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51)

01. 종막, 그 직전

죽음은 그에게 늘 가까웠다. 엘레나의 죽음은 아무리 보아도 무뎌지지 않는 반면, 그 자신에게 닥칠 죽음에는 삶을 회귀할 때마다 정확히 그만큼씩 무뎌졌다. 그렇게 끝내는, 두 번 다시 그녀가 없는 세계를 버틸 자신이 없다는 비겁한 감상만 남았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으리라.

“애초부터 죽음을 각오하신 것 압니다.”

루카스의 목소리는 치미는 화를 겨우 참아 내는 것처럼 들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엘레나의 평온을 장담할 수 있기만 하다면야 죽음쯤이야 기꺼웠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일 것 같았다. 삶의 무엇도 그 애를 위해 쓰지 못할 게 없었다.

그의 일생, 팔과 다리, 숨 한 모금과 머리카락 한 올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엘레나의 행복과 안전만을 빌며 반복해 온 세월. 그 끝에 각오한 죽음이었다. 제 죽음과 등가로 교환한 그것이 무위로 돌아간 허망함이 사무쳤다.

“…실 겁니까? 카스타야 영애께서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

“반드시 살아서, 자신을 찾아 달라고요.”

영영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정신이 그렇게도 돌아왔다. 반드시 살아서, 너를 찾아 달라는 말 한마디에.

“해서.”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목울대를 긁었다. 그는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었다.

“황궁에 홀로 두고 탈출했다고. 그게 변명이 되리라 보나?”

“…송구합니다. 미리 마련해 둔 운송 수단은 하나뿐이었고, 부상자를 신경 쓰며 탈출할 만한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설령 전하께서 깨어 있으셨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

“그분께서 폭발로 시간을 끌어 주지 않았다면, 시간 내에 탈출이 어려웠을 겁니다. 황태자군의 경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

“애초에 전하께서 의식이 있으셨다면 그분을 희생하는… 그런 계획을 허락하지도 않으셨겠습니다만.”

루카스의 말에 담긴 뼈를 비센테는 읽었다.

그는 간혹 엘레나의 일이라면 이성을 잃었다. 그게 전장 한복판이든, 수도에서든. 황제가 그를 향해 지나치게 날을 세우는 와중에도 계산조차 없이.

그들은 회귀한 시간을 기억할 능력이 없으니, 카스타야 영애와 관련해 사소한 우연이 지나치게 자주 겹쳤던 것쯤으로만 인지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서쪽 탑에서의 그 순간만큼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단단히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몰렸을 때의 그는 제법 미친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제발, 전하.”

“지금 아가씨께선 황궁에 홀로 계십니다. 그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분명 죽지 않으셨을 겁니다. 어떻게든 몸을 빼내어 안전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계시겠다고, 그렇게 전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

차라리 나의 죽음을 명령하지. 그랬다면 차라리 기꺼이 따랐을 것이다.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나는 너를 이렇게나 이해하는데, 너는 나를 하나도 모른다는 게. 너를 두 번이나 놓치고도 내가 감히 제정신으로 살 수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헛웃음이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그럼에도 몸은 목줄 묶인 개처럼 움직였다.

“처음부터 이걸 계획한 것이겠지. 카스트로가 저를 어쩌지 못할 것을 계산하고, 최악의 경우 네 몸이나 내어주며 시간을 끌 심산으로. 네 생각을 내가 모를까….”

입에 고인 말이 의식도 전에 흘러내렸다. 루카스가 아주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데도, 비센테는 무엇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작해야 그게 그가 부릴 수 있는 여유의 전부였다.

“군은.”

다시금 반짝 떠진 청보라색 눈동자가 명료하게 가라앉았다. 단테가 서둘러 보고했다.

“폰테강의 상류에 보병과 기병대가 집결해 있습니다. 강의 하류 쪽에는 황실로 징수된 보급품이 쌓인 선박들이 있습니다. 그쪽에는 장창병과 보병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비센테는 눈을 내리깔아 활짝 펼쳐진 지도를 살폈다. 카스트로군의 지휘 체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외부에 주둔해 있는 황태자군은 상호 간의 소통이 막혔고, 그렇게 고립된 군대를 차츰 안에서부터 갉아먹었다.

서로를 의심하며, 스스로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종내는 자멸에 가까워지도록.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벨몬테뿐이었다. 검붉은 핀들이 득시글하게 꽂혀 있는 벨몬테의 주위를 푸른 핀들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가 제 발로 카스트로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기 전 짜 두었던 그대로의 판이었다.

