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51)

그러나 정작 그녀가 몸을 완전히 돌려 그를 바라보자, 대뜸 뜨악한 얼굴과 삿대질이 돌아왔다.

“어… 어? 어어어어!”

단테는 여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박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제 눈을 세게 비볐다. 그리고도 그녀가 사라지지 않자, 겨우 더듬더듬 불러 보았다.

“그으러니까… 화, 황태자비… 될 뻔했던 그, 아가씨?”

“카스타야 영애.”

이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루카스뿐이었다. 다시 보니 침착한 게 아니라, 그저 경악한 것을 어떻게든 억누르는 것 같았다. 보자마자 얼굴을 알아본 건 의외였지만….

아마 항상 비센테를 보좌했으니, 가끔 연회에서 그녀를 마주치긴 했었으리라.

엘레나는 제가 가로막듯 서 있던 카우치 앞에서 비켜섰다.

“전하를 모시고 가세요.”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

“하지만 영애. 전하의 안위가 확보되자마자 곧장 군대가 황궁으로 진격할 겁니다. 지금 가시지 않으면 안위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붕대로 어떻게 감아 두긴 했지만,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는 몸이었다. 황궁 바깥으로 이어지는 그 험한 통로를 사내들의 걸음을 따라갈 자신도 없었거니와,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계획 자체가 어그러질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아멜리아는? 폭발로 시선을 끌지 않으면, 아멜리아는 꼼짝없이 서쪽 탑에 갇힐 것이다.

엘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가지 않아요.”

루카스는 속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스트로의 약혼녀로 대우해야 할지, 아니면 비센테와 밤을 보낸 여자로 대우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잠깐의 초조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엔리케께서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전하의 곁에 ‘이벨린’이 있다면, 무슨 수를 쓰든 같이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인질로 붙잡히면 전하의 약점이 될 것이라고요.”

엘레나는 흐리게 미소 지었다. 루카스가 말하지 않아도, 엔리케의 다음 명령이 짐작이 갔다.

“그리고 ‘이벨린’이 따르지 않거든 죽이라고 했겠죠. 그리고 당신은 ‘이벨린’이 아니라 제가 있어서 혼란스러울 테고요. 그러니, 이렇게 해요.”

“무슨….”

“저는 발목 부상이 심해서 당장 두 분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이 길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게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장소를 알아요.”

“어떻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잘 들어요. 제가 무사히 몸을 숨겼다면 9시까지 황태자 궁의 커튼을 걷어 둘게요. 꼭대기 층의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창문을 확인해요.”

“…만약, 커튼이 젖혀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이미 죽었다고 보고하세요.”

“…….”

“이제, 가세요.”

그녀의 재촉에 루카스와 단테가 비센테를 양옆에서 부축해 들어 올렸다. 체구가 원체 건장해서, 기사 둘로도 조금은 버거워 보였다. 단테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 같이 안 가시렵니까?”

“네.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요. 그리고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

“그동안 미안했다고 전해 줘요.”

***

그녀는 절뚝거리는 발로 방을 나섰다. 여전히 아프기는 했지만, 엘레나는 통증에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 통증을 제법 익숙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벨린도 유독 발을 잘 다쳤었지.’

아마도 영혼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걸까? 확신할 순 없었지만,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서두르자.’

단테와 루카스가 침투하며 경비들을 모조리 해치운 탓에 복도부터 완전히 피투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즐비하게 늘어진 시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간신히 동관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엔리케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 대신, 내가 요구하는 걸 들어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드리도록 하죠.”

“황궁에서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제 친구를 빼내고 싶어요. 서쪽 탑과 가까운 곳에서 화재를 일으켜야 해요.”

“2황자 전하께서 탈출하시는 동안 시선을 돌릴 만한 일은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엔리케의 설명에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동관 근처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서쪽 탑의 경비병들은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엔리케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서쪽 탑은 말이 서쪽 탑이지, 벨몬테의 북쪽이지 않습니까? 도개교와도 한참은 멀리 있는.”

“맞아요. 지리적으로 이점은 없지만, 황태자 궁이랑 가깝고….”


0