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51)
  • “저는 그 어떤 미래도…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마녀는 그를 두려워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간 눈으로 만고불변의 진리를 전하듯 담담히 직시했다. 한참의 대치가 있었다. 잽싸게 물을 가져온 병사가 머뭇거리다가 이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그는 힐다를 밀어내듯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짚고, 피로한 낯을 거칠게 문질렀다.

    “부디 용서하세요. 제 입으로 누설하는 순간 미래가 바뀌기 때문이에요. 사소한 것 하나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제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

    “하지만 감히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아가씨는 살아계십니다.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계세요. 제 눈에는 그것이 보입니다.”

    아. 그는 끊어질 듯한 신음을 삼켰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시겠지요.”

    그 말에 곧장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엘레나의 맑은 목소리가, 그 당시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귓가에서 살아났다.

    “우리 어릴 때 말이야. 둘이서 같이 찾아내고 다녔던 황궁의 비밀 방들, 기억나?”

    “서너 개는.”

    “사실, 그중에 네 아버지께서 내게만 알려 주신 곳이 있었어.”

    “부황께서?”

    “응…. 너에게도 알려 주지 말고 나만 알고 있으라고 하셨었는데. 네가 우린 평생 함께할 사이니까, 무엇도 비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해서 알려 줬었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기억이 날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게 왜?”

    “그냥,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떠올라서…. 그 방에도 우리가 이렇게 긴 카우치를 가져다 뒀잖아.”

    그게 대단히도 행복한 기억이라는 양, 재잘댈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그게 어떤 암시였다는 것을. 어쩌면 제게 안아 달라고 하던 그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그는 불쑥 치솟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언젠가처럼 호흡이 힘들었다. 숨, 들이쉬고, 내쉬고.

    제발. 지금은 전투 중이었다. 총사령관이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빌어먹을.”

    손등으로 툭 떨어진 눈물을 깨달은 순간, 비센테는 주먹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었다. 여태 태연한 척, 무엇에도 대체로 무던히 반응했던 것이 극도로 치솟은 불안감의 반작용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손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렸다.

    “전하….”

    “그 입 좀.”

    다물어. 잇새로 명령을 삼키며 그는 제 주먹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침묵은 짧았다. 떨림은 놀랍도록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직, 엘레나가 황궁에 있었다. 그는 다시 냉정한 총사령관의 껍질을 뒤집어썼다.

    “원한다면 힐다, 네 신변은 군에서 보호하지.”

    “아니요.”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사실은 진작 출발했어야 옳아요. 하지만 계속, 아가씨가 마음에 걸려서….”

    비센테는 노파의 허름한 옷과 다 닳아빠진 신발, 그리고 초췌한 안색을 바라보았다. 며칠이나 잠도 못 자고 정처 없이 돌아다닌 것처럼 보였다. 노파 또한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지독히 치미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서.

    “이번에 전하를 뵙는 것이 제게 허락된 마지막이었습니다. 본래 저희 일족은 늘 수많은 제약을 달고 살지요.”

    “일족이라니.”

    “그날.”

    쪼글쪼글한 노파의 입술이 토해 낸 말에 비센테는 온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그날’은 하나뿐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바로 그 밤.

    “제가 전하께 건네었던 약은 목숨을 앗는 게 아니라, 그 육신의 시간을 멈추는 종류였습니다. 해서 전하께서는 이번에는 시간을 돌이킬 수 없으셨지요. 아가씨가 죽은 게 아니니까. 이는 수많은 비틀림의 기로 중 하나였습니다.”

    숨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분노로 시야가 일순 까맣게 변했다.

    “그걸…. 감히, 엘레나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도….”

    “저희는 수없이 많은 미래를 읽고, 과거를 기억하고, 수없이 많은 현재의 비틀림을 마주합니다. 저희의 일족에게 시간은 늘 고여 있는 호수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들여다보고 마주하기 때문에 무엇도 잊지 않지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그저 관성처럼 가라앉은 낯으로, 지저분한 노파를 향해 치솟는 살의를 견디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다르시지요. 수없이 많은 세월을 돌이키고, 수없이 많은 세월을 감당하시다, 그렇게 잊은 기억도 있으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저희 일족의 일이고요.”

    …어쩐지 구역질이 치밀 것만 같았다. 절반의 영원을 바라보는 노파의 하얗고 까만 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깃들어 있었다. 문득, 마녀가 웃었다.

    “물론, 제가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고야 만 것은… 저의 실책입니다. 하여간에 그 애처로운 것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노파는 이가 다 빠진 입술을 드러내며 웃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몰골에 맥이 탁 풀렸다.

    힐다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양 낡은 옷가지를 뒤져 무언가를 또 주섬주섬 꺼내었다. 납작한 통에 담긴 것은 풀을 짓이겨 놓은 연고처럼 보였다.

    “이것은 제가 인과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도에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엘레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치 천장에 가려진 해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허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늙고 앙상한 몸이 거의 고꾸라질 듯했다.

    “부디,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만.”

    문으로 다가서는 힐다를 그가 불러세웠다. 노파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문고리를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도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나?”

    “아. 그것은.”

    노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화상으로 짓무른 흉터에 좋은 연고입니다.”

    “…….”

    “그러면, 전하. 부디 신께서 당신의 앞날을 굽어살피시길.”

    문이 열렸다가 이윽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노파의 인기척은 처음부터 바람만큼이나 약했으므로 사라지는 것도 빨랐다. 그의 손에 들린 약병이 아니었다면, 선 채로 꿈이라도 꾼 줄 알았을 것이다. 아니면 지독한 환각을 겪었거나.

    “총사령관님!”

    그는 저를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멈춰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약병을 꽉 쥔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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