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51)
  • 경비대의 문을 열고 나서자 그의 병사들이 도시의 곳곳을 누비는 것이 보였다. 전투는 진작부터 마무리 단계였고, 대다수는 아이들과 노인을 도시 외곽으로 대피시키느라 바빴다.

    곧 대포의 포격이 시작될 터였다. 저쪽에서 응수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최대한 거리를 비워 두는 것이 좋았다.

    우르르, 대포가 실린 수레가 묵직한 바퀴가 굴러오며 내는 요란한 소리가 저 멀리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소리를 뚫고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총사령관님!”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말 세 필이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르곤 자작과 그 휘하의 기사 둘이었다. 그들이 급히 말에서 내려서며 고개를 숙였다.

    “자작. 동측 성가퀴에 있던 것이 아니었나?”

    “급히 보고드릴 것이 있어 부득이 이탈하였습니다. 그쪽의 전투는 이미 마무리 단계입니다만, 남동측의 가도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황궁 내에서 누군가 빠져나가 도움을 요청한 것 같습니다.”

    “남동측이면 안드라데겠군. 공작은 사병을 키우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비탈리의 군사들을 이끌고 올라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알리칸테 평야를 넘어오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가브리엘라 황후가 지휘권을 넘긴 모양이더군요.”

    “황후가?”

    그는 잠시 남동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치, 벨몬테의 성곽과 산맥 너머에 있을 후작의 군대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젊은 황자의 시선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신중함이 묻어나는 것을 자작은 찬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간혹, 젊은 황자에게선 전장의 지휘관으로 오랫동안 복무한 자 특유의 노련함이 묻어났다. 이런 것은 수십의 세월로나 얻는 것인데….

    “어차피 속도전이었다.”

    그새 계산이 끝난 듯 비센테가 시선을 깔끔히 갈무리하며 입을 뗐다.

    “그들이 가장 빠른 길을 택해 진격한다고 해도 가교는 이미 끊어져 있을 테지. 알리칸테 근처에서 주둔하던 부대는 비탈리의 전군은 아니다. 해 봐야 삼 만쯤 되겠지.”

    “예. 예측하기로는 가브리엘라 황후의 시녀가 황후의 위임장을 들고 탈출하여 합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위임장을 든 시녀가 이제야 고작 알리칸테를 움직였다면, 비탈리의 본대가 있는 무르시아까지는 아직도 닷새가 꼬박 걸리겠군요.”

    “후작의 전력을 깎아 낼 수 있다면 전면전으로 꺾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벨몬테가 돌이킬 수 없는 상해를 입을 테니….”

    비센테는 말을 멈추고 피로한 눈을 잠시 내리떴다.

    “황후의 소재는? 탈출한 여자가 시녀가 확실하다고 하던가?”

    그 말을 받은 것은 루카스였다.

    “예. 황후는 아직 궁에 있습니다. 카스트로가 엄중한 유폐를 명했다고 합니다. 저희 측 하녀가 어제저녁 얼굴을 확인하였습니다.”

    “…제 무덤을 다양하게도 파는군.”

    그의 어조에는 비아냥이나 빈정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비센테는 짧게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불필요한 희생이 늘어나겠지만, 황궁을 공격할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기겠다. 황후를 지키는 하녀에겐 약을 주었나?”

    “예. 명령하셨던 대로 늘 마시는 와인에 수면제를 탔을 겁니다. 황궁이 전복될 때까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겁니다.”

    “그래….”

    황후를 생포하기만 해도 전황이 달라진다. 비탈리 후작은 살아 있는 제 여동생을 외면하지 못할 터였다. 한때 돌았던 그 끔찍한 추문을 제하더라도, 후작은 제 여동생에게 제법 애틋하게 굴어 왔으니까.

    황궁을 점령한 이후로 이어질 쓸모없는 소모전을 피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짓도 저지를 수 있었다.

    “대피 현황은?”

    “거의 끝나갑니다.”

    “유탄이 날아들 수 있는 거리까지 전부 비워. 시민들의 안전이 확인되면 바로 작전에 돌입한다. 말을.”

