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51)

그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며 잔뜩 흥분한 아래를 가져다 붙이려는 찰나였다. 엘레나의 오른손이 번뜩 날카로운 빛을 반사하며 움직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약 기운 때문에 고통도 못 느끼는 듯했다. 카스트로는 제 옆구리를 짚었다가, 손바닥에 흥건히 피가 묻어나는 것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 눈으로 보고서도 현실로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이건, 이거는….”

그가 깜박 엘레나를 붙잡았던 손아귀에서 힘을 풀며 어눌하게 반복했다. 그녀는 카스트로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한 번 더 스캘펄로 그의 허벅지를 세게 내려찍었다.

“으아아악!”

그제야 생생한 통증을 느낀 듯 카스트로가 끔찍한 비명을 토해 냈다. 그녀는 그를 있는 힘껏 밀쳐 내고 재빨리 침실의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직 카스트로가 몽롱한 약 기운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는 동안, 서둘러 침실의 문을 안에서부터 잠갔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의자며 가구들을 모조리 쓰러뜨려 문 앞을 막았다.

“엘레나! 이 미친, 정신 나간 계집이…! 이 문, 안 열어?”

이윽고 문고리가 위협적으로 덜걱덜걱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쁜 숨을 가누면서도, 불안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여기까지는 모두 계획적이었다. 카스트로가 제 몸에 남은 흔적을 발견하면 이성을 잃을 테니까. 그 집착적인 성격에 주변을 물리고 그녀를 당장 강제하려 들 테니까…. 물론, 약을 쓰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뒤이어 기사들이 응접실까지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이 문 부숴!”

몸으로 부딪쳤는지 쿵, 쿵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천장의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제법 튼튼한 목문이니 도끼로 찍는다 해도 5분은 버틸 터였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침실을 가로질러 침대 옆의 거대한 태피스트리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황태자비를 위해 마련된 방은 그녀가 스무 살 때부터 5년을 꼬박 사용한 공간이었다. 비밀 통로가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숨겨져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졸속으로 황위를 물려받은 로드리고 황제나, 카스트로는 끝내 몰랐겠지만….

‘문제는 입구 위치를 알긴 해도, 어릴 때 말고 열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녀는 왼손으로 벽을 콩콩 두드렸다. 몇 번 반복하자 다른 벽과는 달리 텅, 텅 울리는 소리가 깊은 곳을 찾아냈다. 벽을 더듬는 손끝에 미세하게 바람이 흐르는 틈이 느껴졌다.

‘여기다.’

양 손바닥을 벽에 대고 힘을 주자, 먼지가 우수수 쏟아지며 감춰져 있던 틈새가 모양을 드러냈다. 곧 끝까지 부드럽게 밀리며 감춰진 통로가 나타났다. 그녀는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랜턴을 집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침착하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움직였다. 온몸이 벌벌 떨렸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었다. 기절하더라도 비센테와 약속한 곳까지는 가야 했다. 그녀는 주의 깊게 발밑을 비추며 나아갔다.

한때 화려했을 숨겨진 복도는 방치되어 퀴퀴한 먼지 냄새를 풍겼다. 심지어 가구들은 삭다 못해 손만 대도 무너질 것처럼 생겼다. 그녀는 가까스로 복도의 끝에 이르렀다. 여기서 왼쪽은 황태자의 방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고, 모퉁이를 돌면 위쪽으로 향하는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일단 올라가자.’

계단은 한 칸의 높이가 높았다. 거의 손발로 기듯이 계단을 올라가자, 자물쇠가 반쯤 부서진 철문이 보였다. 이벨린은 들고 온 랜턴을 바닥에 내려두고 양손으로 녹슨 철문을 힘주어 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새로운 복도로 굴러떨어졌다.

‘이곳은.’

이쪽은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위치를 놓쳤다. 그러나 복도에 걸린 초상화들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는 황태자 궁의 꼭대기 층이었다.

기밀문서와 보물들을 보관하는. 그녀는 이 믿기지 않는 행운에 감사했다.

‘여기서, 좀 더 중앙으로.’

의식이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약 기운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당장 제 머리를 후려쳐서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 바늘로 온몸을 찔러 대는 통증이 일었다. 그녀는 끊어질 것 같은 신음을 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

그녀는 복도의 벽을 붙잡고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스트로의 끔찍한 고함을 소리도. 아마도 카스트로가 문을 열어젖힌 모양이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에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기이하게도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이 빛바랜 환각처럼 떠올랐다.

“쉿. 여긴 비센테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곳이란다.”

“그런데 제게는 왜 알려 주세요?”

“…사실 짐은 네 아비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 어찌나 탐욕스러운지.”

“그러신 것 같았어요.”

그녀의 되바라진 대답에 이 어린 것 좀 보라는 듯 비센테를 닮은 얼굴이 웃었다. 젊은 황제의 뒤에서 시에나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제 아들은 공부나 하라고 떼어 놓고 황제 부부가 어린 엘레나의 손을 붙잡고 이곳저곳 쏘다니는 건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엘레나는 그때마다 매번 어색해하면서도, 가끔은 그저 비센테가 부러웠다.

“이건 그냥 영애가 귀여워서 알려 주는 거야. 나중에 우리 비센테도 잘 부탁할 겸.”

“저어, 송구하지만요. 반대예요. 제가 오히려 전하께… 부족해서….”

“카스타야 후작이 진짜 네 앞에서 별소릴 다 하는군.”

황제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고는, 어린 엘레나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센테가 나중에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면 여기 숨어 버려. 황궁에선 남몰래 도망칠 공간 정도는 필요한 법이야. 시에나도 그랬거든.”

“전하께선… 저를 속상하게 안 하세요. 여태껏 단 한 번도요.”

그 말에 시에나와 황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곤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따듯하고 다정한 웃음이었다.

“그러면 다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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