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51)

“지금, 얼마나… 몇 시나 되었죠?”

“폭발이 7시쯤 일어났고 기사님께서 거의 곧바로 당신을 발견해 데려오셨으니까… 폭발음을 듣고 기절했다면, 그때로부턴 한 시간 반쯤 지났어요.”

한 시간 반. 그러면 8시 반이라는 소리였다. 하녀들이 그녀가 ‘죽은’ 것을 최초로 인지했을 시간….

그리고 그녀가 커튼을 걷기로 한 9시까진 고작 30분이 남아 있었다.

“가 봐야겠어요.”

“미쳤어요? 그 몸을 하고 어딜 가요?”

“안 그래도 늦어서… 지금 당장 가야 해요.”

치료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뭐, 움직이고 말고는 당신 마음이긴 한데요. 그 다리로 무리했다간 평생 못 걸어 다닐걸요.”

“못 걷는다니….”

“말 그대로예요. 발목이 거의 작살 났으니까. 움직이고 싶더라도 지금은 참아요. 약을… 가져올 테니까. 적어도 그거는 먹고 결정해요.”

그녀는 엘레나를 흘끗 바라보고는 서둘러 치료소를 빠져나갔다. 약을 가져오겠다고…. 우습지도 않은 변명이었다. 치료소 안에 약이 없으면 어디에 있으려고. 그녀는 치료사가 기사를 부르러 갔다고 확신했다.

엘레나는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섰다. 조금 쉬었다고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편해져 있었다. 그녀는 치료소를 빠져나가기 전, 사이드 테이블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스캘펄까지 챙겼다.

그녀는 지저분한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 복도로 나섰다.

몇 걸음 걷지 않아서 그녀는 일사불란하게 뛰어가는 병사들을 목격했다. 궁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샅샅이 뒤져.”

“범인은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수상쩍은 자가 있으면 곧바로 신고해.”

엘레나는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동이야? 아침엔 마구간이 불타더니….”

“사실 내가 들은 게 있긴 한데….”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황태자 전하께서 끼고돌던 그 여자가 살해당했다나 봐. 시중을 드는 하녀가 방금 숨도 쉬지 않고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더라고.”

“그런데도 황태자 전하께선 근처를 수색하라는 명령만 남기시고 바로 서쪽 탑으로 가셨다면서?”

“아무래도 그 여자의 망령이 황태자 전하께 붙은 게 분명해.”

“그 여자?”

“그 죽은 약혼녀 말야…. 카스타야의 아가씨.”

“쉿! 얘가,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어…!”

“거기! 흩어져!”

하녀들은 심란한 듯 저들끼리 속삭임을 재빨리 주고받더니, 기사의 호통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대화에서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엘레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양손을 꽉 맞잡았다.

‘아멜리아는 폭발음을 듣고 잘 빠져나갔을까? 비센테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잘 탈출한 게 분명한데….’

뭐가 됐든 여기서 이렇게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기사나 견습 치료사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일단은 서쪽 탑으로 가서 아멜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한 뒤에, 별궁으로 가서….

“너는 누구지?”

복도의 끄트머리에 다 와 갈 찰나, 기사 한 명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가 시선을 잡아끈 모양이었다.

그가 그녀가 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쭉 빼 뒤를 살피더니 물었다.

“저쪽은… 기사단 쪽일 텐데. 어디서 왔지?”

“어제 동관에 일손이 부족해서 도우러 갔었어요.”

그녀는 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스캘펄의 손잡이를 꽉 눌러 쥐었다. 언제든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할 수 있도록.

“동관에?”

기사의 눈이 그녀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는 게 느껴졌다. 솔기가 터진 하녀복이나, 치맛단 아래로 보이는 부목을 덧댄 발목…. 그녀의 참담한 차림새를 아래위로 살펴본 기사가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황태자 궁의 하녀인가? 신분패는?”

“여기 있어요.”

그녀는 후드 속에 넣어 두었던 신분패를 공손히 내밀었다. 기사는 신분패를 확인하곤 짧게 혀를 찼다.

여자의 옷차림이 황자의 시중을 든 것 치고 지저분하긴 했지만, 높으신 분들의 취향이야 알 바는 아니었다.

황태자가 2황자의 방에 여자들을 들여보내고 있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종마 노릇은 곤란하다며 독한 약을 조롱하듯 잔뜩 쥐여 주면서….

눈앞의 하녀도 후드를 뒤집어써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제법 예쁘장한 태가 났다. 기사는 신분패를 돌려주며 고갯짓을 했다.

“…가 봐.”

저토록 처참한 꼴을 하고 있으니 별다른 꿍꿍이가 없으리라 확신한 태도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날붙이를 쥐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손이었다. 아예 방심하고 있는 상대라면 모를까…. 경계하는 기사를 상대로는 1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서둘러 인사하고 바쁘게 지나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말이야.”

기사가 바로 곁을 지나치는 그녀의 손목을 다시금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곧장 그녀가 푹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뜯어내듯 젖혔다.

기사의 눈이 아주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거든.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를 발견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잡아 두라고 하셔서.”

“…….”

“네 머리카락이 마침 갈색이네. 눈도 파랗고.”

그녀는 헐떡이며 기사의 손을 붙잡았다.

“놓아, 주세요. 저,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제가 아니에요.”

“거짓말 마. 치료사 계집이 널 신고했어. 내가 서둘러 와 보길 잘했지…. 아, 황태자 전하.”

그렇게나 무도하게 굴던 작자가, 순식간에 공손한 낯으로 그녀의 등 뒤를 향해 예를 갖췄다. 황태자 전하라고. 그러면….

“엘레나.”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구둣발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그리고 망연히 서 있던 몸이 우악스럽게 돌려졌다.

“…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