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51)
  • “죄송하지만 여자 한둘 때문에 그쪽으로 돌릴 병력이 없습니다. 게다가 화재라뇨? 잠깐 시선을 돌릴 순 있겠지만, 그러다가 괜한 경계심이라도 가지면….”

    “알겠어요. 저 혼자 할게요.”

    “…예?”

    “필요한 걸 준비만 해 주면 제가 직접 하겠다고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 엔리케의 표정이 어떠했던지….

    “비야톨레드로 여자 한 명이 찾아갈 거예요. 그 사람만 잘 보살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엔리케의 저 부실한 약속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길어지려는 생각을 단호하게 밀어 치웠다. 지금은, 한가롭게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해가 더 높게 떠오르기 전에 황태자 궁의 마구간으로 가야 했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하녀가 이벨린의 몸을 발견할 거야. 그러면 수색이 시작될 테고, 서쪽 탑에 갇혀 있는 아멜리아도 들킬 테니까….’

    엘레나는 발목의 통증을 무시한 채 열심히 걸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지만, 주저앉아 울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황태자 궁의 마구간에 도착했다.

    ‘지키는 사람은 역시 없네.’

    최근 황태자 궁의 시종들은 당장 코앞에 닥친 대관식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회 준비만으로도 정신없을 텐데, 본궁으로의 이사까지 동시에 진행 중이니 더 그러했다.

    대관식 직후, 황제께서 황태자 궁에 머물 수는 없었으니까.

    ‘카스트로의 말들도 이제 모두 황제의 개인 마구간으로 옮긴 뒤니, 자연스럽게 관리가 소홀할 수밖에.’

    그녀는 텅 빈 마구간을 절뚝거리며 가로질렀다.

    ‘다섯 번째 마방이라고 했지. 빗장은… 풀려 있어.’

    엔리케와 미리 약속한 마방으로 들어가자 수북이 쌓인 짚 더미가 그녀를 맞이했다. 쪼그리고 앉아 짚 더미를 헤집자, 그 아래 성냥과 기름을 담은 병이 나타났다.

    조금 더 깊숙이 들추자 군데군데 화약 더미들이 심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화약의 양으로 봐서 폭발이 크지는 않을 거야. 이목을 너무 잡아끌면 안 되니까….’

    그녀는 자꾸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기도하듯 손을 맞잡았다.

    ‘황태자 궁의 경비가 허술해서 서쪽 탑에서 먼저 발견할 거야. 지금은 황태자의 안위가 최우선 순위니까, 경계를 서던 자들부터 달려올 테고….’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아멜리아가 빠져나올 정도는 될 것이다. 가장 좋은 건, 그녀와 아멜리아가 한 번 더 바꿔치기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 순간, 종이 일곱 번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식적으로 성의 아침은 8시부터 시작된다. 이제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이제 불을 붙여야 해.’

    그녀는 기름을 짚에 골고루 부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겨우 성냥에 불을 붙이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불이 붙은 성냥을 짚 더미 위로 던져 넣었다. 처음에는 짚 더미 아래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던 위치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됐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게 옮겼다. 거의 마구간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발목에 더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큰 통증이 일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아윽…!”

    아무래도 통증을 무시하고 무리한 끝에 발목이 완전히 망가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겨우 근처의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기름을 듬뿍 먹은 짚 더미에 순식간이 불이 옮겨붙는 게 보였다.

    ‘아… 불이 붙는 속도가….’

    그녀는 필사적으로 굴러 마구간을 빠져나왔다. 간신히 문을 통과하자마자 등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콰아앙!

    마구간이 불길에 완전히 휩싸이는 것과 동시에, 터져 나온 공기의 파동이 엘레나를 세차게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몸이 순간적으로 허공에 붕 떠오른 순간, 그녀는 의식을 까무룩 놓쳤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수풀 속으로 튕겨 나갔다.

    ***

    “아흑….”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약해진 몸을 단시간 동안 지나치게 혹사한 탓인 걸까? 고작 그 정도 충격을 받았다고 혼절하다니…. 그녀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며 온몸의 통증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감각이 없는 것보다, 아픔이라도 느끼는 게 나았다.

    여전히 온몸이 정상으로 기능한다는 소리니까.

    ‘그런데 여긴 어디지?’

    마지막 기억이 풀숲에 처박힌 거였는데 등 뒤가 푹신했다. 모르긴 몰라도 몸에 느껴지는 감각대로라면 도저히 흙바닥은 아닌 것 같았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내가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 거야?’

    엘레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고 했으나,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곧바로 붙잡아 짓눌렀다. 여자였고, 견습 기사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움직이면 안 돼요.”

    엘레나는 경계하는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여, 여기는….”

    여기는 어디고, 내게 무슨 짓을 했고, 당신은 누구냐고. 침착하게 묻고 싶었는데, 입만 열면 폐가 콱 조여드는 탓에 말이 드문드문 끊어져 나왔다. 여자는 용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황태자 궁 기사단 소속의 견습 치료사예요. 여기는 기사단의 치료소고요. 마구간에서 이유 모를 화재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아주 놀랐는데… 기사님께서 그 근처에서 기절한 당신을 발견하고 데려오셨어요.”

    “사람들이… 놀랐, 다고요?”

    엘레나는 놀라서 눈만 겨우 깜박였다. 마구간이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폭발이든 화재든 누가 다칠 일만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설마… 많이 다쳤나요?”

    “아, 인명 피해는 없어요. 이번 일로 당신이 제일 많이 다쳤을걸요. 그 발목까지 포함해서요. 대체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방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치료사는 혀를 쯧 차고는 그녀의 발목을 가리켰다.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자, 붕대로 둘둘 감아놓은 발이 보였다.

    “고여 있던 피를 빼내고, 뼈를 제대로 다시 맞췄어요. 뼈가 붙기 전이라 망정이지…. 단단히 고정해 놨으니 당분간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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