    그의 명령에 병사들이 부리나케 말을 끌고 왔다. 비센테가 말에 올라타자, 주변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 전원이 말이 탑승했다. 그는 말을 내달려 황궁의 전경이 보이는 솔 광장으로 진입했다.

    높은 철문을 두고, 총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이쪽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엘 파사 황궁의 중앙 광장을 붉은 깃발을 든 병사들이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벨몬테 성곽의 오합지졸과는 차원이 다른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총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을 위치에서 비센테가 말을 멈춰 세우자, 올리바레스 공작 영윤이 그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진척 상황은?”

    젊은 소공작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그가 가리킨 황궁의 철문 쪽에서는, 2황자군의 전력을 소리 높여 읊고 있는 종기사들이 여럿 있었다. 전력의 차이로 선동하여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한 배치였다.

    “스스로 황국군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지닌 기사들이 많은 터라, 아무래도 무혈 입성은 어려울 듯합니다.”

    알바 백작의 첨언대로였다.

    그는 고요한 눈을 들어 황궁을 바라보았다. 카스트로의 모습은 여전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애가 바짝 탔다. 인내심이 말랐다.

    “황제의 깃발을 걸어라.”

    드디어. 군의 수뇌부들의 머릿속에 일시에 든 생각이었다. 그들은 즉각 2황자의 깃발을 내리고, 황제를 상징하는 사자의 깃발을 들었다. 시모라의 상징인 검푸른 색 벨벳에 도약하는 사자가 은빛으로 수놓아진 깃발이 물결처럼 광장을 가득 메웠다.

    비센테의 손짓에 헐레벌떡 뛰어온 기사가 양손으로 공손히 깃발을 바쳤다. 비센테는 깃발을 높게 치켜올린 채 천천히 말을 몰았다. 철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조롱을 퍼붓던 소리가 뚝 멎었다. 아군뿐 아니라, 철문 너머의 카스트로군까지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의 장자로 태어나, 굴종을 휘장처럼 두르고 자라, 기어이 이 자리에 섰다.”

    비센테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또렷했다. 창공을 나는 매의 울음처럼 푸르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오늘 비로소 나는 태어날 때 신께서 부여했던 나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에스페다는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나는 앞장서 증오의 굴레를 끊어 낼 것이다. 짐은, 여기서 신께 맹세한다. 모든 순간에 그대들과 함께 서겠다!”

    루카스는 도열한 기마병들의 최전방에서 천천히 말을 모는 비센테의 곧은 등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깃발을 든 정당한 계승권자의 뒷모습을. 십수 년간 애타게 바라 마지않던 순간의 도래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충성스러운 기사의 가슴에 짜릿한 희열과 자부심이 부풀었다.

    그들의 황제가, 깃발을 치켜올렸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벼락처럼 뜨거운 함성이 그가 말을 맺음과 동시에 우렁차게 피어올랐다. 병사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에 건물이 흔들리는 진동이 전해졌고, 놀란 새들이 하늘로 일시에 날아올랐다.

    비센테는 철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기세에 카스트로군의 사기가 한풀 꺾인 것이 느껴졌다. 저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기사들이 총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한껏 목소리를 돋웠다.

    “지금이라도 투항하는 자들은 무탈하리라! 우리의 목표는 반역자 카스트로다!”

    “선황제를 살해한 찬탈자를 감싸지 마라! 그대들은 더는 황국군이 아니다!”

    “찬탈자 개인의 군대로 전락하지 마라!”

    라스팔마스, 기메라, 올리바레스…. 그의 깃대를 앞장서서 잡은 귀족들은 하나같이 에스페다의 개국 공신 가문들의 수장이었다. 정당성은 이미 그에게 있었다. 견고하던 황태자군의 진영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이탈자들을 응징하느라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는 것도 보였다.

    애초부터 저들은 철문을 두고 갇힌 형국이었다. 심리적으로 몰려있을 터다.

    “화포 앞으로.”

    “화포 앞으로!”

    그의 명령에 보병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대포를 실은 수레들이 앞으로 전진했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철문에 가장 가깝던 황태자군이 우수수 뒤로 물러났다. 포탄이 장전되었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대포의 옆에 섰다.

    “명령을.”

    “폐하, 명령을!”

