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151)
  • 적군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비센테군은 전열을 굳건히 가다듬었다. 총기를 든 장창병들이 우렁차게 구호를 내지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뒤로 보병들이 총을 받들어 겨눴다. 움직임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했다.

    “사격 준비!”

    “발포!”

    탕! 타탕! 탕탕탕!

    궁의 정문을 지키던 수천이 부상을 당했고, 수백이 도망쳤으며, 수십이 목숨을 잃었다. 공포에 질린 채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총칼은 누구도 부상 입히지 못했다.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던 카스트로군이 이윽고 포탄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쾅, 콰광!

    뿌연 흙먼지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살상력도 명중률도 형편없었으나, 진입을 막기에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다. 비센테군의 공세가 주춤해진 틈을 타서 카스트로군은 재빨리 본궁의 계단 안쪽으로 물러섰다.

    최후의 방어선이라도 되는 양 온갖 가구들로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총검을 든 보병들로 빈틈없이 건물의 앞을 에워쌌다.

    “미, 밀리지 마라!”

    “위치를 사수해! 조금만 더 버텨라!”

    “사, 살려…!”

    점점 처절해지는 외침은 듣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하나하나가 아까운 죽음이었다. 정작 죽어야 할 이들은 도망치고, 장교조차 되지 못하는 말단 병사들만 남았다. 비탈리에 변치 않는 충절을 맹세했던 그 수많은 기사들과 귀족들은 우습게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총성 사이사이로 그의 부관들이 미리 명령받은 대로 고함을 질렀다.

    “투항해라!”

    “투항하면 살려 주겠다!”

    내전은 소모전이었다. 희생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적들 또한 에스페다인들이었고, 심지어 저들 중 태반은 카스트로의 귀한 낯짝조차 한 번 본 적도 없을 터였다.

    “황위는 정당한 계승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백기를 든 자들은 공격하지 않겠다!”

    적들의 마음이 시시각각 꺾이는 것이 보였다. 포탄 세례에도 그의 군대는 굳건했고, 적들의 화약은 대부분이 젖어 발포조차 되지 않았다. 육탄전으로 접어들면 격차는 더욱 심했다. 한낱 호위병들이 전쟁터에서 구른 기사들을 검으로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던 첫 열이 바람 앞의 갈대처럼 우수수 쓰러지자, 두 번째 열부터는 전의를 상실했다. 무기를 버리고 백기를 들거나 달아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문을… 총사령관! 본궁의 문이 열립니다!”

    “적들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폐하!”

    “도망치는 자들은 쫓지 마라.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센테는 거칠게 투레질하는 말의 고삐를 팽팽히 당기며 재차 명령했다. 소란스러운 전투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명확하게 들렸다.

    “찬탈자 카스트로를 찾아라! 그의 수급을 거두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마라!”

    “명 받듭니다!”

    본궁은 이제 수습만 남아 있었다. 이제야. 그는 서둘러 말의 등을 허벅지로 누른 채 재빨리 황태자궁을 향해 달렸다. 내내 벅차게 차오르던 숨이, 이제는 견디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빠 왔다.

    “총사령관. 오셨습니까?”

    황태자궁을 빼곡하게 포위하고 있던 루카스가 그를 보고 곧장 인사를 건넸다. 포탄과 화약으로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그들의 얼굴로 한 차례 훅 끼쳤다. 비센테가 물었다.

    “상황은?”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 중입니다. 포탄을 쏜다면 본궁과 비슷한 시간 안에 함락이 가능할 듯 보여집니다만….”

    비센테는 바리케이드의 너머 멀리, 푸르스름한 연기에 감싸인 황태자궁을 향해 조급한 시선을 던졌다.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가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꼭대기 층, 오른쪽, 하나, 둘, 셋….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는 가까스로 남은 창문을 확인했다.

    ‘아.’

    커튼이 젖혀져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심장이 불안정하도록 빠르게 뛰었다.

    ‘엘레나.’

    겨우 이곳까지 왔다.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실낱같은 가능성을 보며 버텨 냈다. 저것은 기만일까, 희망일까?

    초조함에 목울대가 울컥 조여들었다. 당장이라도 앞을 가로막는 적군을 짓밟고 적진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엘레나의 여윈 몸을 품 가득 끌어안아야, 그 생의 흔적을 제 몸으로 확인해야 족하리라.

    하지만 그는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다. 그의 안위, 그가 머무는 곳, 그의 굳건함에 따라 승리가 결정된다. 자리를, 함부로, 이탈할 수는 없었다.

