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51)
  • 아, 엘레나.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너는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너를 살리기 위해 너절하게 뜯어져 나갔던 나의 욕망을 알았다. 그는 노도처럼 몰려 오는 감정 앞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햇빛에 부스러질 듯 여윈 어깨,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긴 머리카락, 돌아보며 그를 기껍게 부르는 음성, 빛 아래에서 무엇보다 푸르던 눈…. 그 모든 것이 간절했다. 간절한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웠다. 그래서 견뎌 낼 수 있었다.

    네가 아직 그 지옥에 있으니까. 구하러 올 것을 내게 명령했으니까.

    비센테는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도열한 군 전원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단테가 끌고 온 거대한 흑마 위에 성큼 올라탔다. 천천히 기사들의 앞을 가로지르자, 그들이 검과 창을 치켜 올렸다.

    “들어라.”

    푸르스름한 새벽의 대기를 단단한 목소리가 갈랐다.

    “우리가 진군하는 지점은 우리의 고향이자, 우리의 수도이다. 우리를 섬기고, 우리가 섬겨야 할 백성들의 터전이다. 부주의한 살생, 약탈, 방화, 무엇도 허락하지 않겠다. 우리는 저들과 다를 것이다!”

    서늘한 공기가 서서히 들끓기 시작했다. 때로는 수천 마디의 연설보다도 하나의 장면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법이다.

    “부디! 끝까지 고결하라!”

    그의 목소리가 넓은 평야 위로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신의 축복처럼 아직 어둑한 새벽하늘을 뚫고 쏟아진 한 줄기 빛이 비센테의 금발 위로 찬란히 비산했다.

    보라,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땅이 울리는 함성이 일었다. 그들의 사기가 충분히 끌어 오를 때까지 기다린 비센테는 적절한 시기에 주먹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진군하라!”

    ***

    비센테는 제게 달려드는 비탈리의 기사 둘을 힘들이지 않고 베어 넘겼다. 그 깔끔한 죽음에 아군의 찬탄 어린 시선이 달라붙었다.

    벌써 몇 명인지 모를 적군의 피를 뒤집어쓴 까닭에 온몸이 피에 절어 있었다. 그는 제가 총사령관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긴가민가하며 주변을 번잡하게 공격해 오는 것보다, 제가 모든 공격의 표적이 되는 편이 나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다시는 견디고 싶지 않았기에.

    “이것으로… 이쪽 경비대는 마지막입니다.”

    알가바의 장자가 동측 경비대장을 끌고 왔다. 경비대장은 덜덜 떨며 비센테의 발치에 엎드렸다. 비탈리의 비호를 입고 도박장을 운영하던 자였다. 군에 납품되어야 할 물품을 빼돌린 전적은 허다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전하, 아니, 폐하를 앞으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하나였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살생이 목적인 전투가 아니었다. 비센테는 곁에 선 기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살려서 감금해. 재판에 회부할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다 살았다는 양 희망찬 얼굴이 우스웠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이 나았다고, 제발 죽여 달라 빌 한 치 앞의 미래는 생각조차 못 하고. 비센테는 느슨히 늘어트렸던 검을 갈무리하고, 경비대의 건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루카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짧게 묵례했다. 불법적 행위가 일어났다는 자료들을 수거하는 병사들 너머로, 단테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의무병들이 달라붙어 그의 상처를 진찰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후방으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상이 심각합니다.”

    “개소립…니다!”

    단테가 억울하다는 듯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의무병의 손에 우악스럽게 끌어 내려졌다. 그가 그러지 않았더라도 저만한 상처에 펄펄 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센테는 잇새를 악물었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이윽고 천천히 내렸다.

    찰나의 동요는 깨끗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총을…. 그 개 잡놈들이….”

    “너는 말을 아껴라, 단테. 루카스. 어떻게 된 일이지?”

    “화약 보관고에 물을 부었는데, 그중 운 나쁘게 젖지 않은 상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운 좋게 치명상은 피했지만, 팔을 다쳤습니다.”

    루카스가 차가운 눈으로 단테를 내려다보았다.

    “혈액 손실이 상당합니다. 괜히 무리하다 상처가 덧나게 하느니, 엔리케의 곁으로나 보내 주면 좋을 듯합니다.”

    “엔리…. 야! 그거, 완전히… 전투 이탈….”

    “허락한다.”

    “전…하!”

    허옇게 질린 낯으로도 살만한지 단테가 펄펄 뛰었다. 비센테는 한숨을 내쉬고, 총이 스친 상처를 붙잡았다. 그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단테는 퍼드덕 등줄기를 떨었다.