“정예군들은? 위치가 이동되었군.”

“지난번에 보고드렸듯, 지하 수로를 통해 황궁 내부로 침입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벨몬테가 뚫리는 즉시 작전을 시행할 겁니다.”

임시 거점의 천막을 들추고 들어온 엔리케가 조용히 대답했다. 비센테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엔리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엔리케는 다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면목 없습니다. 감히 전하의 의중을 함부로 재단한 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치죄하신다면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너는 나를 상관으로서도, 지휘관으로서도 무시했다. 명령에 불복종한 군인의 말로를 몰라서 감히 그러했나.”

“설명을… 송구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엔리케의 피로한 낯이 순식간에 해쓱하게 질렸다. 양손으로 땅을 짚고 이마로 바닥을 찧었다.

“어떤 벌이든 감내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셔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전하이십니다.”

“하극상을 일으킨 군인을 멀쩡한 지위에 둘 수는 없다.”

비센테는 냉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치죄는 왼쪽 눈이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엄중한 감시 아래 감금도 따를 것이다. 그래도 받아들이겠나?”

엔리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질끈 감겼다가 이내 무엇을 각오한 듯, 결연하게 눈을 떴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끝을….”

잔뜩 목이 멘 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저는 전하께서 이 모든 여정의 끝을 보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승리를, 믿습니다.”

엔리케의 초록색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오롯한 맹목이었다. 황실에 대한 적의로, 대의에 대한 믿음으로 맹렬하게 타올랐다. 비센테는 서늘한 눈으로 한동안 그를 직시했다. 이윽고, 손을 뻗어 직접 엔리케를 일으켜 주었다.

“치죄의 시기는 스스로 정해라.”

“송구합니다….”

“올리바레스 공작의 지원군은?”

물 흐르듯 이어진 점검을 곧장 루카스가 받았다.

“올리바레스 공작 영윤께서 지원군을 이끌고 이곳, 남동쪽 세르반 평야에 집결해 있습니다. 포격이 시작되면 비탈리의 군 주둔지에서 가까운 다리를 끊고, 삼십 분 내로 전장에 합류할 겁니다.”

“반데라스 백작은 막내가 인질로 잡혀 있다더군요.”

“병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약속했던 무기와 보급품은 어제부로 도착했습니다.”

“바섬 백작의 지원군도 집결해 있습니다.”

비센테는 큼직한 지도가 놓인 긴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었다. 수그린 시야의 끝에 성곽이 닿았다.

“성곽에는 카르피오가 보낸 대포 이십 문을 위장해 배치해 두었습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대포로 성곽부터 공격을 시작할 겁니다. 충차와 내부에 침투해 있는 우리 측 보병들이 양동 공격으로 성가퀴의 총병들을 해치우면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계획대로라면 두 시간만에 벨몬테의 성벽을 부수고, 수도 내부의 경비대 세 곳을 점거한 후 곧장 황궁으로 진격합니다.”

루카스가 푸른 핀 다섯을 각각의 군 집결지에 꽂아 넣었다.

“기동대들이 황궁의 정문 근처까지 대포를 끌고 가면 정측 문과 동시에 동측 문을 공격할 겁니다. 문이 열리면 기마병들이 먼저 들어가고 뒤이어 장창병과 보병이 진입합니다. 내부에서 있던 폭발로….”

그 말을 하며 단테는 비센테의 시선을 피했다.

“…경비병들 다수가 자리를 이탈했을 겁니다. 우리에겐 기회입니다.”

“가교가 끊어졌으니 황태자 측 지원 병력이 도착하는 것에는 최소 여섯에서 일곱 시간이 걸릴 겁니다.”

“모두 전하께서 계획하신 그대로입니다.”

비센테의 표정은 일견 차분해 보였지만, 그 얼굴 아래 잘 벼려진 칼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뗄 수 없는 적막이 흘렀다.

“전하, 해가 완전히 떠오릅니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비센테는 테이블을 짚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들판을 빼곡히 채운 보병과 기병대, 궁병들이 보였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황제의 신하였던 가문들의 깃발이, 그 곁에는 멀지 않은 미래에 그의 신하들이 될 젊은 귀족들의 도열해 있었다.

라스팔마스, 알바세테, 바예카, 기메라…. 하나같이 서른을 넘지 않은 젊은 영윤들이 결의에 찬 얼굴로 그를 경외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하나둘 허리를 굽혀 황제를 위한 예를 표했다.

“…….”

그는 잠시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모든 광경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려 온 듯 온몸의 피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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