    도열한 병사들을 바라본 비센테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포하라.”

    즉각 대포에 불이 붙었다. 심지가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내자 황국군의 동요가 심해졌다. 어어어, 첫 열이 뒤로 넘어가며 대형이 깨지는 소란이 일었다. 카스트로 측 기사가 외치는, 반역자 비센테의 꾀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외침도 더는 소용없었다. 마침내 심지가 다 타오른 순간.

    콰과광! 쾅!

    정확히 정측 출입문을 가격한 포탄에 철문이 반파되었다. 푸르스름한 화약 연기와 푹 패인 땅에서 흙모래가 일시에 시야를 가렸다. 비센테의 기마병들이 쏜살같이 뚫린 철문을 넘어 진격했다.

    비센테 또한 날뛰는 말의 등을 허벅지로 꽉 조이며 능숙하게 적군의 사이로 말을 몰았다. 자세가 무너진 장창병과 보병들 사이를 누비며 공격을 받아 냈다.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칼을 내고, 찍어누르고, 피를 뒤집어썼다.

    근접전으로 접어들면 총기는 아직 쓸모없이 마련이었다. 그는 혼란한 와중에도 적의 사령관들을 놓치지 않았다.

    “2황자 전하.”

    그를 부르는 것과 칼날이 들이닥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비센테는 칼날을 거의 보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공격을 막아 냈다. 검을 휘두른 건 발데페르 백작의 장남인 레오넬이었다.

    레오넬은 비센테가 막아 낼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발데페르 영윤.”

    “제 얼굴을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검을 맞댄 힘을 버티기 힘든 듯, 레오넬이 잠시 이를 악물었다. 비센테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덤덤히 권유했다.

    “투항해라. 카스트로에게 승산은 없다.”

    “알고 있습니다.”

    젊은 영윤은 비센테의 말에 선선히 긍정했다.

    “그러면.”

    “그러나 전하. 가끔은… 물러나기에 너무 늦은 때도 있는 모양입니다.”

    비센테는 레오넬의 입술에 감도는 푸른빛을 보았다. 이미 죽음이 절반 이상 진행된 듯 보였다. 전투에 임하기 직전 자진을 위해 독을 마신 모양이었다.

    “왜….”

    “제가 여기서 죽는다면 멍청한 레오넬로 기록될 테지만, 제가 전하께 투항한다면… 발데페르의 신의와 명예는 땅으로 떨어집니다. 신의와 명예를 잃은… 가문이 어찌 훗날을 도모하겠습니까.”

    “…….”

    “하나만…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제 어린 동생과 어머니는… 무엇도 모르십니다. 멍청한 장자의 실수였다고… 그렇게 넘겨 주시겠습니까?”

    비센테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오래지 않았다.

    “사냥제에서 그대가 비탈리 영애의 계획을 고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음을, 한시도 잊어 본 바 없어.”

    독 기운에 서서히 새파랗게 질려가던 레오넬의 얼굴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 말, 씀은….”

    “너의 다섯 살 난 동생의 목숨은 보장하겠다.”

    먹먹히 차올랐던 숨을 그제야 터트리듯, 레오넬이 활짝 웃었다. 이윽고 고삐를 쥔 레오넬의 손에서 힘이 빠지고, 검마저 떨어졌다. 숨이 꼴깍 넘어가는 와중에도 허리를 꼿꼿이 편 그가 그에게 황제를 향한 경례를 올려 붙였다.

    “폐하의 치세에 영…광 깃들기를.”

    그게 마지막이었다. 단말마처럼 깃들었던 영혼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말에서 떨어지려는 레오넬의 시체를 비센테가 직접 받았다. 그는 얼마간 침묵 후, 루카스에게 명령했다.

    “가급적 시신을 온전히 가족에게 인도하라.”

    “예, 폐하.”

    비센테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수라장이 된 황궁의 한복판에서, 그는 승기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군대에 비하면 카스트로군은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태자궁을 사수해!”

    “황태자 전하만은 반드시 보호해야만 한다!”

    “안드라데 공작 전하께서 곧 전선에 합류하신다! 전열을 이탈하지 마라!”

    카스트로군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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