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51)

절박함인지, 기막힘인지, 희열인지, 분노인지. 범인은 짐작조차 못 할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거리는 녹색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엘레나는 고집스럽게 카스트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엘레나는 카스트로의 얼굴이 서서히 분노로 벌겋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앞섶을 틀어잡았다.

“아, 흑….”

카스트로는 그녀를 잡아챈 채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녀는 그대로 황태자비의 방까지 끌려 들어갔다. 걷어차인 목문이 세차게 열리자, 방 안에 남아 있던 하녀들과 기사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다 꺼져. 뒤로 돌아서든지.”

그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명령한 카스트로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엘레나의 몸에서 지저분한 후드를 거칠게 벗겨 냈다. 그들이 저들은 여태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그가 엘레나의 하녀복을 붙잡고 찢듯이 잡아 내렸다. 단추로 단정하게 목까지 채워져 있던 옷이 찢어지며 어깨와 가슴의 윗부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엘레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카스트로를 쏘아보았다.

“…….”

잡아먹을 듯 흉흉한 카스트로의 눈이 그녀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내렸다. 가냘픈 목과 희게 드러난 어깨, 가슴골 그리고 그 위로 발긋하게 피어난 울혈을….

카스트로는 그녀의 예상보다는 침착해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엘레나는 그게 완벽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안 꺼져!”

목에 핏대가 서도록 고함을 지른 카스트로가 주먹을 들어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화병이며 찻잔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녀들이 벌벌 떨며 비명을 질렀다.

카스트로의 분노에 기사와 하녀들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찰나의 시간 동안 내려앉은 침묵은 영원 같았다.

그는 제 손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분노로 시뻘겋게 물든 그의 얼굴은 거의 보랏빛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누구야?”

카스트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붙잡아 고개를 뒤로 꺾듯이 들어 올렸다. 뺨에 와닿는 거친 숨결에서 정제되지 않는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레나, 응?”

“…….”

“대답 좀 해 봐. 누구랑 어쩌다 이렇게 흘레붙고 와서는… 네 예쁜 몸을 다 버려 놨잖아.”

그의 분노에도 엘레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뽑혀 나갈 것 같은 고통에도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카스트로를 쏘아보았다.

“어떤 개새끼인지 말 좀 해 봐. 응? 네가 얼마나 값싼 창녀처럼 붙어먹었는지, 누구에게 그 다릴 벌려 준 건지!”

“누구라고 말하면? 당신이 뭘 어쩌려고?”

그녀의 대답에 카스트로는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감히, 제게 이런 식으로 말대답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는 낯이었다.

“…뭐?”

“다, 정말 아무하고나 다 잤어.”

카스트로의 얼굴에 깃든 충격에 그녀는 잔인한 희열을 느꼈다.

“당신 뜻대로 못 되어서 어떻게 해? 내가 누구 애를 뱄을 줄 모르니, 당신 결벽증에 이제 열 달은 내게 손도 못 댈 텐데….”

“이, 창녀만도 못한, 계집이…!”

번뜩. 눈앞에 불꽃이 세게 튀며 고개가 한 차례 휙 돌아갔다. 엘레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였다. 귀가 먹먹했고, 입 안에 침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고였다. 아픔은 도리어 한 박자 늦게 느껴졌다.

그녀는 겨우 카스트로가 제 뺨을 후려치듯 때렸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

아,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다. 순식간에 공포를 기억해 낸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창백해질 수도 없는 낯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눌렀다.

“그러게 처음부터 고분고분했으면 좋았잖아.”

수그러든 그녀를 본 카스트로가 그제야 잔인하게 비웃었다.

“어차피 네게서 태어난 첫 아이는 죽이면 그만이야. 물론 태가 더럽혀졌으니 황후의 자리는 못 주겠지만…. 널 버리지는 않을게. 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날카로운 비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역겹게 들릴 줄이야.

“넌 이제 이 방 밖으론 단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거야.”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럴 수는 없지. 내가 네 몸을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했는데….”

“…….”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널 가져야겠어. 더는 네 지저분하고 끔찍한 상태를 견딜 수가 없군. 네 더러워진 몸을 내 것으로 소독해야만 해.”

“무슨, 미친… 소릴….”

“삼켜.”

앙다문 엘레나의 입술을 우악스럽게 벌린 그가, 그녀의 입에 무엇인지도 모를 알약을 물려 주었다. 카스트로는 마구잡이로 그를 때리는 엘레나의 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코와 입술을 틀어막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참을 버둥거리며 반항하던 엘레나는, 의식이 가물거릴 즈음에야 본능처럼 목울대를 움직여 약을 삼켰다. 그제야 그가 막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하윽, 코, 콜록! 으….”

그녀는 콧물과 눈물, 침을 줄줄 흘리며 연신 기침을 해 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옷을 마저 찢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무언가가 시작되려고 하자, 하녀들이며 기사들이 다급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아… 으….”

그가 먹인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의 구석구석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으로 신음했다. 그 모습에 카스트로가 같은 알약을 씹어 삼키며 픽 웃었다. 바르작거리는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내성도 없는 네겐 너무 독했나?”

그녀와 달리 순식간에 풀린 동공이 기분 좋게 몽롱해 보였다. 엘레나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오, 오지 마….”

그녀가 벌린 거리만큼 그가 역겹게도 히죽대며 쫓아왔다. 그녀를 사냥하듯 몰아붙이는 이 상황이 기꺼운 모양이었다.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머리가 팽팽 돌고, 오한이 일 때처럼 온몸이 시리고 추웠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민 채 재차 뒷걸음질을 쳤다.

“어디까지 가려고? 스스로 침실까지 가게? 응?”

“오지, 마…. 카스트로. 제발… 이러지 마.”

“누가, 카스타야가 곱게 길러 낸 창녀 아니랄까 봐….”

“…….”

“아무하고나 잤다고 큰소리나 쳐댔지만… 내가 널 모를까? 해 봐야 비센테에게나 내주었을 것 알아….”

“…….”

“네 알량한 동정심이 그 새낄 두 번 죽인 거야. 그 새낀 제 시체의 잿더미조차 남기지 못할 테고….”

“…읏.”

“그 뒤로 넌 여기서 박제되어 내 것이나 받고 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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