    또.

    시야가 까맣게 죽으며 견디기 힘든 불안증이 치솟았다. 엘레나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지나칠 때마다 사방이 까맣게 변하고, 지옥인지 나락인지 모를 곳으로 떨어졌다. 이건 전쟁의 지휘관으로서는 치명적인 하자였다.

    처음 이 증상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그는 모든 것을 올리바레스 소공작에게 넘길 작정을 했다.

    전쟁 중 시야를 잃는 총사령관이라니. 그에게 목숨을 맡긴 수천을, 수만을 자살로 이끄는 것과 다름없다. 오늘을 무사히 넘긴다 한들 황제로서 치를 수많은 전쟁마다 고비일 것이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황제라는 지위에 미련을 가진 적 없었다. 혈통만으로 총사령관의 자리를, 황좌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본 바도 없었다. 그러면 제게 성군의 자질이 있기를 한가?

    그는 군주가 아니라 사냥개로 길러졌다. 대단한 대의? 고작해야 엘레나를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가 이번 전투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완전한 승리.’

    하지만 그의 작전대로만 움직인다면 올리바레스 소공작 또한 벨몬테를, 카스트로를 압박해 낼 수 있을 터였다. 영주의 후계자로 엄격히 길러졌으니 훗날 국가의 운영 또한 그보다 나으리라.

    하지만 올리바레스는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 그가 사령관이 된다면 벨몬테는 이보다 배는 늦게 함락되었을 터다. 수도에서 곱게 자란 귀공자와 그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전쟁 경험의 차이가 있었다.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엘레나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모를까.’

    그녀가 황태자궁 안에 붙잡혀 있는 이상 속도전은 불가피했다. 이 상황만은 그토록 막으려 했건만. 차라리 제 목숨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비센테는 날뛰는 속을 지그시 억눌렀다. 시야는, 곧 돌아올 터였다.

    “총사령관님.”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해 적절히 고개를 돌렸다.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사가 고개를 숙이는 기척을 정확히 느꼈다.

    “찬탈자 카스트로의 소재를 찾았습니다.”

    “보고해.”

    “황태자 궁 내부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창문에 상이 비쳤습니다.”

    상대의 목소리가 여즉 태연한 것을 보아하니,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비센테는 목소리를 높여 담담하게 물었다.

    “상황은?”

    “적들의 도주가 우리의 예상보다 빨랐습니다. 남은 적군은 오백 남짓입니다. 부디, 발포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비센테는 잠시 침묵했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말고삐를 꽉 쥐었다. 곁에 서 있던 기사는 그가 전투의 흥분을 억누르려 떨고 있다는 것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서서히, 까맣던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반드시 찬탈자의 수급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는 황태자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쪽은 본궁에 배치된 전력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비탈리에 오랫동안 충성한 가신들, 병사들, 황태자의 비호를 업고 악행을 저질렀던 기사들….

    카스트로가 이기지 않으면, 어차피 목숨을 잃게 될 자들이니 필사적이었다. 마지막 발악인 만큼 거셀 것이다. 대포로 정문을 뚫고 진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머리로는 판단했다. 하지만 황태자궁 안에는 엘레나가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대포를, 잘못 발포하면.

    “총사령관!”

    누군가의 새된 외침에 비센테는 고개를 번뜩 들었다. 적군의 동태가 수상쩍었다. 저들이 직접 세워 두었던 바리케이드들이 하나씩 거둬지고 있었다. 무슨 새로운 수작이지?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황태자궁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립니다!”

    “전군! 전열을 가다듬어라!”

    비센테는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정교하게 계산해도 전쟁은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만의 하나라도 적들의 화력을 잘못 측정했을지도 몰랐다. 그의 군대가 지닌 대포가 적들의 사석포보다 사정거리가 길었다. 만약, 적들에게도 그들과 같은 대포가 있다면….

    “적들이…!”

    누군가의 외마디 외침이 빨랐다. 그도 보고 있었다. 비센테는 가벼운 전율에 휩싸인 채 비탈리의 기사들이, 카스트로의 병사들이 백기를 들고 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적들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우렁찬 함성이 황태자궁의 하늘을 뒤덮었다. 걷잡을 수 없는 환희가 들끓었다. 오직 비센테만이 고요하게 백기를 든 기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침통함, 불안함, 두려움, 공포. 공포?

    천천히 움직이던 투항자들의 움직임이 급해진 것도 그 찰나였다. 계단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의 급한 움직임이 시작이었다. 쏟아지듯 앞다투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당황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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