했는지, 말과는 달리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

“…….”

비센테는 시선을 조금 내려 카스트로의 발치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끔찍하게 난도질되어, 입혀둔 의복이 아니었다면 신원조차 확인이 어려웠을 것이다. 기사가 하나, 시종이 둘, 하녀가 둘….

그 시체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피에 젖은 황태자의 검이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비센테는 한눈에 시체들에 난 상처들에 그 흔한 저항흔 하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계로 찍어누른 일방적인 살육.’

그것을 깨닫자 눈앞의 사촌을 향한 새삼스러운 증오심이 타올랐다. 이 방에서 생존한 자는 단둘뿐인 듯했다. 하나는 덜덜 떠는 손으로 붕대를 갈고 있는 눈앞의 시종장,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카스트로의 위치를 실토하고 복도에서 구토해대고 있는 고발자.

“치워.”

시종장의 손길이 성가시다는 양 이내 카스트로가 손을 내저었다. 시종장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운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네가 왜 나, 를 못 죽이는지 알아. 시모라 창녀의 자, 식아….”

“…….”

“엘레나의 행방이 궁금해? 아, 어쩌지? 그 계집은, 내가 이미, 죽였, 지.”

“…….”

“내가 못 가지면 너도 영, 원히 못 가져. 그것을 진작 알았…어야지!”

저열한 도발에도 비센테가 넘어오지 않자, 카스트로는 그제야 제가 처한 상황을 깨닫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두려움, 제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수치, 혐오, 분노, 질투….

온갖 혐오스러운 감정들이 넘실거리던 카스트로의 눈동자가 이윽고 점차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정신, 나간 새, 끼가…. 날, 보고 웃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센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환각이라도 겪는 양 발작하기가 저 꼴이었다. 카스트로는 마치 제 뒤에 여전히 기사들이 도열해 있기라도 한 양 냅다 고함을 내질렀다.

“저자를 죽여라, 죽여!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겐 내가 큰 상을 내릴, 내릴 것이다!”

“…….”

“누구 없…느냐! 저 반역자 새낄 죽이라니까!”

카스트로는 미친 자처럼 제 등 뒤를 연신 돌아보며 소리 질렀다. 광포한 외침에 응답할 이들은 이미 죽어 있는 광경은 섬뜩한 구석마저 있었다.

검을 쥔 비센테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카스트로가 흠칫 놀라며 이를 드러냈다. 꼭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았다. 비센테는 그 처참한 꼴을 담담하게 응시했다.

“카스트로.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

그의 나직한 음성에 카스트로의 눈매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꼭 살아나갈 구멍이라도 찾은 쥐새끼처럼, 일말의 희망이 언뜻 서렸다. 비센테는 이내 재차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죽음은 네게 너무 편안한 안식이지. 안 그런가?”

“이 개, 만도 못한 새…끼가 감히 나를 우, 롱해?”

물어뜯기라도 할 듯 으르렁거리던 카스트로의 목소리는 비센테가 한 걸음 더 다가서자, 아주 불안하고 초조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공포가 창백한 낯짝 위로 선연했다.

비센테는 쥐고 있던 검날을 비스듬히 세워 그의 쇄골을 겨누었다. 카스트로가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비센테는 그대로 검을 얕게 찔러 넣었다. 헐떡이는 비천한 숨결이, 검날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너는 살아서, 똑똑히 보아야지.”

“…….”

“네 어미의 눈이 멀고, 네 비천한 처지가 아프도록 밟히고, 네 유일한 긍지인 혈통에 오물이 묻어 지저분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감히.”

빠드득. 카스트로의 잇새가 갈리며 섬뜩한 소리가 텅 빈 침실 안을 울렸다.

“그것이 사실과 관계없이 역사에 기록되어 유일한 진실이 되어가는 것을.”

“…네가, 감히!”

“카스트로. 너는 똑똑히 지켜봐야지.”

“으아, 으아아!”

카스트로의 발악에도 비센테의 서늘한 음성은 고저 없이 평온했다. 부정하듯 거센 고함을 토해 내던 카스트로가 불현듯, 그 모든 행동을 뚝 그쳤다. 이내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웃었다.

“아하, 하… 하.”

“…….”

“하마터면 깜박, 속을…. 그래, 비센테. 네가 거짓말과 기만, 수작질에 능하단 것을 나는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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