    “전황이 순조롭다고는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부상당한 기사는 결국 아군을 위협하니 후방으로 후퇴해.”

    “…….”

    “대답.”

    “명, 받…듭니다.”

    비센테는 그제야 굳었던 입매를 조금 풀었다. 차라리 저만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빠지는 것이 다행이었다. 가급적 제 주변에 기사를 두지 않고 돌아다님에도, 하얀 갑옷을 입은 장교들은 늘 첫 번째 표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때, 경비대 안으로 병사 하나가 뛰어들었다. 팔에 찬 완장을 보니 서쪽 경비대에서 보낸 전령이었다. 그가 비센테와 루카스를 보고 힘차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전황은?”

    “서측은 순조롭습니다. 지나오는 길에 남측에도 깃발이 오른 것을 보았습니다. 경비대 세 곳 모두 점거를 완료하였습니다.”

    “봉화대는?”

    “근처 병사들을 모조리 감금하고 장교들의 수급을 거두었습니다. 봉화에는 물을 부어 두었습니다. 당분간 불이 오를 일은 없을 겁니다.”

    “곧 속도전에 접어들겠군. 충차가 진격하는 동안은 잠깐 시간이 있겠어.”

    전령의 말대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카스트로의 군대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오합지졸이었고, 오랜 부패로 제대로 된 훈련조차 이뤄져 있지 않았다. 그나마 전쟁 지휘 경험이 있는 비탈리 후작은 카스트로 스스로의 손으로 유폐해 두었다. 끔찍한 자충수였다.

    “저, 그리고….”

    진작 물러갔어야 할 전령이 머뭇거리며 그를 붙잡았다. 확신 없는 얼굴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경비대의 앞에 웬 여자가 총사령관님을 찾습니다.”

    웬 여자. 비센테는 일순 당혹한 눈으로 전령을 바라보았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그를 찾을 여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제 눈먼 어미는 이미 전쟁의 화마에서 벗어난 곳으로 보내 두었고, 엘레나는 여전히 저 지옥 속에나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전령의 표정이 덩달아 굳었다.

    “소, 송구합니다. 물론 저는 아니니라 생각했는데, 그 노파가 총사령관님을 아는 듯 굴기에….”

    노파.

    “어디에 있지?”

    “예?”

    얼뜬 대답에 인내심이 깎였다. 비센테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경비대 바깥에….”

    그는 전령을 휙 지나쳐 건물 바깥으로 나섰다. 시체들이 수북이 쌓인 경비대 바깥에 후드를 뒤집어쓴 노파 하나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들의 경고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에스페다인이 없다 보니 유독 눈에 띄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을 경계하던 병사들이 경례를 올려붙였다. 비센테의 손짓에 힐다를 겨누고 있던 창이 치워졌다. 그는 노파를 경비대 안의 빈 창고로 들였다.

    “힐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았지?”

    “전해 드릴 것이, 꼭… 전해 드려야만 하는 것이 있어서….”

    힐다의 숨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파르르 떨렸다.

    “이봐. 물을 가져와라.”

    문간에 서 있던 병사가 그의 명령을 받고 잽싸게 튀어 나갔다. 다시금 여자를 돌아본 비센테는 힐다가 더없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이내 웃음기를 깨끗이 거둔 낯으로 고저 없이 물었다.

    “널 반길 상황이 아니란 것은 알 테고. 무슨 수작이지?”

    “이것이 필요하실 겁니다.”

    노파가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그 속에 담긴 액체는 짙은 황금빛이었다.

    “이게 무엇인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쓰셔야 할 곳이 생기면….”

    “수작은 집어치우고.”

    알 수도 없는 운명에 그는 평생을 질질 끌려다녔다. 나중에는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최초의 강제성을 잊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수상쩍은 약물에까지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유리병을 바닥에 떨어뜨릴 듯 손을 기울이자, 힐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쓰실 것이 아닌, 엘레나께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아가씨께….”

    노파에게서 튀어나온 이름에 걷잡을 수 없는 싸한 분노가 치밀었다. 내내 이성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복잡한 감정이, 기어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는 새파란 눈으로 힐다를 내려다보았다.

    “…엘레나가 지금 무슨 상태인지 알고 있나?”

    “저는….”

    그는 힐다의 앞섶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순간은, 눈앞의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저 사특한 마녀로나 느껴졌다. 그와 엘레나의 운명을 다 알고도 방관하는….

    분노로 부들거리는 잇새를 비센테는 간신히 악물었다. 씹어 뱉었다.

    “대답해라, 마녀여. 엘레나는 지금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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