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151)

환각은 급작스럽게 닥쳤을 때처럼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엘레나는 그 순간 제가 원하던 곳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도 중앙에 걸린 초대 황제의 초상화 앞에….

그 밑의 명패를 손으로 짚자, 덜컹거리며 문이 열렸다. 그녀는 쓰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아, 드디어….’

고꾸라지는 그녀의 몸을 부드러운 카펫이 받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을.’

엘레나는 악착같이 기어가 창문의 커튼을 뜯어내듯 걷었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햇빛에 눈앞이 하얗게 명멸했다. 밀려든 안도감에 엘레나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열에 한참을 들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가까워지는 기사들의 군홧발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둔중한 머리가 간신히 생각을 이었다.

‘만약 저 기사들을 이끄는 사람이 카스트로라면… 비센테의 반역은 실패한 거야.’

그러면 스스로 죽을 것이다. 비센테가 없는 세상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면, 알 텐데….’

그녀는 비척거리며 바닥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카펫에 이마를 처박은 채로 바르작댔다.

‘비센테가 이겼다면 시모라의 푸른 깃발이, 걸렸을 테니까.’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놀랍게도 황궁의 전경이 환각처럼 펼쳐졌다. 쓰러지는 카스트로와 오합지졸처럼 쓸려나가는 황태자의 군대, 그리고 푸른 깃발을 드높인 채 황궁으로 당당하게 입성하고 있는 비센테의 기사들.

엘레나가 놀라서 눈을 깜박인 순간 다시금 방 안이었다. 여전히 바깥은 소란스러웠지만 그녀를 찾아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엘레나는 다시 앓기 시작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꿈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돌아가신 선황제 폐하가, 바섬 백작 부인이, 카스타야 후작이, 죽은 어미가, 시에나가, 아멜리아와 레베카가, 그리고, 비센테가….

“…….”

문득, 눈을 떴을 땐 창문 너머로 오후의 느지막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눈을 떠, 제 상체를 안아 올리는 팔의 주인을 확인했다.

역광을 입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가 몸부림을 치자, 그가 단단한 팔로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엘레나…. 내가 왔어.”

아. 그녀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피로했다.

황제의 대관식에나 쓰이는 긴 망토가 그녀의 여윈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가 그 상태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지 않도록 세심하고 단단히 받쳐 들었다. 그녀는 겨우 고개를 가눴다.

“비센테, 우리, 어디로….”

“어디 안 가. 이제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전부 다 잘 해결되었어.”

그녀는 안심했다.

비센테는 그녀를 꽉 안아 든 채로 나아갔다.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힘든 내색이라고는 없이.

가까스로 뜬 시야에 본궁이 보였다. 거대한 복도와 접견실, 그 너머에 황좌가 보였다. 그 아래 카스트로의 시체가 전리품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들이 걷는 길마다 푸른 깃발을 든 기사들이 있었다. 그 앞에 에스페다의 고귀한 대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비센테가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파도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다.

“폐하.”

그는 이내 계단을 전부 올라섰다. 거대한 황좌의 앞에 서서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선 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고양감이 등줄기를 타고 소름처럼 돋았다.

결국 돌고 돌아 이 자리였다. 그가 잃었던 것들을 돌려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환각처럼 떠올랐다.

“많이 아파? 미안해. 내가 제대로 잡아 주었어야 했는데.”

“전하께서, 잘못하신 게, 훌쩍, 아니에요….”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 없게 할게.”

“…거짓말.”

“정말이야. 두 번 다시 이렇게 아플 일 없을 거야. 평생, 내 무엇을 걸어서라도 널 지킬 테니까.”

엘레나는 행복하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터트렸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녀가 지킬 차례였다.

신이시여. 다만, 나의 황제를 구하소서.

***

“왜요?”

“응?”

“왜 절 지키신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니… 널 사랑하니까?”

비센테는 확신 없이 엘레나의 말에 대답했다. 눈물이 그득 고였던 엘레나의 표정이 뾰로통해지자, 수습하듯 덧붙였다.

“부황께서는 모후만을 아끼신다고 맹세하셨대. 그게 사랑이라고 하셨어. 난 영원히 널 그렇게 아껴 주고 싶어.”

“영원히라고요? 맹세하실 수 있어요?”

“맹세해.”

“제가 이렇게 아름답지 않아도요? 아주 나이가 들어 버려도요?”

“그래. 나는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제가 죽어도요? 아니면 전하께서 죽어도요?”

그들 나이 또래에 죽음은 언젠가 아주 먼 미래를 의미했다. 그는 제 어린 약혼녀가 조금 유별난 성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또랑또랑한 눈은 아주 귀여웠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간질거릴 정도로.

무엇이든 약속하고 싶게 만드는 자그마한 손도, 통통하고 앳된 뺨도.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엘레나. 언제나,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거야.”

그래서 그는 맹세했다.

<본편 완결,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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